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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사물적 가능성과 상상적 가능성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본회 평의원)
1.
‘돌멩이’는 돌멩이지 사회주의나 휴머니즘이 아니다. 그런데 시인들이 돌멩이를 돌멩이라는 ‘물리적 존재’로 보지 않고 ‘관념적 존재’로 보려고 한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관습이 되어 있으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정말로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테이블을 테이블로, 꽃을 꽃으로, 구름을 구름으로, 컵을 컵으로 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데, 그렇게 보지 않고, 무언가 그 사물 뒤에 있는 인생이나 문화나 역사나 관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관념화 하는 것은 전혀 그 사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물리학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사상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려고 한 시인은 정지용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지용(鄭芝溶)은 한국 이미지즘의 효시요 사물시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를 직접 보자.
나직이 한 하늘은 白金빛으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 바람에 뺨마다 고운 피가 고이고
배는 華麗한 짐승처럼 짖으며 달려나간다.
―정지용, 「甲板 위」에서
이 시에는 관념어가 없다. 전부 사물어다. “하늘”, “白金빛”, “물결”, “유리판” 등은 모두 사물이다. 의도적으로 관념어를 배제하고 사물어만을 사용했는지, 어쨌든 그렇다. 철저하다고 할 수 있다. 세인들은 그를 모더니스트 또는 이미지즘이라고 말하지만, ‘사물시’임을 말해 준다.
우리 시단에서 탈관념(脫觀念)을 주장하고 사물을 ‘사물 그대로의 날것’으로 보자고 주장한 시인은 오남구(1946~2010), 심상운 등이었다. 오남구는 여러 시인들 앞에서 장미꽃을 들고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었다. “장미꽃”이라고 대답하자, 그 꽃을 갑자기 쓰레기통 속으로 홱 던져 버리고,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또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모두 장미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오남구는 “쓰레기” 하고 말했다. 기존관념에 사로잡혀서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남구는 이렇게 탈관념시론을 내세우면서 혁명적인 방법을 썼다. 기존관념으로 써온 작품을 보고는 일언지하에 “이것이 시냐”하고 내던져 버렸다. 이런 모욕을 잘 참은 시인들은 자기 시의 새로운 방향을 찾았지만 그렇지 못한 시인은 아직도 그의 문하에서 이탈하여 구태의연한 시를 쓰고 있다.
이러한 사물시나 사물주의시의 특징은 무엇일까. 먼저 “하늘은 白金빛으로 빛나고”를 보자. 하늘이 白金빛으로 빛나는 현상은 우리가 항해할 때에나 페리호를 승선했을 때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자연의 한 현상이다.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는 조금 주관성이 들어 있는 점도 있으나 역시 객관적인 묘사로 볼 수 있다.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도 항해 때 배의 이물이나 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물의 현상이므로, 이 장면 역시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 바람”은 은유이나 바다 바람을 쐬는 감촉을 잘 묘사한 대목이다. “동글동글 굴러오는”이라는 이미지에서 탁구공이나 놀이용 고무공 같은 신체적 감촉 즉 촉각이나 신체적 감각을 느끼게 된다. “바람”과 “공”은 물리적으로 보아서 전혀 다른 사물이지만 감촉면에서 받는 촉감만을 특정화하여 강조하면 물리적으로도 그러한 표현이 가능한 느낌이다.
“배는 화려한 짐승처럼 짖으며 달려나간다”는 뱃고동 소리와 짐승의 짖는 소리를 결부시킨 비유이다. 배는 비생명체이고 뱃고동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배를 젖혀두고 그 “소리” 즉 그 시니피앙만을 특정적으로 강조하면, 생명체인 짐승의 짖는 소리(‘개’나 ‘강아지’의 짖는 소리 등)와 결부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초현실적이거나 하이퍼성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시에 어떤 관념을 덧붙이기 위하여 내용을 고치거나 어휘를 더 보탤 수는 없다. 가령 “항해의 즐거움”이라고 그 주제를 관념화 할 수는 있지만, 이 시의 어디에도 항해의 즐거움이나 항해의 기쁨이나 항해의 매력 같은 관념은 없다. 그것을 덧붙인다면 그것은 독자(비평가)가 그렇게 해석하여 뭉뚱그려서 덧붙인 관념에 지나지 않다. 철저하게 사물만으로 된 사물시는 이와 같이 사물만으로 되어 있고, 독자가 자유롭게 해석한 관념을 덧붙일 수 있다. 전혀 별개의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물시의 사물은 이와 같이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실현이 가능하므로 ‘물리적 가능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2.
다음에 서정주의 시를 보자.(이미 발표한 논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내 너를 찾아 왔다. 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서정주, 「復活」에서
서정주는 사물과 관념을 잘 연결하여 조화시킨 명수(名手)였다. 이 시도 그런 일례다. 연인이나 아내와 이별하거나 사별하게 되면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 절실해진다. 실연, 실의, 절망 즉 비탄 속에 있는 마음을 ‘브로큰 하트’(broken heart)라고 한다. 이러한 관념은 멀리 구약성서시대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54세나 된 사람이 남편이나 배우자의 죽음으로부터 5, 6개월 이내에 사망하는 비율은, 같은 연대의 일반적 사망률 비율에서 볼 때 40% 더 높은데, 그 원인은 대부분 심장병 특히 심근경색(心筋梗塞)이었다고 하는 한 보고서가 있다. 실제로 심장이 파열한 것은 아니지만 그 비탄은 ‘브로큰 하트’에 비견할 수 있다.
그리움이 절실할 때, 사방에서 오는 여인이 모두 자기 연인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어떤 감각을 다른 관념과 동일시하는 것을 ‘동화적(同化的) 착각’이라고도 한다. 이는 대상 상실을 메우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모두가 자기 연인으로 보인다는 것은 착각(錯覺, illusion)임이 분명하나, 그럼에도 이 시가 강력한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어떤 보편성’이 있고, 그것의 물리적 착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생각되고, 그 이유는 어떤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상상적으로 타당성 있는 가능성으로 보면, ‘상상적 가능성’(想像的 可能性)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체의 심리상태를 중시하면 물리적 가능성으로도 볼 수 있어서 애매모호한 점도 없지는 않다.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 듯이
香丹아.
―서정주, 「추천사」에서
이 시는 ‘사물시’라기보다는 정서(그리움) 중심의 서정시다. 그러나 “머언 바다로/배를 내어밀 듯이”는 낭만적 이미지이지만 물리적 가능성도 있다. 머언 바다=그넷줄을 밀다, 어부=香丹 등의 등가어로 된 직유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중요 포인트는 동기와 현상(수단)의 등가성이 아닌가 싶다. 즉 머언 바다에 많이 나가 있는 고기잡이로서의 배타기=그네타기(그리움의 정서적 운동) 등이 그 핵심인 것 같다. 배를 두 손으로 바다로 밀어내는 행동과 그넷줄을 머언 하늘로 밀어올리는 행동의 유사성은 직유를 성립시키는 근거도 되지만, 동시에 그넷줄을 밀어내는 행위라는 물리적 가능성의 근거도 된다. 즉 물리적 가능성도 있는 시다.
그런데 ‘물리적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물시로 보지 않고 「추천사」를 ‘서정시’로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시는 「춘향전」의 한 장면이다. 춘향의 그네 타기는 이도령에 대한 그리움, 즉 상실할지도 모를 연인이라는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심적 동요가 반영되어 있고, 특히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라는 명령조의 어조에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한가한 춘향의 유희적 그네 놀이는 결코 아니다. 즉 시의 어조에 그리움의 정서라는 진실성이 진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물리적 가능성이 있는 사물시나 서정시의 기초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다음엔 하이퍼의 가능성을 몇 편의 작품에서 보기로 한다.
나무를 보면 흰색이다
하늘을 보면 흰색이다
나는 종이로 오린 사람처럼 벽에 붙는다
납작한 종이가 되어 흐느적 흐느적 붙는다
―金善英, 「공포」에서
나는 이 작품을 하이퍼시로 보고 싶다. 그렇게 보지 않고 단지 현실의 한 부조리를 지적한 시로 볼 수도 있다. 결론을 서두른다면 이 시는 ‘비유’나 ‘상징’을 보류한 언어 자체의 표면적 의미로서만 보면 ‘물리적 가능성’이 없고 ‘상상적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나무를 보면 흰색이다”, “하늘을 보면 흰색이다”도 물리적 가능성이 없는, 상상 세계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하이퍼시는 원칙적으로 상상적 가능성의 시다. 특히 사람을 종이처럼 오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고, 상상 세계에서만 가능한 메시지다.
그러나 “나는 종이로 오린 사람처럼 벽에 붙는다”를 비유나 상징으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는 생명체이고 “종이”는 비생명체다. 지류(紙類)와 같은 사물의 절단을 생명체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체가 가진 속성, 여러 가지 장기나 내장을 가지 신체적 특성, 호흡과 맥박, 소화와 배설, 인격적 여러 가지 사유의 판단과 성격 등 정신활동은 전부 삭제 내지 도외시되고, 신체적 기능을 비롯한 모든 생명적 기능을 무시한 지류(紙類)와 같은 존재로 전락한 현실적 입장에서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즉 인간적·인격적 속성이 박탈된 지류(紙類) 같은 존재로 바뀌고(현실의 상황에 따라 그러한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배 권력의 종이 오리기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성→종이 같은 비생명체로의 변화에서는 물리세계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의 레벨에서 하는 말이요, 결코 사물 자체의 생물학적 변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가능성으로서는 불가능한 시다. 즉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상상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이퍼시의 한 보기다.
그런데 金善英의 시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지류(紙類), 사람, 종이로 오린 사람” 등이 모두 현실의 물리적 세계에 속하는 사물이라는 점이요. 하이퍼시는 원칙적으로 상상적 세계에 속하는데 김선영의 시를 하이퍼로 간주하면 이 원칙에 어긋난다. 즉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에도 하이퍼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상상적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인간’과 ‘갈대’는 모두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다. ‘인간’은 인격적 생명체이고, ‘갈대’는 식물계에 속하므로, 전혀 카테고리가 다르지만, 연결되어 의미상의 어떤 교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아마 초기엔 하이퍼적 충격을 가졌을지도 모르나 점차 풍화되어 지금은 보통의 비유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는 사자다”와 “그는 여우다”와 같은 은유도 똑 같은 경우다. 사물시는 사물의 세계 즉 현실의 가능성의 시요, 하이퍼시는 상상의 세계 즉 상상적 가능성의 시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는지 모르겠다.
신라 천년의 시간 위를 天馬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하늘 초원 위를 준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바다 파도 위를 백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영혼 속을 詩의 천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김여정, 「갈기에 억겁과 시간을 휘날리며 달리는 말」에서
이 시(『레토피아』 2009 겨울 수록)의 ‘천마’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노정(露霆)을 운반하고 발굽으로 땅을 차면 많은 샘물이 분출했다고 전하는 날개 달린 말이다. 즉 신화 속의 말이므로 상상의 말이며, 이 시 전체도 상상적 가능성 속의 이미지를 형상한 것이다. 말에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일상적 상식에서고 불가능한 이미지다. 즉 물리적 가능성이 없는 이미지다. 더구나 대지(大地)가 아닌,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시간 위’로 말이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는 것은 준마(駿馬)의 극단적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현실에서의 물리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 더욱이 이 시간은 신라 천년의 시간인데, 이는 신라의 왕조의 역사를 추상하여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 왕조의 장구한 역사를 신화 속의 天馬의 이미지를 빌려와서 추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고(思考)와 상상으로 형상된 이러한 추상 속에서 구체적 개념의 가닥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상상적 가능성을 기조로 씌어진 시이며,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이 하이퍼시는 ‘상상적 가능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하이퍼시는 상상적 가능성에 속함을, 김여정의 「갈기에 억겁의 시간을 휘날리며 달리는 말」이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앞에서 물리적 세계에서도 하이퍼 성이 성립할 수 있음을 말했다. 여기서는 물리적 가능성 속에서도 하이퍼성 존재의 여부를 논의해야 할 것 같다.
뇌혈관 어디쯤에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의 세균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이선, 「셀룰러 메모리」에서
이 시는 종래의 시에 비해 ‘새롭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하이퍼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시에서 혈관을 DNA로 바꾸어 보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순종이라는 것이 없고 우리의 조상, 타자(他者)들의 유전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이미 과학에서 밝혀졌다. 이 시는 자기자신이 자기의 ‘유전자 진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혈관, 지능, 충성심, 뭔가의 중독체질 등…. 문제는 이러한 ‘인간 genome’의 분야를 시에 도입한다는 것은, 시의 참신성, 시와 하이퍼성과 관계를 갖게 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은 독자(비평가) 개인의 관심과도 관련되지만,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게놈에 타인의 게놈이 들어와 있다는 점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자기진단은 또 별개의 문제다.
내가 깎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송시월, 「사과를 깎으며」에서
과도로 깎아낸 사과의 껍질을 ‘꽃뱀’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 사물(사과껍질과 꽃뱀)의 연결 방식에 따라 은유도 되고 직유도 될 수 있다. ‘꽃뱀’은 상상세계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 세계에 속하는 동물이다. ‘사과’는 본의(本義: 원관념)가 되고, ‘꽃뱀’은 유의(喩義, 보조관념)가 되므로 두 사물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는 시인의 비밀에 속한다.
그런데 사과 껍질을 “꽃뱀”이라고 했는데, 사과껍질이 물리적으로 꽃뱀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 너를 찾아 왔다. 臾娜?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서정주)와 같은, 어떤 착각(錯覺)의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그리움이나 사랑이나 그러한 정서의 절실성이 밑받침되면 감각에 영향을 미쳐 착각도 시 성립의 타당성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착각의 심리학도 하이퍼를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레토릭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과껍질과 꽃뱀 사이의 촉각의 유사성을 말한 것일까. 어쨌든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과(사과 껍질)/꽃뱀” 등은, 첫째, 현실 내의 물질이거나 동물이라는 점, 현실 내의 사물이면서도 상상세계가 개입되어 그 가능성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그러나 상상 이미지로 그 가능성을 더더욱 강조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하이퍼적’이라고 해야 할지, 하이퍼적인 어떤 특수한 언어 형태(직유, 은유, 환유 등)라고 해야 할지….
4.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는 원칙적으로 하이퍼적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가령 하이퍼의 세계에 현실의 물리적 이미지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하이퍼 시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심심할 때, 크레파스를 들고 내 뇌(腦)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저장된 기억을 뽑아내어 색칠을 한다. 그러면 파란 기억, 노란 기억, 발그레한 기억, 푸른 기억, 희뿌연 기억. 그들은 색유리가 되어 제각기 반짝이다가 아주 가끔 새로운 모자이크 그림이 된다. 그들은 타다 남은 내면의 불꽃같이 아니면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시간의 눈빛같이 아니면 버스 창문 밖으로 지나가버린 아카시아 숲의 향기같이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냄새도 없는, 단지 모니터의 영상 속에 숨어 있는 그러다가 아, 하는 순간 시퍼런 손자국을 남기고 심장을 관통하는 전율.
―심상운, 「기억에 대한 명상」에서
이 시는 의식의 내면세계를 그린 하이퍼시다. 그러나 “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같은 대목은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로 볼 수 있다. ‘공간’이나 들어가서(들어간다나 나온다와 같은 비유는 모두 현실의 사물을 기준으로 그 안과 밖을 정하고, 들어가고 나온다도 그 기준에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상상적 세계 속의 물리적 가능성이 들어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색유리가 되어 제각기 반짝이다가…”도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물리적 이미지들이다. 다시 말하면 상상적 가능성 속의 물리적 세계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하이퍼시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이 이미지들은 하이퍼의 단위인 유니트(unit:연과 연에 배채된 모듈, 리좀 등), 즉 여러 가지 의미 레벨의 단위들이 동시적으로 혹은 거리를 줄여 근접적으로, 혹은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켜 동시 또는 동공간으로 병존 또는 몽타주 되어 한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물리적 가능성 속에서의 여러가지 현상이다. ‘물리적 가능성’은 사물시의 기조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물시’로 규정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시인의 작품에서 그 실례를 보자.
따릉 따릉
따르 따르
딸 딸
핸드폰 저쪽에 웅크려앉아 있다가
큰 바다를 달려와 딸딸거리는 소리
밥그릇을 뺏어버리면 딸딸이 딸꾹 멈추다가 또다시
밤새도록 딸국질을 해댔지, 벼개 밑에 흥건히 고여 있는 소리
딸꾹 멈추면 조마조마하다가 딸꾹 하고 또 멈추다가
밤새도록 따릉따릉 해댔지, 밥을 넣어주면
―김규화 「따릉 딸딸」 에서
위 시는 언어의 소리의 청각 영상인 시니피앙을 찾아나선 일종의 기표 모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청각 영상의 이미지와 다른 이질적 청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실험시운동도 가능할 것 같지만, 여기서는 이런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 속에서의 또 다른 물리적 가능성의 연결에서 생산되는, 즉 이미지 몽타주에서 일어나는 하이퍼시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 시에서는 휴대폰의 시니피앙(기표: 따릉 따릉 따르 따르…)과 인체의 딸꾹질에서 나오는 시니피앙(기표: 딸꾹 딸꾹…) 끼리 연결되는 희귀한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경우, 휴대폰의 기표는 큰 바다(‘태평양’으로 연상된다. 즉 태평양을 건너온 것도 하이퍼적이다.) 이 이질적인 두 시니피앙의 병치가 하이퍼냐, 아니면 보통의 언어 배열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앞에서 거론한 송시월의 ‘사과껍질과 꽃뱀’의 경우와 흡사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따릉 따릉 따르 따르…” 하는 휴대폰 신호 즉 휴대폰의 시니피앙과 인체의 식도에서 일어나는 시니피앙적 연결은 모두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휴대폰의 신호와 식도에서 일어난 소리가 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만큼의 어떤 유사성(동일성)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런데,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두 시니피앙은 휴대폰과 식도라는 물리적 사물 이상이라는 이미지를 연결시켜주고 있고, 이 두 이미지의 병존은 분명 하이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는 거의 상상세계라고 할 만큼의 거리를 뛰어넘어 마치 태평양을 건너온 휴대폰의 기표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5.
하이퍼시와 비 하이퍼시에 관한 두어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토끼가 하늘을 날아간다”와 “산문(山門)의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의 두 텍스트가 있다고 하자. 전자는 하이퍼시이며, 후자는 사물시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1)하이퍼시는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이나, 사물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의 세계 즉 ‘현실적 가능성’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이퍼와 비 하이퍼를 가르는 대원칙이다.
그런데 1)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물들만이 들어 있는 경우와 경험할 수 없는 존재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2)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주어부나 술어부를 가리지 않고 다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 3) 즉 상상적 가능성 세계에 일상적 사물과 상상적 사물이 뒤섞여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비현실적 세계나 상상적 세계를 표현한 것은 모두 하이퍼 시다. 하이퍼시의 구조란 그러한 것이다. “분노의 불을 뿜는 용”의 경우, ‘용’은 상상적 동물이나, “분노의 불을 뿜는”은 일상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수반인의 신화적 동물은 모두 그렇다. 이와 같이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서의 사물과 상상이 뒤섞여 연결된 텍스트의 경우는 하이퍼시다.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 상상적 존재만 등장하여 연결되는 경우는 말할것도 없이 하이퍼시지만, 그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일상의 사물이 각각 그 자체만을 고립해서 보지 말고 ‘연결 할 때만 상상적 가능성’을 이루는 텍스트도 하이퍼시로 간주된다. 이를테면 “둥근 삼각형”, “포효하는 오각형”, “사과껍질처럼 한꺼풀 벗겨지는 지구” 등이다. 문법적으로도 완전한 하이퍼시다.
여기서 이른바 “재버워키(Jabberwocky) 문”이 연상된다. “재버워키”란 루이스 캐롤의(1832~98) 『거울 속의 나라』(Through the Looking Glass, 1872)에 나오는 시의 한 제명(題名)이라고 한다. 이 시는 재버워크라는 이름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시작과 끝에 재버워키 문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일례다.(사카이 쿠니요시(酒井邦嘉)의 『언어의 뇌과학』(中公新書, 1947)에서 재인용)
Twas(=It was) brilling, and the slithy toves
Did gyre and gimble in the wabe:
All mimsy were the borogoves,
And the mome raths outgrabe.
시전에도 없는 비단어(非單語)가 사용된 문장인데, (이야기 중에 해석이 실려 있다.) 이 문장 중의 and, the, in, Did 같은 의미가 없는 접속사, 전치사, 조동사, 관사 등이나 All, were 같은 말은 그대로 사용해서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처럼 보여주고 있다. 앞에 든 “둥근 삼각형”이나 “포효하는 오각형” 등은 문법적으로는 맞는(?) 일종의 ‘재버워키 문’이지만 그러나 하이퍼시의 한 대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재버워키의 텍스트가 전부 하이퍼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문법도 안 맞고 맞춤법 통일안에도 없는 요즘의 인터넷상의 전자언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① 무색(無色)의 숲의 관념이 맹렬하게 잠잔다.(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② 잠잔다 맹렬하게 관념 숲의 무색(無色)의(Furiously sleep ideas green colorless)
이 두 예문은 촘스키(1928~ )의 『문법의 구조』의 첫머리에 나온다고 한다. ①문은 문법에도 맞고 시로서는 상상적 가능성의 시다. 하이퍼시다. ②문은 문법도 안 맞는 이상한 센텐스시다. 여기서 재버워키 문이 다 하이퍼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②문은 그러한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재버워키 문과 더불어 하이퍼시의 이론에 문법 문제가 개입하면 또 다른 논의가 야기될 수 있다.
❀ 회원의 시 감상 ❀ -------------------------------------------------
갯강구 / 김종상
해수욕장에서였어요
텐트 안에 들어온
아기 갯강구를
엉겁결에 밟았어요
수영을 하러 나가니
갯강구네 마을에
<아기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요
엄마 갯강구가 나에게
전단지를 주었어요
우리 아기를 잃었어요
보았으면 알려주세요.
그 시대 / 정민호
그 시대에는
그 시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람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 기념수/ 최금녀
이집트 사막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피와 살을 짜내어
말씀을 옮겨 써놓으며 걸어간 길이 있다
오늘도 그 길에
땡볕은 사정없이 내려쬐고
한 방울의 물을 아끼려고
잎을 조막손처럼 오그려 붙인
올리브나무들이
붉디붉은 꽃을 피워내며
신사도행전 쓰고 있다.
커플 반지 / 정세나
푸른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리는
황홀한 언약의 굴레다
굴레에 얽히면서도 질식하지 않고
젖은 입술과 타는 숨결로
연두빛 봄나절에 뿌리 내리는
두 영혼의 푸른 나무의 뿌리다
손가락에 꼭 끼어 있는 실가락지는
모나지 않는 구속이며
영원한 사랑의 이정표다
이 세상에 살면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목숨으로 얽허 이어놓은
말 없는 말의
언약의 징표.
천관산 찾아 오른다 / 이복래
늦더위가 기승부리는 날
천관산을 오른다.
장엄한 산세, 안개 속으로 숨어
시야를 가렸다, 열었다
숨바꼭질 한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답답한 시야가 장난처럼 열리며
순간, 커다란 바위벽 기둥들이
하늘을 찌르며, 우뚝우뚝 솟아난다
나는 새도 감히 오르지 못한다는
늠연(凜然)한 대세봉
잠시 눈앞에 나타났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산을 등지고 돌아서니
파란 하늘 뭉게구름으로 얼룩지고
울부짖는 매미
여름의 끝자락에 매달려
가을을 부르고 있다
목을 풀은 가을해 / 구상회
귀똘이가 목청을 돋우더니
목을 풀은 가을 햇살이
코스모스 함성처럼 다투어
실목을 돋우아 세우고
가을해 그림자
여린 입술 새로 머물다
길손들만 스쳐 지나가고
실목을 풀고 선 코스모스
무더기로 함성을 질러도 거기
그 목청 가녀림이
무더기로 씰리는 하늘 가
구름은 멀리만 흘러가고
길목마다 가을, 햇살이
목을 풀고 있다.
자궁 / 황주영
자궁은 살 속 깊이 있지만
할아버지 자궁은 몸밖에 있어
꽃들 다 진 가을날도
애들 어른 불러놓고
펑펑 꽃잎 낳는
할아버지 뻥튀기 자궁
봄 여름 가을 겨울 빛깔 한 줌씩 우겨넣어
사시사철 산기로 배부른 뻥튀기
새까만 무쇠자궁
돌리고 돌리고
열배 백배로 출산하느라 바쁘다
문자메세지(2) / 김대현
나 보고 시원한 바람이 되어 보라며
시간도 지친 한낮에
짧은 문자 보내와
내 영혼 시든 언덕에 단비를 내려주던...
그래요 이 삼복에 바람이 된다면
그대 옷깃을 파고들어 장미꽃을 피워놓고
잊고 산 사랑의 우물에
두레박 긴 줄을 내리렵니다.
짝사랑 / 이귀온
-허수아비
肉脫했다
최초리로 감겨드는 쓸쓸한 가을바람
허수아비로 사는 목숨
두 다리는 사치다
이승에 발 부칠
한쪽다리로도 족하다
눈비 맞을
희노애락 지운 얼굴
정수리 빠져나간 밀짚모자 눌러쓰고
세상의 뒤안길 쓸고 살아도
온 세상 품어 안을 두 팔 있어
넉넉하다
더러운 알몸
감싸줄 누더기 한 조각
이빨 부딪히는 외로움 막아주고
바람과 구름 눈 맞추면
황금빛 벌판 가슴에 들어와
보이는 세계 모두 금빛으로 출렁인다
너무나 고운 님 / 정득복
한창 피어오르는 꽃망울을 보세요
아리따운 눈썹이며 불타는 입술이며
보드랍고 노란 꽃술을 보세요
두꺼운 꽃잎도 붉게 물들고
청초한 잎새도 푸르게 뻗어
꽃망울이 터지는 찰나를 보세요
고운 님 고운 꽃은 만지지 마세요
먼 데서 바라만 봐도 님은 항시 웃음으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이고 있어요
고운 님 고운 꽃 당신께서는
날이면 날마다 나만 쳐다보세요
꿈같은 이야기만 속삭이시고
허물은 한마디도 하지 마세요
고운 님 고운 꽃 우리 다 함께
어제도 오늘도 정다운 노래로
붉은 꽃 당신의 이름 부르며
이 언덕 저 언덕 오르내려요
벤치와 나 / 김진돈
나무 그늘 벤치에 누운 나는 사람들의 노래를 읽는다 얼룩과 몸부림 그리고 바람으로 피어난 시간의 잎을 읽는다 나는 밤의 울타리에 갇힌 게 아니다 남들이 흘리고 간 꿈을 먹고 사는 나의 여름밤은 깊고 눈부시다 녹아내린다, 아니 마천루 꼭대기에서 벤치가 날고 있다 내가 어깨를 기대자 돌담이 숨 고르기를 시작한다. 한낮의 순간, 나무는 시간을 버틴다, 갈라지고 있다 한 여름이 벤치 앞을 떠나가자 바람은 사지를 내뻗는다 벤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서신을 받고 또 쓴다 벤치는 시가 되고 아픈 꿈을 키우는 온상이 된다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벤치는 종교이기도 하고 환자이기도 해서 심장판막증처럼 그대를 기다린다 웅크리고 있는 나이테 속에 시간들이 행렬을 짓는 벤치 속에 한 웅큼의 사연들을 쏟아놓고 사랑을 새기는 벤치는 늘 나의 절친이다
약수터 단상 / 이견숙
억새도 오리나무도
흔들림이 멈춘
늦가을 오후
인적 끊긴 약수터에서
물이 채워지길 기다린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생각하며
옷 벗는 나무를 보고있는데
적막이 출렁이는 소리
갈까마귀 두어 마리
자웅을 겨루며 날아간다
사철 쫄쫄 흘러넘치는 산밑의 약수
심금을 울리는 '고엽' 송 같기도 하고
돌팍을 구르며 속삭이는
생명의 실핏줄 소리
같기도 하고
따지지 말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허락된 나의 날이 얼마 남았는지
모두 흘러가는 물이다
양질의 미네랄 워터다
가을 변주곡 / 조영희
바람에 잡히면서 바람을 다스리는 이는
역시 바람이었구나
저무는 갈대꽃 외롭게 보여도
바람 부는 세상,
바람 앞에 숨죽이며
무릎 훌훌 털어내는 모진 어깨들
진흙탕에 함초를 키우는 여유가
어디 우리들 살가운 몸짓 아니리
을숙도 전망대 높은 곳에서 보니
그대의 하얗게 부러진 팔다리 상흔도
춤추는 재두루미 날개로 보이고
굽 낮은 고무신 신고 안개 속
승천하는 어머니의 빈손은
갈대꽃 스치며 비를 맞고 있네
중천의 낮달도 내 천식처럼, 아프게
숨 고르고 있네
폐쇄회로 / 김인숙
나는 TV를 켜고 채널을 돌린다
하루를 여는 CCTV,
멈춰진 많은 시간을 창밖에 두고 잘 수 없다
한 번도 허기진 적 없다
항상 허공에 의지한 육중한 체중, 그리고 고통,
도망치는 발소리 쫓아 눈을 회전시킨다
그림자가 줄어든 겨울
내 관절에 시간을 쏟아내는 밤
구겨진 계단을 재단하던 가로등이
내 옆구리에 눈을 밀어 넣고 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인기척을 듣는다
왕성한 이빨만 드러낸 호기심 섞인 차가운 속내
그들은 내 시야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어떤 이는 안테나로 달빛을 끌어당기고
누군가는 고양이 꼬리를 넘나들며 주정을 부린다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리 없는 폭설은 아우성쳤다
그들은 내 눈 밖에서
그들의 눈 속에서
비밀이 살해된 세상
나로 돌아가고 있다
(현대시학 2012신인상 수상작)
5시 28분 /이소정
이때 쯤 되면 동이 튼다
하늘의 허벅다리에 어느 한 구석이
터지고야 말아
빛 몇 가락이 새어나오고
부피 늘어난
하늘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괴기스럽던 밤의 홀쭉한 복부가
끊임없이 부풀다
마침 어미별 잃은 아침새가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이면
터진 배꼽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
(고교생 회원)
첫댓글 오늘 공부 빡시게 하겠네여~~ ^*^
불참해서 미안합니다. 대신 정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