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내음, 사람 향기 솔솔 풍기는 옛날 식당들 / 오태진
어릴 적 밥상에 '정어리 조림'이 자주 올랐다. 자박자박 매콤한 국물이 조림이라기 보다 찌개에 가까웠다.
어른 가운뎃손가락만 한 정어리가 잔뼈째 고소하게 씹혔다.
쌈을 하면 비릿한 정어리와 상큼한 상추가 오묘하게 어울렸다. 타지로 진학하면서 그 남도 갯가 음식은
잊혔다. 이따금 받는 고향 밥상에서도 사라졌다.
철들자 정어리 조림이 문득문득 생각났다. 혀는 매콤 짭짤 비릿한 그 맛을 생생히 기억했다.
혹시나 얻어먹을 곳이 있을까 기웃거렸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정어리가 20㎝ 넘는 청어과라는 걸 알게 됐다.
어려서 먹던 정어리는 10㎝나 됐을까. 정어리는 1930년대까지 흔하디흔했다가 광복 즈음부터 거의 잡히지
않았다 한다. 그렇다면 그 정어리 조림은 무엇이었을까.
7년 전 이른 봄 경남 남해 섬을 돌다 삼동면 지족리에 갔다.
원시 어업 죽방렴으로 유명한 지족해협 남쪽 마을이다. 면 소재지인데도 먼지 뒤집어쓴 가게들이 문을 닫은
채 유령 도시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길에 우리식당이 있었다.
1975년부터 '멸치쌈밥'을 차린다기에 긴가민가하며 찾아간 집이다.
넓은 대접에 시래기와 고구마 줄기 깔고 멸치가 수북이 담겨 나왔다. 상추도 한 바구니 곁들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혀보다 코가 먼저 알아차렸다. 어머니의 부엌에서 방으로 새 들어와 아침잠을 깨우던
냄새. 40년 전 그 조림이었다. 통통한 멸치를 쌉싸름한 상추에 싸 먹으니 고향 집에 온 듯 마음까지 편안했다.
어려서 먹던 건 정어리가 아니라 멸치 중에 가장 굵은 '대멸'이었다.
대멸을 바다 건너 고향에선 정어리라고 불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집에 갖고 가 조려 먹으려고 주인 아주머니께 "생멸치 좀 팔 수 없겠느냐"고 여쭸다.
아주머니는 선선하게 스티로폼 상자 가득 헐값에 멸치를 채워줬다.
내친김에 묵은 김치도 얻자 했더니 볼락김치를 꺼내 왔다. 들짐 싣고 떠나려는 참에 아주머니가 달려 나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먹고 싶어서 방금 쪘는데 찻길에 먹으라"고 했다.
해쑥으로 빚은 따끈한 쑥떡 네댓 쪽이었다. 봄 내음, 사람 향기가 솔솔 풍겼다.
지난 주말 꽃샘추위에 붙들린 서울을 떠나 봄 맞으러 남해로 내달렸다. 섬 길가엔 또릿또릿 야무진 동백꽃이 타는
듯 붉게 피었다. 피는 아름다움이 겨워 벌써 지는 아름다움을 흩뿌려놓았다.
초록 마늘밭에도 봄이 내려앉았다. 해안길을 가며 히터 끄고 차창을 내렸다.
우리식당 앞에는 점심 자리 나길 기다리는 줄이 스무 명쯤 늘어섰다.
이웃해 못 보던 멸치쌈밥 집이 두어 곳 생겼다. 우리식당에 넘쳐나는 손님을 받으려는 음식점인 듯싶다.
7년 전 썰렁하던 마을엔 카페, 병원, 약국이 들어섰다. 면사무소 주차장이 외지 승용차로 꽉 찼다.
우리식당이 이름나면서 찾아든 변화다. 이제 삼동면뿐 아니라 남해 어딜 가나 멸치쌈밥 집 없는 곳이 없다.
일흔을 바라보는 이순심씨는 여전히 부엌에서 허리를 펴지 못했다. 생멸치를 일일이 손으로 다듬었다.
찬거리도 모두 남해산을 쓴다. 간장·된장·젓갈·식초도 손수 담근다.
"예까지 찾아주는 손님들이 고맙지예. 정신없이 붐벼서 전처럼 식탁을 돌며 챙겨드리지 못해 마음에 걸립니더."
그래서 5년 전부터 여름마다 손님들에게 햇마늘 열 통씩을 봉지에 담아 선물했다.
굵고 단단해 쉬 무르지 않고 톡 쏘는 남해 마늘이다. 선물용으로 사들이는 마늘만 한 철에 2000봉지, 200접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전남 구례읍에 들렀다. 작년 봄 맛봤던 동아식당 가오리찜에 막걸리가 생각나서다.
70년 넘어 허름한 주막과 꾸밈없이 살가운 인심도 그리웠다.
그런데 읍내 큰길가 동아식당이 흔적도 없이 헐렸다. 집터가 작년 11월 팔렸기 때문이다.
동아식당은 길 건너 골목 안으로 옮겨가 있었다.
새 가게는 환하게 넓고 손님도 많았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잿빛 슬레이트 지붕이 주저앉을 듯 낮은 집,
어둑한 실내에 아련하게 스며 있던 정취가 사라져버렸다.
딱 하나, 슬레이트에 검정 페인트로 쓴 빛바랜 옛 간판은 걸려 있다. 예순일곱 여주인 김길엽씨는 이사하는
날 단골들이 몰려와 이삿짐 날라주고 옛 간판도 떼 와 달았다고 했다.
낡은 간판이 부스러지다시피 해서 솜씨 좋은 단골이 조각조각 맞춰 붙였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 구례와 하동엔 진정한 행복을 찾아온 귀농·귀촌인이 많다. 이들이 '지리산학교'라는 이름으로
모인 예술·문학·음악 동아리만 세 곳이다. 그 지리산 귀농인들이 즐겨 찾는 집이 동아식당이다.
뒤뜰에서 여름엔 감자 삶고 겨울엔 팥죽 끓여 음악회를 열었다. 15년째 지리산에 사는 이원규 시인은
"막걸리에 안주에 푸지게 먹어도 2만~3만원이 고작이어서 놀란다"고 했다.
동아식당을 사 랑하는 사람들은 옛 가게를 잃는 아쉬움을 새 가게 개업을 거들며 달랬다.
주인은 단골 복이 많은 셈이지만 따져보면 다 덕(德)을 쌓아 온 덕분이다.
"인심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식당과 동아식당이 그런 집이다.
'옛 추억과 맛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동아식당 새 간판 글귀처럼 두 음식점이 변함없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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