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3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설교 - 황의찬 목사
돌다리도 두드리는 ‘바락’
삿4:11~16
<속담 패러디>
우리말에는 속담이 있습니다. 짧은 말 속에 세상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 속담들이 요즘 세태에 맞게 변화되고 있어요.
‘작은 고추가 맵다.’ 요즘에는요, ‘수입고추가 더 맵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 속담도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핸드폰만 있으면 산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 이 속담은요 ‘아는 길도 네비게이션 찍고 가라!’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 ‘돌다리도 두드리는 바락’
바락은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다가 만난 위기, 환란입니다.
사사기는 이런 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내 구원해 주신다!’ 이런 책입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세요.
믿는 자, 하나님의 백성,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사기 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네 번째 위기를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나타난 사사들, 옷니엘, 에훗, 삼갈. 이 세 명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드보라의 등장입니다.
드보라, 여자입니다. 평범한 여성입니다. 4절에서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
드보라가 옷니엘, 에훗, 삼갈처럼, 전쟁터에 직접 나갔느냐? ···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이 전쟁터에서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드보라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백성에게 전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왕 야빈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20년 동안이나 압제 속에서 노예로 삽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드보라에게 임했습니다.
이 음성 듣고, 드보라는 ‘바락’이라는 사람을 불렀어요.
“당신이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물리치시오!”
“하나님이 ‘시스라와 그 군대’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드보라 & 바락>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락’ 이 이름은 ‘천둥 번개’라는 뜻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가지고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드보라를 만났어요.
드보라가 “당신이 나가서 적군을 물리치시오!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바락’이라면, 드보라 앞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니 이럴 수가!’ ‘여자가 감히 나에게 명령하다니?’
그 당시 여자는 인구조사에 포함되지도 않아요. ‘여자와 노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땝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당신이 나가서 싸워라!”
이 때 바락의 태도, 어땠습니까? ··· “드보라 여사님의 말씀대로 나가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는 못 갑니다. 당신도 동행해 주시오!” 참, 뜻밖입니다. 그렇지요?
(8절)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
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당신이 함께 가면 간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못 간다!”
남자 망신 다 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 별명이 ‘천둥번개’입니다.
그러나 바락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는 중에도 중심을 잡고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더욱이 드보라가 전하는 말씀이 심상치 않아요.
(6~7절)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
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
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에는 열 두 지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납달리, 스불론 두 지파에서 군대를 선발해라!
인원 수는 만 명이다. 너를 대적하여 나올 적장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이다.
진을 칠 장소는 다볼 산이다. 상대방은 기손 강에 진을 칠 것이다.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그렇지요?
이 말 속에 군대의 편성, 진지 구축, 전략, 적군의 동향, 승패의 향방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두루뭉실하신 분이 아니에요.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믿는 사람이 누려야 할 평강, 누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고, 사소한 것까지도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구체적으로 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 아직도 턱없이 부족해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사랑이 부족하니, 기도가 부족해요.
기도가 부족하니,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듣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내 안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험이 부족해요, 간증이 부족해요, 입술로 전하지 못합니다.
“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적은 믿음, 용서하여 주옵소서!”
3,500년 전에도 그랬어요. 이스라엘 대다수 백성들, 하나님 음성에 귀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드보라, 바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저는 우리 온고을 교회가 이러한 성도들의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바락과 드보라, 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아멘!” “할렐루야!” 서로 화답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15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시스라의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이것입니다.
‘혼란에 빠지게 하셨다.’ 여기에 쓰인 단어, ‘하맘’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시스라의 군대가 ‘하맘’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실 때 쓰는 단어입니다.
출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여기서 “어지럽게 하시며” 이 말이 ‘하맘’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은 홍해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밤새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바닥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그 뒤를 애굽 군대가 뒤쫓아 갑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홍해 바닥, 마른 땅에 물을 섞었습니다. 질퍽거리는 진창이 되었습니다.
마차 바퀴가 푹푹 빠집니다. 일시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뒤이어 바닷물이 합쳐졌습니다.
그 속에 다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이끄는 만 명의 군사 앞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셨습니다.
이 전쟁 무렵은 이스라엘 땅에 우기가 막 끝난 때였습니다. 이제 건기가 시작됩니다.
건기에는 강바닥이 바싹 말라 있습니다.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 강바닥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기를 연장하십니다. 장마가 끝난 줄 알았지만, 아직 안 끝났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철 병거 900대가 쇳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폭우를 피해 도망치는 시스라의 군대,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풀잎 베듯이 쓸어버립니다.
(16절)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
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우리가 성경의 이런 대목을 읽으면 의심이 고개를 듭니다.
옛날이니까 그렇지, 성경이니까 그렇지.
과연 그렇습니까? 오늘날은 이런 일이 “없어요?” “안 일어납니까?” ··· 아니지요. 일어납니다.
누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 믿는 자에게 “일어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도우시면, 능히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다.” 믿습니까?
1967년에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6일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지만 아랍의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6일 만에 끝내겠다.”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쟁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 전쟁 끝나고 아랍은 고양이 앞에 쥐가 되었어요. 45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꼼짝 못해요!
<영광에 앞서 쓰임 받기를 구하자!>
(9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
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바락이 드보라에게 전쟁터에 ‘동행해 주세요!’ 그때, 드보라가 한 말입니다.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영광, 전쟁에서 이기면 영광이지요. 어떻게 해야 이겨요? 상대방의 우두머리를 잡으면 이깁니다.
시스라의 목을 베면 이겨요,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런데, ‘바락에게 그 영광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뜻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이 대목에서 어떤 신학자들은 ‘바락의 망설임이 영광을 놓친 것이다.’
드보라의 말을 전해 듣고, 남자답게, 혼자 전쟁에 나갔으면, 바락이 시스라를 잡았을 것이다.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동행을 요구했다고 해서 ‘바락의 믿음이 적다.’ 그건 아닙니다.
바락은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사람입니다.
요즘, 속담을 패러디하는 사람들이 ‘돌다리를 두드리면 내 손만 아프다.’ 우스개로 말합니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의 말입니다.
신중해서 나쁠 것이 없어요. 저는 바락에게 존경심이 생깁니다. ‘전쟁터까지 동행해주십시오!’
드보라는 여자 선지자입니다. 전쟁터에 여자가 나서는 일은 금기입니다.
아직도 외항선에는 여자를 태우지 않아요. 항공기 조종사로 여성을 기용하는 나라가 드물어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입니다.
바락은 드보라에게 전쟁터에 동행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바락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삼상12:11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베단” 바락을 사무엘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바락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
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요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영광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지나쳐요.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광,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아야지요. “하나님의 쓰임을 받읍시다!”
먼저 쓰임을 받을 것을 구해야지, 받을 영광만 생각하는 것은, 순서가 틀립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면 섬기리다.’ 입술로만 찬송하고, 영광만 꿈꾸는 교회가 많아요.
바락, 드보라를 여성이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동역자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거룩한 선지자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전쟁터까지 같이 나갑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