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김기림(金起林)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公主)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1. 시어, 시구 풀이
바다 : (상징)현실의 어려움과 냉혹함 나비 : (상징)낭만적인 동경과 꿈 청무우밭 : 파란 잎으로 덮인 무밭, 색채어를 통한 시각적 이미지 형성 저러서 : 절어서, 소금기가 속속들이 배어 들어 서거픈 : ‘서글픈’의 방언, 가엾고 초라한 아모도 그에게 -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아닌 문명에 대한 환상이 가지는 위험성을 표현. 하얗고 연약한 나비와 시퍼렇고 거대한 바다가 선명한 시각적 심상의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나비’는 낭만적 꿈을 가진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도라온다. : 청무밭이 가진 생명성에 대비되는 바다의 무생명성을 부각시킨 표현. 삭막한 근대 문명의 불모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나비의 시련을 암시한다.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나비의 행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볼 수 있고, 지쳐서 돌아오는 나비의 행위는 거대한 문명의 힘 앞에 무력해지는 당시 지식인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3월달에 꽃이 피지 않았다는 것은 문명의 불모성 및 무생명성을 표현하며, 나비의 허리에 초생달이 걸렸다는 것은 초생달에 의해 나비의 허리가 잘렸다는 표현으로서는 냉혹한 현실과 좌절된 나비의 꿈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다로 표현된 현실을 ‘새파란 초생달’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또 이런 현실에 부딪치고 있는 나약한 ‘나비 허리’도 시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2. 핵심 정리
지은이 : 김기림(金起林, 1908-?) 시인. 평론가. 호는 편석촌(片石村). 6,25 때 납북. 주지성(主知性)과 심상을 강조했으며 자연 발생적인 시에서 ‘제작하는 시’로의 전환을 꾀하는 모더니즘 문학을 추구하였다. 평론 서적도 많이 내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지시 율격 : 내재율 어조 : 객관적이고 간결하며 단호한 목소리 심상 : 시각적 심상(흰나비, 푸른 바다, 새파란 초생달) 성격 : 감각적, 상징적, 묘사적 구성 : 1연 바다의 무서움을 모르는 나비 2연 돌아오는 나비 3연 흰나비와 파란 초생달 제재 : 나비. 바다. 초생달 주제 :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감. 순진하고 낭만적인 꿈의 좌절과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인식
3. 작품 해설
개화기 이전에 우리는 대부분 문명을 대륙을 통해 받아들였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의 문명 유입은 바다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최남선이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다는 새로운 힘과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시 역시 그러한 상징이 유효하다. ‘바다’는 여기서 ‘문명’ 혹은 ‘근대’를 상징한다. 이런 측면에서 ‘3월에도 꽃이 피지 않는 바다’는 문명의 무생명성(無生命性) 혹은 불모성(不毛性)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시는 모더니즘적이다. 이 시에는 선명한 이미지의 대비가 보인다. 바다와 초생달이 만들어 내는 청색의 이미지와 나비의 백색 이미지는 서로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회화적이다. 흔히 김기림은 1930년대 우리 모더니즘 이론의 기수로 불린다. 그의 이론적 바탕은 이 시에서 유감 없이 발휘된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회화적 특성과 문명 비판적 성격은 이 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몰락은 예견하며 그것의 초극(超克)을 꿈꾸었던 김기림도 현실적 상황의 열악함 앞에서는 너무도 무기력한 한 마리의 지친 나비에 불과했다. 근대라는 엄청난 물결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30년대 후반 한국 모더니스트의 자화상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 시에는 봄 바다의 청(靑)색과 나비의 흰색, 그리고 초생달의 새파란 색채가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그러나 바다와 나비와 초생달의 시각적 심상만이 강조될 뿐 정작 그들 사이의 관계를 맺어 줄 특별한 사상은 발견하기 어렵다. 이것은 지은이가 그만큼 대상을 객관적 심상으로 제시하기만 할 뿐 주관적 판단이나 해석은 덧붙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냉정한 태도는 각 연을 ‘~다’로 끝맺는 간결하고 단호한 어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특별한 사상을 내세우지 않고 단지 선명한 심상의 제시와 냉정한 어조만으로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적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은 비단 이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계열 시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모두 3연 7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로, 이 작품에서 ‘바다’는 섬뜩하고 거칠며 냉혹한 현실로서, 생명이 없는 공간 또는 죽음의 공간으로 이해되며, ‘나비’는 순진무구(純眞無垢)하거나 철없는 존재, 또는 식민지 현실이나 거대한 신문명 속에서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우쭐거리는 지식인 정도로 이해된다. 1연에서는 바다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한 마리 흰나비를 통해 연약하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존재의 무모함을 제시한다. 무서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다로 날아갈 수 있고, 따라서 나비에게는 푸른 바다가 거칠 것이 없다. 2연에 이르러 이러한 생각은 더욱 짙어진다. 푸른 바다가 오히려 청무 밭으로 보여 바다의 깊이도 모른 채 불쑥 내려가 보는 모험 아닌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다 퍼뜩 놀란다. 물결에 온몸이 젖는 것이다. 물결에 절어 지쳐 돌아오면서도 냉혹한 바다의 깊이는 알지 못한 채 그저 단순하고 연약하며 철없는 공주의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여전히 바다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나비에게 바다는 아직도 청무 밭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3연에서처럼 삼월달에 청무 꽃이 피지 않는 것이 나비에게는 서글플 수밖에 없고,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나비 허리에 걸린 초승달이 시리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시는 무엇보다도 세상살이의 험난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청무밭․초승달 등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시린 푸른빛과 흰나비로 대표되는 연약하고 순수한 흰빛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압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흰나비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당대의 무모한 지식인들을 뜻할 수도 있으며, 둘을 아우를 수도 있다. 바다 역시 냉혹한 현실 또는 죽음으로 볼 수도 있는데, 어떤 이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현해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