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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3막 13장 - 건국이래 한국쌀 미국에 첫 수출 쾌거
Myungdong Global 추천 0 조회 37 11.08.03 1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건국 이래 한국쌀 미국 첫 수출

교민들 “고국 쌀밥을 먹을 줄이야”

미국산 보다 2배 비싸도 날개 돋친 듯 팔려

 

 

 

건국 이래 최초로 “한국 쌀, 미국에 수출”

 

6월 13일, 9시에 상반기 청렴혁신 교육과 함께 박석무 다산연구소장의 초청특강이 있었다. 특강에 앞서 청렴혁신 업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창출했던 우수부서와 사원들에게 문화상품권으로 격려하면서 더욱 분발을 촉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은 한국 농업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날이다. 건국 이래 ‘최초의 한국 쌀 수출’기념식이 오후 2시에 전북도청 광장에서 열렸다. 나는 청렴혁신 교육을 마치자마자 점심도 거른 채 전주로 달렸다. 미국에 최초로 수출한 한국 쌀은 전북 옥구의 ‘철새도래지쌀’이었다. 군산 ‘제희RPC’가 생산했고 수입바이어는 재미동포가 경영하는 ‘해태글로벌’이었다. ‘해태글로벌’은 1차로 1,050톤(미화 273만 달러)의 쌀을 항공화물로 LA에 공수했고 시식회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기념식엔 농림부 차관보, 전북지사, 군산시장, 대한주부클럽 회장을 비롯한 소비자단체, 농민단체와 전북도민들이 참석했다. 나는 한국 쌀 수출을 이끌어냈던 우리공사의 대표로 사장을 대신해 참석했다. 쌀 수출을 성사시켰던 우리공사 홍주식 전북지사장이 전북도지사의 공로패도 받았다. 평소 ‘우리 쌀 소비운동’에 앞장섰던 대한주부클럽 김천주 회장은 ‘유통공사가 모처럼 할 일을 했다’고 나를 치켜세워 큰 박수도 받았다. 쌀 수출과정에서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전북의 ‘철새도래지쌀’은 2007년 6월 5일 농림부로부터 쌀 수출 승인 1호를 획득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경기도는 1주일 후에 농림부로부터 경기미 수출 승인 2호를 받아내고 발 빠른 행보에 나섰다. 쌀 수출 1호라는 역사적 성과를 차지하고 싶었던 경기도는 전라북도보다 하루 먼저 부산항에서 쌀을 선적하는 기동성을 보였다. 급보를 접한 전라북도는 아예 항공화물로 공수작전을 폈고 미국 LA에 전북 쌀이 먼저 도착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철새도래지쌀’은 LA에 도착하자마자 교민초청 시식회를 통해 홍보활동에 들어갔고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교민들은 ‘고국 쌀밥을 먹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꿈같은 일이다’고 입을 모았다. 판매가격도 34.99달러(10kg)로 미국산 칼로스 18.75달러보다 2배가 비쌌지만 날개 돋치듯 팔려나갔다. 교민들은 ‘밥맛이 달고 향이 좋아 고국의 향수를 느낄 수 있어 너무 좋다. 가격은 비싸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며 즐거워했다.

 

처음엔 LA시내의 20여개 매장과 샌프란시스코ㆍ댈러스ㆍ시애틀 등 서부지역의 주요 도시에서 팔려나갔는데 동부지역의 본거지인 뉴욕 교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뉴욕의 발주가 쇄도해 긴급히 수송하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결국 뉴욕ㆍ워싱턴 등 동부지역의 주요도시에서도 한국 쌀은 교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한국 쌀의 질을 높이고 신선도를 높이기 위해 선적 직전 도정과 냉장컨테이너에 운송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고국쌀밥을 맛보던 교민들은 더 욕심을 냈다. 기왕이면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쌀밥을 먹고 싶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방자치단체의 쌀 수출경쟁은 불이 붙었다. 결국 6∼7월 사이에 전북 ‘철새도래지쌀’, 경기 ‘슈퍼오닝쌀’, 경남 ‘산청메뚜기쌀’과 ‘하동포구쌀’, 경북 ‘의성황토쌀’, 전남 ‘섬드리쌀’, 강원 ‘철원오대쌀’, 충남 ‘미감쾌청’의 브랜드가 미국 전역에 수출됐다.

 

글로벌시대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서 고국 쌀이 판매된다는 소식을 접한 모스크바의 교민들도 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러시아를 비롯한 스위스ㆍ뉴질랜드ㆍ말레이시아ㆍ자유중국ㆍ홍콩에 쌀을 수출했다. 심지어 미질이 좋기로 유명한 일본에도 현미와 보리혼합곡을 수출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 쌀이 미국 본토에 상륙하게 된 이면에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미국사람들이 우리 쌀이 좋아서 수입한 것도 아니고 교민들이 한국 쌀을 보내달라고 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미국 본토에 쌀을 팔아야 한다는 강한 집념과 의지가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 낳은 쌀 수출 성공

 

나는 2005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를 방문해 카길, ADM 등 세계 5대 곡물메이저의 쌀 가공시설을 살펴봤다. 도정과정과 현미착색선별기, 포장방법 등 모든 공정은 자동화되어 있다. 나는 포장재까지 일일이 수집하여 서울로 가져와 담당부서에 제공했다. 2006년부터 최소시장접근물량(MMA) 쌀을 수입할 수밖에 없고 미국산 칼로스 수입은 한국 농업의 붕괴를 가속화시킬 수 있어 현실을 앉아서만 지켜볼 수 없었다.

 

새크라멘토 여행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동지는 홍주식 LA지사장(현재 전북지사장)이다. LA를 출발하여 5번 국도를 타고 2박3일간 다녀온 거리가 무려 2,100㎞로 부산과 신의주를 왕복하는 거리를 강행군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자동차를 타면서 서로 덕담으로 지루함을 달랬다.

 

새벽 5시, 새크라멘토를 출발 LA를 향했다. 아침도 거른 채 계속 달리다가 산타바바라를 지날 무렵 점심때가 되었다. 배가 무척 고팠다. ‘점심이나 먹고 가자’는 나의 말에 홍 지사장은 조금만 참자고 했다. 곧 한국인이 경영하는 란농장이 나오니 거기서 얻어먹자고 했다. 하긴 고속도로엔 휴게소도 없었다.

 

약 1시간쯤 더 달리니 고속도로변에 위치한 로스알모스라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이곳은 충남 출신 이흥복 씨 형제가 투자한 란(蘭)농장이 있었다. 2004년 2월에 시작한 이 농장은 약 6만평의 대지에 1차로 조성한 온실면적만 2만평이었다. 농장에는 심비디움 150만분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종업원들은 모두 멕시칸이었다. 란시장 전망과 판매전략을 이야기하던 홍 지사장은 ‘밥 좀 얻어먹읍시다. 배고파 죽겠네요’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도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이흥복 사장은 농장 입구에 있는 컨테이너하우스로 우리를 안내했다. 임시거처인 컨테이너에서 두 형제가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된장 상추쌈은 정말 꿀맛이었다. 나는 쌈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 밥이 한국 쌀밥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생각했다. 솔직히 한국의 란도 미국에서 재배해 팔아먹고 있는데 왜 한국 쌀 수출은 불가능할까? 스스로 반문했다. 그 순간 ‘바로 이거야’하고 머리를 탁치는 순간 수십 만개의 별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국 쌀밥으로 정성껏 상을 차려 조상님께 올리는 거야"

 

농장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홍 지사장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한국 쌀을 미국에 수출할 수 있을까’하고 물었다. 그는 씩 웃더니 ‘가격경쟁력이 없는데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옳은 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농장에서 점심을 먹다가 떠올랐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홍 지사장, 우리 이거 한번 조사해보면 어떨까?”

“뭘 말입니까?”

“LA에 가서 교민들에게 모니터를 해보는 거야. 예를 들면 설과 추석날 차례 상을 차리는지, 또 부모님 제사를 모시는지 말이야.”

“그야 교민들도 사람인데 제사 다 지냅니다. 그런데 그건 알아서 뭘 하려고요.”

“교민들이 지금까지 미국 쌀밥을 올렸다면, 이제부턴 한국 쌀밥으로 정성껏 상을 차려 조상님께 올리는 거야.”

“하하하, 재미있네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한국 쌀이 있다면 당연히 한국 쌀로 밥을 하겠지요.”

“홍 지사장, 바로 그거야 그거! 교민들에게 고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시키는 거야.”

 

 

순간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가족 생일날을 ‘한국 쌀밥 먹는 날’로 캠페인을 하자는 생각, 한국 쌀밥만을 제공하는 한국식당을 특성화 하자는 생각, 한국 쌀밥을 먹으면 고국에 대한 향수도 더 강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홍 지사장은 2006년 2월 본사에 원대 복귀해 전북지사장으로 부임했다. 나는 그가 전북지사장에 부임된 것이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그는 귀국 전에 이미 LA 교민시장을 조사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교민출신 바이어 ‘해태글로벌’ 워랜 정 사장과 상담까지 마쳤다. 2006년 8월, ‘해태글로벌’은 한국 쌀 수입에 필요한 무역실무 작업을 시작했고 11월 첫 선적계획까지 구체적인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6년 10월부터 한미 FTA협상이 서서히 수면위로 올라왔다. 11월 첫 선적을 하려던 우리의 계획이 뒤로 미뤄지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미국에 쌀을 수출한다면 우리나라는 협상에서 결코 유리할 게 없다. 미국이 한국 쌀 수입을 빌미로 농업분야를 더 개방하라고 요구한다면 득보다는 손실이 더 클 것이 뻔했다.

 

2007년 1월, 본격적으로 시작한 한미 FTA협상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찬반양론의 국민정서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4월말 한미 FTA협상은 타결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홍 지사장은 즉시 수출업무에 착수했다. 전북도청 강승구 농림수산국장과 긴밀하게 협의하여 ‘철새도래지쌀’을 수출 브랜드로 선정하고 농림부에 수출승인을 요청했다. LA의 ‘해태글로벌’도 시식회를 비롯한 판촉이벤트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6월 28일 ‘철새도래지쌀’의 미국 본토 첫 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쌀 수출을 추진과정이 긴박한 만큼 가슴 조였지만 끝내 역사적인 성과를 일궈냈다. 전자감사시스템 특허에 이은 쌀 수출은 내 일생에 가장 큰 보람이었다. 그까짓 쌀 수출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쌀 수출은 우리 농업의 무한한 가능성과 실의에 빠져있는 농민에게 희망을 주고 자긍심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지방자치단체가 경쟁하듯 쌀 수출에 나선 것은 결과적으로 쌀의 질과 도정기술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볍씨 파종에서부터 가공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생산매뉴얼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도 경쟁력이 강한 수출용 브랜드를 선정, 집중 육성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국시장을 공략하는 미국산 칼로스 생산지에 우리가 역수출로 공략한 사실은 한국 농업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흔히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실현가능한 결과가 나왔을 때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지나친 부정이나 편견을 버려야 기적은 일어난다. 하찮은 일도 뜨거운 열정과 열린 자세로 생각하면 길이 열린다. 쌀 수출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고,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절실하게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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