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혹은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읽는 시간
---박분필의 시세계
조동범
노마드는 많은 이들이 꿈꾸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목민처럼 떠도는 삶은 쉽지 않다. 초원을 떠돌아다니는 삶은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을 자극하며 가닿고 싶은 이상을 현실화한다. 정주하는 삶은 그것의 안온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결핍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정주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꿈꾸는 노마드의 삶은 간절하다. 하지만 노마드의 삶을 사는 이는 드물다. 노마드는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룰 수 없기에 노마드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간절해진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디아스포라의 모습과 닮아 있다. 뿌리를 잃어버린 삶의 막막함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짜 모습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는 삶의 보편적인 모습처럼 다가온다. 삶의 정처없음은 이제 특정한 민족이나 집단에 제한적으로 나타나기보다 누구나 겪는 일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노마드의 삶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다. 노마드와 디아스포라는 정주하지 않는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그것의 양상은 완전히 다르다. 노마드가 이상적 세계에 대한 자발적 정처 없음이라면 디아스포라는 비극적 세계로 추방된 비자발적 양상이다. 또한 노마드의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는데 비해 디아스포라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경험한 상태이다.
박분필 시인의 신작 5편을 읽으며 든 생각은 시인의 갈망과 지향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였다. 시편마다 내재해 있는, 삶이 지향하는 원형의 세계를 응시하며 시인이 마주하고 싶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이상향 등의 말로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바다, 태양, 들판 등의 공간은 노마드의 감각을 떠올리게 하며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세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마드는 삶의 원형성과 맞닿아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박분필 시인의 시가 자연물을 통해 원형적 세계를 탐문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바람이 바다에 가면 바다의 비늘처럼
촘촘하게 연이어진 파도가 된다
흥분과 설렘이 가득한 바다 경마장이 된다
모든 파도가 앞발을 번쩍 들고 동일한 움직임으로
박자와 리듬 움직임과 속도 그리고 철썩 철썩
등짝을 치는 말발굽소리까지
(중략)
눈 내리는 푸른바다를 푸른 초원처럼
자유롭게 달리는 나는 바람의 노마드다
기수도 고삐도 없는 흰말이고, 푸른 파도다
-「바다 경마장」 부분
시인은 바다와 파도를 통해 초원과 초원의 출렁임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곳을 질주하는 한 마리 말을 떠올린다. 바다를 달리는 말은 파도와 같고 초원을 질주하며 바람이 되기도 한다. 파도와 바람은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시인은 그런 파도와 바람과 같은 삶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자유롭게 달리는 나는 바람의 노마드”라는, 선언과도 같은 말을 한다. 바다와 초원이라는 이상적 세계 속에 “기수도 고삐도 없”이 자유롭기를 희망한다. 박분필 시인의 신작 5편은 이와 같은 구절처럼 노마드를 꿈꾸는 시인의 시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속초 델피노정원에서 설국 속에 파묻혀 있는 소녀를
만났다
오래전 시리우스B의 별에서 방주를 타고 지구로
내려 온 소녀, 쏟아지는 별을 잡으려고 장대 끝에
서서 한껏 팔을 뻗고 있는
(중략)
가장 아름다운 피가 이것을 이루어 주리라
깨트려 주리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맞바람소리
더 길게 손을 뻗은 소녀의 손가락이 날아가는 마지막별에
닿는 순간 쩡! 새벽을 찢는다
소녀의 이마에 흑요석이라도 박혔을까
유카탄 사람들이 마법이 있다고 믿는 그 흑요석을 빛나는
태양을 향해 들어 올리면 흑요석에 빛이 비친다는, 죽은
사람과 만날 수 있는 문이 열린다는
-「별을 잡는 소녀」 부분
시인은 잃어버린 세계를 복원하는 자이다. 사라진 세계를 꿈꾸고 그것을 우리 앞에 소환하고자 노력한다. 그 가운데 신화의 세계가 있다. 잃어버린 세계로서 신화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지만 우리가 가닿고 싶은 원형의 세계이다. “설국 속에 파묻혀 있는 소녀”는 마치 신화 속 인물처럼 다가온다. 소녀는 “오래전 시리우스B의 별에서 방주를 타고 지구로” 온 존재이므로 현실과 유리된 세계 속 인물이다. 어쩌면 소녀는 ‘노마드’의 정처 없음을 표상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소녀는 시인이 가닿고 싶은 세계 자체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피”로 물든 세계를 꿈꾼다. 이때 피는 비극이나 슬픔, 고통이 아니다. 피를 통해 삶의 원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피”는 삶이 시작되는 곳이자 근원이다. 그것은 현실 너머로 지향함으로써 신화적 시공간을 만든다. 소녀의 손가락이 별에 닿으며 새벽은 소환된다. 그리고 시인은 흑요석을 떠올린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연결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마주하게 한다. 노마드에 대한 시인의 지향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죽음마저 초월한 원형의 세계에 닿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노마드에 대한 간절함과도 같다.
푸른 들판을 종일 떠돌던 하얀 말 한 마리 뜨거운
방황의 숨결이 내게로 손을 뻗는다
하얀 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푸른 말이
좋아 푸른 말을 그려 거절당했다는 고갱의 그림에서
탈출한 푸른 말일까
무명베에 푸른 풀물이 배어들 듯 하얀 말이
푸른 말로 변해가는 저 한 폭의 명화
슬픔을 지닌 슬픔
슬픔을 삭여낸 슬픔
가지고 있던 많은 조건들을 다 버리고 떠나온 그 길과
저 길을 잠시 더듬어 보는 듯, 그는 마치 눈만 커다랗게
살아있는 것처럼, 뻣뻣하고 긴 속눈썹을 꿈틀거린다
해질녘 으슴푸레한 빛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스물 스물 기어오르는 찬 기운을 견디며 넓은 초원의
풍경을 굶주린 듯 응시하는 저 갈망은 아마도 증오나
욕망이 아닌 새롭고도 강렬한 호기심일 것이다
-「푸른 말」 부분
「푸른 말」은 「바다 경마장」에 이어 말의 이미지가 주요한 장면으로 등장하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색상 이미지다. 흰색과 푸른색을 통해 시적 이미지가 선명하게 시각화된다. 흰색과 푸른색이 주는 대비의 모습은 생생한 시의 감각을 만들며 노마드에 대한 지향 의지를 강화한다. 이때 들판을 달리는 말은 노마드의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들판을 달리는 말로 상징화된 노마드의 세계는 “가지고 있던 많은 조건들을 다 버리고 떠나온” 길이다. 시인은 “뻣뻣하고 긴 속눈썹을 꿈틀”거리며 그 “길을 잠시 더듬어 보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마드의 세계를 말하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본질은 슬픔이다. 그것은 “슬픔을 지닌 슬픔”이나 “슬픔을 삭여낸 슬픔”처럼 끝도 없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노마드의 삶에 이를 수 없기에 세계는 슬픔의 극한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노마드에 도달 수 없다고 하여 우리 삶이 절망에 빠지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노마드에 이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갈망하는 마음만으로도 삶의 위로가 될 수 있다. “찬 기운을 견디며 넓은 초원의 풍경을 굶주린 듯 응시하는” 갈망의 간절함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노마드의 세계에 이르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마로니에공원 파랑새 극장 앞에 매미허물처럼 벗어놓은
사람의 껍데기 셋 서있다
몸 빠져나간 코트 속은 그늘로 꽉 찬 동굴 같고
동굴의 미궁 같은 그곳은
세속을 떠나 쉬고 있는 식영의 세계
그림자 하나 내 발자국을 밟아온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였던, 나이면서 나와는 또 다른 사람
(중략)
비록 우리는 하나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는 없지만
만지면 금방 따스해오는 분홍빛 손바닥
결코 세속을 벗어날 수 없는 유일한 동반자
-「조각가 K」 부분
도시는 노마드의 반대편의 공간을 상징하며 끝없이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다. 도시의 일상은 비루하고 참혹한 시간 속에 지루하게 펼쳐진다. 그곳의 시간을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견고하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의 삶은 “매미허물처럼 벗어놓은” 껍데기일 뿐이다. 그리고 껍데기로 남은 “코트 속은 그늘로 꽉 찬 동굴” 같다. 동굴은 텅 비어 주인을 잃어버린 공간이지만 어쩌면 그곳은 일상의 비극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동굴의 미궁 같은 그곳”에서 “세속을 떠나 쉬고 있는” 누군가의 삶을 어루만지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은 도시의 일상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도시의 삶에 놓인 우리가 “결코 세속을 벗어날 수 없는 유일한 동반자”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꿈꾸던 노마드의 세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방금 떨어져 뒹구는 단추”와도 같다. 우리 모두는 “세속을 벗어날 수 없는” 동반자이지만, 세속을 벗어나지 못할수록 노마드에 대한 갈망은 커진다. 동굴의 그늘 같은 코트 속이 진짜 노마드는 아니지만 일상을 견디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늙은 오디나무가 칠월의 땡볕 속에 서있다 무지개 뿌리를
담았던 샘물이 여전히 뿌리 속으로 스며드는
초록 잎 사이사이 자줏빛 혀 같은 오디들
땅 위로 드리운 가지들에서
아직도 두런거리는 소리 들린다
(중략)
조용한 방문객, 늙은 소녀가
거울을 닦듯이 허공을 문지른다
온통 푸른 잎에 싸인 오디나무아래 얼핏 춤추는
소녀가 아른거린다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
목욕하는 아낙네들의 별밤이 박 덩이처럼 뽀얗다
-「오디나무 아래 그늘」 부분
늙은 오디나무가 칠월의 더위를 견디고 있다. 땡볕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지만 샘물은 “여전히 뿌리 속으로 스며”들고, “자줏빛 혀 같은 오디들”은 나무의 가지가 품은 초록 잎 사이사이 두런거리고 있다. 이러한 풍경은 고통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순간처럼 다가온다. “늙은 소녀”가 “거울을 닦듯이 허공을 문지”르는 시간은 슬픔을 인내해야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런 시간을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을 견디는 힘이 되는지도 모른다.
박분필 시인의 시편을 따라가며 노마드를 간절히 희망하는 시적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마드의 세계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시인 역시 노마드에 이르기를 애타게 원하지만 그것이 요원한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도시의 일상을 견디는 시간은 노마드보다 디아스포라에 가깝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뿌리 뽑힌 것과 같은 것이며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것과 같은 비애로 가득한 것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바다와 초원에 이르기를 희망하고 별과 태양, 파도와 나무의 세계와 만나기를 소망한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은 디아스포라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노마드를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슬픔을 인지하고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노마드와 디아스포라의 간극은 크지만, 노마드에 이르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모든 고통의 가운데에서도 그곳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조동범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이 있으며, 산문집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보통의 식탁』,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비평집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을 펴냈다. 청마문학연구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