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에 "버릇없는 녀석들"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1980년대 민중운동과 미국
전두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더 강화되었다. 1980년대 초의 몇 가지 사례만 꼽는다. 첫째, 1981년 2월 전두환은 이제 막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초청받은 최초의 외국인 지도자가 되었다. 전두환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 그의 정권을 '정당화해주는 승인' (legitimizing approval)을 보장받은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전두환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동안 그가 난처해 하지 않도록 국제 인권 상황에 관한 연례보고서 출판을 늦추는 등 극진하게 배려했다.
둘째, 1981년 7월 이제 막 임명장을 받은 워커 (Richard Walker) 주한미국대사는 한미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깝다고 선언했다. 전두환의 '철저한 지지자'(staunch supporter)였던 그는 몇 개월 뒤 야권 단체들을 비난하고 학생들을 '버릇없는 녀석들'(spoiled brats)이라고 낙인찍으면서, 전두환과 그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찬양했다. 나아가 그는 전두환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야권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멀리했다.
셋째, 1983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국빈 방문했는데 이는 양국 사이에 '뗄 수 없는 협력'(inseparable partnership)의 새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레이건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굳건한 지지를 거듭 확인하며 전두환의 인권정책까지 찬양했다. 그가 서울을 방문하는 동안 전두환 정권은 40여 명의 야권 인사들을 가택 연금시켰는데도 말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인들은 19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된 뒤 오랫동안 기다려온 민주주의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기대했다. 특히 광주항쟁 동안 한국인들은 '특별한 나라'로 인식해온 미국의 도움을 더욱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또 다른 군사독재 정권과 이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이나 배신을 얻었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그때야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보다 지역 안보가 미국의 국익에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80년대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급속도로 그리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80년대 초 대표적 징후나 사례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언론 통제 때문에 광주 학살에 관해 알지 못했지만 야권 인사들의 지하 통신망을 통해 이에 관한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광주 학살이 알려지면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반미감정이 심각하게 일기 시작했다고 1980년 6월 두 차례나 보도했다.
둘째, 1980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대학생들은 시위 선언문에 "최초로 거의 똑같이"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예를 들어, 1980년 9월 9일 경희대학교에 뿌려진 유인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즘 미국이 한국인들이 전두환을 지지한다는 취지로 터무니없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우리는 미국의 역할이 통탄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1980년 12월 광주 미국문화원에 불이 일어났다. 건물 주위에 뿌려진 유인물은 미국이 한국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함으로써 군사정권을 촉진한다고 비난하며 미국인들은 한국을 떠나라고 촉구했다. 이에 관한 정보가 당시엔 보도될 수 없었지만, 방화범들은 나중에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미국은 광주항쟁 동안 전두환을 지지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동맹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에 대한 항의로써 우리는 브라운 (Brown) 국무부 장관이 방한하는 시기에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넷째, 1982년 3월 부산의 보수적인 고려신학대학 학생들에 의해 부산 미국문화원이 불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한 명이 죽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뉴욕타임스>는 "한국 역사상 미국의 재외공관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라고 보도했다. 바로 앞에 소개한 1980년 12월의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1년 넘게 지나도록 해외언론에까지 알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주변에 뿌려진 성명서의 제목은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방이라는 명목하에 국내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매판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해왔다. (…)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국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한편, 광주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1980년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 현상은 아마 민중운동의 발전이었을 것이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외세의 영향 없이 민족통일을 이루며,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실상 독립을 성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민중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박탈당하며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당하는 대중을 일컫는데, 주된 계층은 공장노동자, 소규모 농부, 도시 빈민이다. 그리고 이들과 동조하는 용감한 운동가들과 양심적 지식인들도 민중으로 간주되었다.
민중운동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하는 과정에 문화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었다. 1980년대 민중 문화운동을 이끈 핵심 조직들 가운데 '민중문화협의회'가 대표적이었다. 1984년 4월 진보적 작가, 예술인, 교수, 언론인, 출판인들이 만든 이 단체는 창립 발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외압과 분단으로 말미암은 질곡에 신음하고 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문화적 식민지화의 압도적 중압에 눌려 정상적 자기 발현을 억제당하고 있다. (…) 그것은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신식민주의의 문화이며, 민중의 절절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내외의 지배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관제문화이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노예화의 문화, 신식민주의 문화, 관제문화, 분단고착의 문화는 결단코 종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회원들은 1986년 5월 인천에서 열린 거대한 반정부 및 반미 데모에 걸개그림, 손 깃발, 만화 전단, 풍물패 등을 포함한 다양한 선전도구들을 앞세워 참여했다. 그리고 1986년 9월엔 양키와 매판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한 집회를 이끌었다.
1988년 12월엔 문인, 미술가, 음악가, 연극인, 무용가, 영화인 등을 포함한 수백 명의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인들이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 (민예총)'을 결성했다. 그 창립 선언의 일부를 옮긴다.
"지나간 '4월(혁명)'과 '5월(항쟁)'에서 '6월(항쟁)'까지 이르는 당대 민족사의 흐름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정권을 내세워서 신식민지적 질서를 정착시켜왔고, 그 심화된 기초 위에서 분단 고착화 내지는 예속화 정책을 추진하던 외세와 반민족적 세력에 대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민중의 항쟁이 시작된 시기를 상징한다. 우리는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과,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벗어나 나라의 자주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만 하는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다"
나아가 이 단체는 민족 분단의 상황에서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껴안기 위한 공통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풀뿌리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민족주의적 예술은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에 저항하는 대항세력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