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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명언]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Pondus meum amor meus).
교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인류가 배출한 가장 훌륭한 천재들 가운데 한 명인 아우구스티노의 이 말씀은 「고백록」 13권 9장에서 발견된다.
성인의 대표적 저서로서 ‘하느님께 보내는 긴 편지’인 「고백록」은 하느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요 흠숭의 찬가이며, 감사 행위이고 사랑 고백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향해 자신의 과거사를 묘사하면서 인간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활동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유로, 가에타노 네그리가 평가하듯, 모든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고, 인류정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헌 가운데 하나이다.
‘무게’와 ‘사랑’
찬미 고백이요 죄의 고백이며 신앙 고백의 맥락 안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노는 “당신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안식하는 것, 거기에서 당신을 누리는 것, 우리 안식이 바로 우리 자리인 것”이라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무게’에 대해 설명한다.
“물체는 제 무게 따라 제자리로 기울고, 무게란 밑으로 미는 것만이 아니요, 제자리로 기우는 것. 불은 위로 당기고, 돌은 아래로,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 물속에 버린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던진 물은 기름 아래로 잠기니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각 사물이 갖고 있는 무게는 그 사물이 자신의 자리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로 기우는 것이 바로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가 있는 곳에 안식이 있다. 곧 우리의 안식이 우리의 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인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대상을 그 자체로 욕구한다는 것이다. 곧 사랑은 어떠한 대상을 향한 움직임(motus ad aliquid) 또는 욕구(appetitus) 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랑은 의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그 누구에 의해 강요받지 않으면서, 어떤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또는 획득하려는 영혼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곧, 의지는 어떠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영혼의 능력(potentia animi)’인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불변하는 선에 결속할 수도 있고, 열등한 선에로 전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상위의 사물을 택하거나 하위의 사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의지적이며 동시에 선택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 1권 1장에서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합니다.”라고 강조한다.
사랑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
사랑이 어떠한 대상을 향한 움직임이라면, 어떠한 대상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향유’(frui) 와 ‘사랑’(uti) 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랑의 질서’를 제시한다.
성인에 따르면, “현세적 사물들을 사용해야 하며, 영원한 것을 향유해야 한다”(「설교집」, 36,6).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것들은 최고선에 도달하고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마태오 복음 22,37-39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 계명과 연결시킨다면, 하느님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녀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영적인 눈으로 이웃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을 보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구원에로 이끄는 인간 삶의 규칙이 있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질서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는 것, 곧 사랑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가 없다면 불안이 생기게 되고, 이 질서가 잘 지켜진다면 평온이 있게 된다.
사랑의 질서가 갖는 중요성은 사랑이 지닌 능력에서도 등장한다.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대상이라는 두 존재를 일치시키는 생명력이다.
그렇기에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는 어떤 사랑을 지니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라고 전제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되지만,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된다고 강조한다(「요한 복음 강해」, 2,14 참조).
이는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에게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 지니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시키고,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토록 사랑은 하느님께 이르는 확실한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의 하늘이요,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끔 한다. 우리가 사랑으로 가득 찰 때,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모든 영혼의 움직임과 모든 육적 충동들이 진리요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분께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며, 빛을 밝혀주시는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그리고 우리가 불멸의 나라에 이르도록 사랑의 무게 밑에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설교집」, 228,2).
[교부들의 명언]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죄를 씻어주지만 자선도 죄를 없애줍니다
“기상! 기상!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야지!” 동지섣달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과 식물들이 깨어나서 꿈틀거리며 외치는 소리다. 그야말로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다. 그리고 3월 사순시기다.
자선에 관한 내용을 통하여 사순시기의 신학적, 영성적 의미를 되살리고, 신앙생활 안에서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순시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레오 대교황(위 그림 : 440-461년 재위)의 말씀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죄를 씻어주지만, 자선도 죄를 없애줍니다.”(ut peccata quae sunt baptismi aquis, aut paenitentiae lacrymis abluuntur, etiam eleemosynis deleantur : 사순시기 「강론」, 11,6)에 대해 기술해 본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선’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자선’은 ‘정의’라는 의미를 포함하여 이해하였다. 칠십인역에서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시편 24,5; 이사 59,16), 동족을 위해 베푸는 인간의 자비(창세 47,29), 드물게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성실한 응답인 정의(신명 6,25) 등을 뜻한다.
이 단어가 물질적인 도움이라는 자선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시대적으로 후대에 쓰인 다니엘서, 토빗기, 집회서 등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지혜서와 예언서에 따르면,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직접 하느님께 선을 행하는 일이며(잠언 19,17), 하느님의 보상과(에제 18,7) 죄의 용서를(다니 4,24; 집회 3,30) 가져다준다. 또한 자선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와 같고(집회 35,2),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면서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과 같다(집회 29,12).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자선은 단순한 인간적 박애를 넘어서서 종교적 행위의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을 토빗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네가 가진 만큼, 많으면 많은 대로 자선을 베풀어라. 네가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은 대로 자선을 베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나누어주어라. 너에게 남는 것은 다 자선으로 베풀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토빗 4,7-8.16).
신약성경에서도 자선을 사랑과 자비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적인 행위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자비로운 행위라는 관점에서만,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선의 관점으로만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것이 곧 주님께 베푼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범위를 뛰어넘는 자선의 가치를 내세우신다.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동일한 위치로 끌어올리셨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일반적인 수계생활 세 가지, 곧 자선(마태 6,1-4)과 기도(6,5-15) 그리고 단식(6,16-18)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자선은 사순시기에 신자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실천사항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
레오 대교황은 자선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적 차원의 행위라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자선은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에게서 자비와 용서를 받으려면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오 대교황은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죄를 씻어주지만, 자선도 죄를 없애줍니다.”라고 강조한다.
교부들은 세례를 ‘재생의 성사’ 또는 ‘재생의 목욕’이라고 부른다. 원죄와 본죄를 지닌 인간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은 본죄와 원죄를 용서받게 된다. 그러나 세례 이후에 지은 죄까지 모두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당시 세례를 받은 신자가 배교나 살인 그리고 간음과 같은 중대한 죄를 지어 교회에서 파문되었다면, 수년간의 참회단계를 거쳐 죄의 용서를 구하였다. 파문된 죄인들은 참회절차를 마치고 나서야 정상적인 신자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이때 주교가 하는 공적인 선언을 ‘화해’라고 말한다.
그만큼 인간이 죄를 지어 잃어버리고 망가진 것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려면, 하느님과 이웃의 용서와 자비를 얻기 위한 참회의 눈물이 필요하였다. 반면 일상에서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수계행위를 통해 죄의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레오 대교황이 여기서 말하는 ‘죄 사함의 은총’은 파문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다.
사순시기는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의 때이다.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마귀의 꾐에 넘어가 죄를 지은 죄인들도 사순시기에 죄 사함의 성사를 받게 된다. 물론 세례를 통한 죄 사함과 자선을 통한 죄사함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런데 레오 대교황의 이 명언에서 자선은, 세례성사(세례의 물), 참회의 성사(참회의 눈물)와 더불어 사순시기에 가장적절한 수계행위로 승화되어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지만, 그 구원을 받고자 자신을 정화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를 똑똑하게 살펴보아, 일그러지고 더럽혀진 부분을 바로잡아 깨끗해지려면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
레오 대교황이 말하는 자선 실천의 방법
레오 대교황의 강론에는 ‘오늘’, ‘지금’ 또는 ‘이때’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과거에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단순히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례에 참석한 신자들이 그 신비에 ‘지금’ 동참하고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되는 파스카 신비를 준비하는 시기다. 주님의 수난 없이는 부활도 있을 수 없으며,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어 있다는 원칙에 따라, 레오 대교황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없다고 종종 강조한다.
우리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길은 사순시기의 수계생활 가운데 하나, 바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다. 레오 대교황이 말하는 자선 실천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선을 베풀 때는 재물을 걱정하지 말고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자선은 누구나, 곧 부유한 이들뿐만 아니라 궁핍한 이들도 베풀 수 있다. 자선에서 중요한 것은 재물의 양과 종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선의이다. 진실한 마음이 담겨있다면 냉수 한 잔으로도 자선을 베풀 수 있다.
셋째, 자선을 베풀 때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베풀어야 한다. 넷째, 자선을 실천할 때에는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섯째, 자선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선은 세속적인 친절이나 동정과 다를 바 없다.
봄을 맞아 땅속에서 갓 나온 벌레나 갓 자라는 풀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시작한 그날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날이 갈수록 부의 양극화가 심각해지는 우리의 현실에서, 또다시 신앙생활의 새로운 활력을 얻고자, 우리의 눈과 손발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교부들의 명언] 이 빵은 죄를 용서해 준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위의 많은 신자들에게 질문해 보았다. “세례성사는 죄를 용서해 주는 성사인가? 고해성사도 죄를 용서해 주는 성사인가? 그렇다면 성체성사도 죄를 용서해 주는 성사인가?”
처음 두 질문에는 모두 “예.”라고 대답하였지만, 맨 나중의 질문에는 주저하고 망설였다. 과연 교부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암브로시오 성인의 삶과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암브로시오 성인의 삶과 당시 상황
니케아 공의회 (325년)이후에도 밀라노에서는 니케아 정통 신앙파와 아리우스파가 서로 맞섰고, 지역 책임자였던 암브로시오는 양쪽을 차별 없이 대함으로써 치안을 평온하게 유지하였다.
어느 날 신자들을 향하여 연설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어린이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모시자.”고 외쳤는데, 정통 신앙파, 아리우스파 할 것 없이 여기에 동의하였다.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던 암브로시오는 주교직을 사양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더 이상 맞설 수 없음을 깨닫고 세례를 받은 지 여드레 만인 374년 12월 7일에 주교품을 받았다.
그는 끊임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수도승과 같은 수행의 삶을 살았으며, 가지고 있는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한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서 소박한 삶을 엮어간 암브로시오였지만, 부당한 권력 앞에서는 타협이나 양보를 몰랐다.
그는 원로원 의사당에 빅토리아 여신의 제단을 다시 세워 이교예식을 복원하려는 로마 원로원의 야심찬 계획을 좌절시켰고(383년), 아리우스파에게 밀라노의 대성당을 넘겨주라는 황실의 끈질긴 요구와 군사적 위협에 맞서 신자들과 더불어 성당을 지켜냈다(386년).
특히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발생한 폭동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대학살이 벌어지자, 암브로시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살인죄에 대하여 교회의 규정에 따라 공개적으로 참회할 것을 요구하였고, 황제는 일정 기간 동안 교회에서 공적 참회를 하고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고백한 뒤에 용서를 받고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졌다.
대단한 웅변가였던 그는 강론을 통해 당시의 여러 가지 사회적 폐습, 특히 상류 계층의 퇴폐적인 생활을 신랄하게 지적하였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적절하게 설파하였다. 나아가 암브로시오는 성모 공경과 순교자 공경 신심을 드높이는 데 열성적이었다. 그는 바쁜 활동 중에도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은 신자들에게 한 강론이다.
생명의 빵은 죄를 용서해 준다
“이 빵은 죄를 용서해 준다 (Panis hic remissio peccatorum).”는 391년 암브로시오가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마지막 축복’을 주석한 작품, 「성조」 9,39에 나오는 대목이다.
암브로시오는 창세기 49장 20절 “아세르는 양식이 넉넉하여 임금에게 진미를 올리리라.”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선물의 새로움과 절대적인 우위성을 강조한다.
영양이 가장 풍부한 음식인 그리스도 자신과 비교할 때 이전에 인간이 먹고 마신 음식은 영양이 풍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다”(2코린 8,9 참조).
정확히 이 음식은 그리스도 자신이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로마 11,33)이 감추어진 보물, 그분의 몸과 “(참된) 양식”(창세 49,20)의 성사, 곧 인간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생기를 돋우는 풍요로운 양식(요한 6,35 참조)인 것이다.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 빵을 먹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어, 믿는 이들에게 이 빵을 나누어주도록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우리에게 사제가 날마다 자신의 말로 축성하는 그 빵을 주신다”(「성조」, 9,38).
또한, 암브로시오는 요한 6,48-51을 인용하면서 성체성사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8-50)라고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을 우리는 … 받아 모실 수 있다.
… 그분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 사실 자신을 돌이켜본 사람은 이 빵을 먹는다(1코린 11,28 참조). 또 이 빵은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에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죄인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성조」, 9,39).
성체성사는 죄를 용서해 준다
암브로시오는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요소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내세우는 마르코 전통의 관점을 요한의 관점과 대조하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생명의 증여자인 그분의 인격을 표현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님 죽음의 사건은 여전히 현존하지만, 성체성사가 생명 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부활의 축제 사건으로 극복되었다. 부활 사건은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죄를 용서해 준다. 이 때문에 암브로시오는 주님의 식탁에 참석하려는 모든 이에게 정결한 마음을 요구한다.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난 뒤에 주님의 몸을 받아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기 전에 갖추어야 할 이러한 신중한 태도를 고려할 때 성체성사가 죄를 용서해 준다는 문장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의 빵을 죄의 용서로,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소개하는 문장을 그의 여러 작품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주님의 식탁에 신자들을 초대하여 죄의 용서를 기뻐하고,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버리도록 한다.
이러한 전망에서 성체성사는 단순한 용서 행위, 치유와 성화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죄가 없는 순결한 상태에 대한 확증으로 드러난다.
이때 세례성사는 그리스도인을 이러한 무죄의 상태로 이끌고, 참회성사는 세례를 받은 이후, 죄의 상태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무죄의 상태로 다시 인도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생명의 빵은 인간의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을 합당하게 받아 모시며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면서 하느님과 이미 친교를 맺는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전례생활의 시작이며 정점이고 마침이다. 다른 교부들과 달리 암브로시오는 성체성사의 긍정적인 효과 가운데 하나가 곧 죄의 용서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모든 전례는 성체성사와 연결되었을 때에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만큼 성체성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체를 모시기 전, 각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전례시기에 따라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미사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잘못과 실수 그리고 죄에 대해 참회할 시간도 없이 미사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자.
[교부들의 명언]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레오 성인과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름 앞에 ‘위대하다’는 뜻의 경칭 ‘대(大)’가 붙는다. 두 분 모두 교종(敎宗)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서방 교부들인데, 동방에도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린 교부가 있다.
벗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과 아우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카파도키아의 교부들로 유명한 대 바실리오 성인이다.
서기 330년에 태어나 379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결코 길지 않은 생을 살면서 그는 동방수도제도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수도승 영성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겼고, 니케아공의회(325년) 이후 교회에 큰 위협으로 떠오른 아리우스주의, 반(半)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정통교의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가난한 이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바실리아데스를 세움으로써 사회사업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 바실리오의 가장 큰 염려는 황제를 등에 업고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세력들에 대항하여 교회의 일치를 지키는 것이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황제의 명을 받고 협박하는 총독 모데스토에게 담대하게 맞서는 대 바실리오 성인의 모습을 전해준다.
(총독) 바실리오, 그대는 황제의 종교를 따르지 않을 것인가?
(바실리오) 나의 황제 (곧, 하느님) 께서 그것을 금하신다.
(총독) 그대는 나의 힘이 두렵지 않으냐?
(바실리오)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총독) 나는 그대의 재산을 몰수할 수도 있고 그대를 고문할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다.
(바실리오) 그것뿐인가? 그런 것은 두렵지 않다.
(총독) 지금까지 내 앞에서 그대처럼 자유롭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바실리오) 그것은 그대가 아직 주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372년 주님공현대축일에 있었다는 이 만남에서 오고간 대화는 하느님만 섬기는 바실리오의 깊은 믿음을 보여준다.
바실리오의 시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교회는 복음의 짠맛을 잃어버린 채 세상과 타협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었으며, 대토지소유제로 인해 가난한 이들의 삶은 더욱 비참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교회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둘러싼 이견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 자주 여행을 하고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나는 다른 기술과 학문에 종사하는 이들 사이에는 일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또 성령이 풍성히 부어진 교회에서는 성경을 둘러싼 이견과, 사람들 사이에 크나큰 불화가 있음을 보았다.
판단과 견해가 서로 달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맞서있는 교회의 우두머리들이 아무런 자비 없이 양 떼를 혼란스럽게 하면서 하느님의 교회를 찢어놓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었다”(「하느님의 심판에 대하여」, PG31, 653A-653B).
이러한 분열의 참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바실리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면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판관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어떻게 각자가 제 눈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행했는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를 말하는 구절이었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기 때문이다’”(「하느님의 심판에 대하여」, PG 31, 653C-656A).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역시 대 바실리오 성인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만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탐욕이 아니라 서로 나누며 돕고 살자고 하면 왼쪽으로 기울었다고 배척하고, 교회의 가르침인 사회교리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 움직임이 엄존하는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인지 돈과 편리와 쾌락을 믿는 것인지 한 번 자문해 보아야 하겠다.
「도덕론 (Moralia) 」의 결미에서 대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Quid proprium Christiani?) …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사람이다. … 주님의 빵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억을 간직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주님의 복음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의로움보다 더 큰 의로움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서로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눈앞에서 항상 주님을 뵙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여, 매일 매순간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완전하게 수행할 준비를 갖추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PG 31, 869B-869C).
[교부들의 명언] 언제까지 돈의 종노릇을 할 작정입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349-407년)은 우리에게 ‘요한 금구(金口)’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황금의 입’은 6세기부터 그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였는데,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황금의 입’ 뒤편에 ‘황금의 삶’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참된 말씀은 삶에서 비롯되는 까
닭이다.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속 학문을 마친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멜레티우스의 눈에 띄어 독서직을 받고 이듬해부터 수도승의 삶에 뛰어든다. 그러나 엄격한 수행생활로 병을 얻게 되어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야 했다. 6년간의 수행생활은 이후 그의 사목적 삶에 굳건한 바탕이 되어주었다.
386년 사제품을 받은 이후 요한은, 멜레티우스의 후계자였던 플라비아누스 주교를 도와 주교의 “눈이자 손, 입”(플라비아누스의 표현)으로 헌신하면서 뛰어난 강론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면서 그의 삶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치를 일삼던 부유층과 황후 에우독시아를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다가 황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맘몬에게 영혼을 내주는 사람들
“…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재물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탓에 가치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누가 행복하다는 말은 그가 돈이 있다는 뜻이요 누구를 동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게 없다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누가 재물을 모으려고 어떻게 했다거나, 다른 누구는 어찌하다 파산에 이르렀다거나 하는 것들뿐입니다. 누가 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무슨 직업을 가지려 할 때는, 그것이 빠른 시일 안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인지 분명할 때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우리는 이러한 악을 어떻게 쫓아버릴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을 종으로 삼고 있는 맘몬을 언제까지 재갈을 물리지 않은 채 방치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언제까지 돈의 종노릇을 할 작정입니까?(Imo potius quosque servi eritis pecuniarum?) 언제가 되어야 여러분은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만일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얻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겠지만, 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러분은 이 무서운 종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돈이라는 폭군에 잡힌 삶은 사람의 종노릇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강해」, PG58,790).
물신에 사로잡힌 당대 사람들에 대한 꾸짖음이다. 1620년이 더 지난 이야기가 놀랍게도 우리의 현실과 정확하게 겹친다. 우리나라가 세계 십몇 위를 다투는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맘몬에게 영혼을 내주고 얻은 결과가 아닐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어떤 일의 타당성을 따지면서 그 일로 얻는 경제유발 효과가 몇억 원, 몇조 원이라고 보도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의 주요한(어쩌면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 돈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난이 악이 아니라 가난을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고 말한다(「마태오 복음 강해」, PG58,791).
“…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라고 했고, 엘리야는 아합 임금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조상의 집안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1열왕 18,18)라고 말했습니다. 자유롭게 말하게 하는 것이 가난임을 보십시오.
그러나 부자는 항상 종으로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 반면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벌도 몰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난이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난하게 파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완전한 자유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는 필요 등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히브리서 강해」, 18, PG 63,137).
참으로 가난한 사람
그가 말하는 가난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려고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의 전제조건이었다. 세상이란 예나 지금이나 본래 그런 모습이라 치자.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공격한 무리는 황실과 부유층만이 아니었으며, 권력에 야심이 있던 교회 인사들 또한 거기에 합류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테오필로스는 403년 보스포러스 해협 근처에서 교회회의(이른바 참나무 교회회의)를 열고 자기편 사람들을 모아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면직하고 유배형에 처한다.
우여곡절 끝에 첫째 유배에서 돌아왔으나 이듬해 두 번째 유배길에 오른 요한은 결국 이들의 계교에 의해 탈진한 상태로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호송하는 군인들에게 요한이 도중에 죽게 하면 승진시키겠다는 약속을 해두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모든 일을 통해 하느님은 영광 받으소서!”였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위협에조차 초연할 수 있었던 참으로 가난한 사람, 요한 크리소스토모다운 최후였다.
[교부들의 명언]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Putatis quia pacem veni dare in terram? Non, dico vobis, sed separationem).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성경본문에 관하여 암브로시오 교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이제 마음이 변하시어 이웃 사랑이고 예의고 모조리 다 파괴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분열을 명하셨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친척 사이를 파괴시키러 오셨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루카 복음 해설」, 7,135)
영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
성 암브로시오 주교는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 가운데 일곱 번째 행복, 곧 평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위에 언급한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의 집과 같다. 하느님을 위한 집인지 또는 마귀의 집이 되는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이 집에 식구들이 있는데, 둘은 셋을 거스르고, 셋은 둘을 거슬러 살고 있다. 둘은 영혼과 육신을 의미하고, 셋은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뜻한다(「루카 복음 해설」, 7,138-139).
이와 같이 갈라져서 살고 있던 미련한 상태의 비지성적 인간을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강생 구속하시어 변하게 해주셔서 지성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다(「루카 복음 해설」, 7,139).
“전에는 우리 인간이 동물과 비슷하여 지성을 모르고, 육적, 세속적인 존재였기에 성경에서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어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성령을 넣어주시고 우리를 영신적인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루카 복음 해설」, 7,13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심으로써 영혼과 육신 사이에 최종 평화를 이루어주셨다. 영육 간의 불목은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발생하였고, 그 결과 영육이 항상 분열을 일으켜, 함께 덕행의 길로 정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둘을 하나 되게 하셨고, 당신 몸을 바쳐 적개심을 없애주셨다. 평화의 주님께서는 과거의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해 주셨다. 그 결과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하나가 되고, 또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루카 복음 해설」, 7,141).
그리스도 안에서 영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되어, 이제는 육신이 더 고귀한 영혼에게 순명하여 따르고, 죄의 허물을 깨끗이 용서받고 천상의 길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육신은 영혼을 감싸주며,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다(「루카 복음 해설」, 7,141).
육신의 죄악 없애고자 불과 칼을
그리스도 덕분에 인간의 영혼이 본래의 위치를 되찾아 돌아왔다. 바로 이 점을 들어 암브로시오 교부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 왜 그리스도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분열은 그분이 주시려는 평화의 은혜와 상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분열은 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먼저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안에 폭력배가 숨어 살 듯이 쾌락이 기거하면 악과 혼인한 것처럼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붙어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불을 가져오셔서 육신의 죄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칼을 가지고 오셔서 예리한 칼로 우리의 뼛속 생각까지도 꿰뚫으십니다.
그리하여 영혼과 육신이 새롭게 되고 젊어지게 됩니다. 영혼은 지금까지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못했던 생활을 이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되었던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무성한 가지를 쳤던 그릇된 관계를 청산하게 됩니다”(「루카 복음 해설」, 7,145).
암브로시오 교부는 이와 같이 죄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마귀의 은신처 노릇을 하는 거처로 비유하였다. 약하고 병든 영혼은 마귀와의 잘못된 결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을 분열은 바로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루카 복음 해설」, 7,143.145-146).
암브로시오 교부는 신자들에게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주님은 돌아가시면서 이 잘못된 결합을 풀어주셨으며(「루카 복음 해설」, 10,126), 영혼과 육신의 원수지간 담을 헐어버리시고 평화를 회복시켜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영혼과 육신이 같은 것을 바라보고 느끼며, 둘이 협력하여 덕행으로 나아가게 된다(「루카 복음 해설」, 3,26).
그리스도께서는 이 평화를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어 계속 나누어주게끔 하셨다(「루카 복음 해설」, 10,172). 주님께서 제자들 마음속에 심어주신 평화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서간집」,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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