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7] 이정옥(李貞玉) 일심봉천(一心奉天) - 6. 정든 전주를 떠나 서울로 - 1 1 박헌휘씨가 계시를 잘 받았는데, 내가 입교 후 한 달이 되었을 때 그가 계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하는 말이, 하늘에서 나를 서울로 데려가려고 하여서 자기가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2 그 당시 전주교회 발전상 내가 꼭 있어야 할 사정이었고, 또 나 자신도 전주를 떠날 생각은 전연 없었다. 하지만 그 계시는 들어맞았다. 다음 해 1957년 8월에 가산을 정리해 가지고 상경했다. 남대문 시경 앞에 점포를 얻어 다시 약국을 시작했다.
3 선생님이 약국명을 백화약국(百和藥局)으로 명명해 주셨고 전주에서 있던 여자아이와 통화당에 있던 남자 청년 식구가 나를 도와주게 되었고, 송기주씨가 우리 약국에 책상 하나를 갖다 놓고 최주찬씨와 같이 우표 사업을 하였다. 4 청파동 전 본부교회 앞에 바짝 붙어 있는 대지 65평의 한옥 오두막 기와집을 사서 살림집으로 장만했다. 교회와 한집 같아 교회 출입하기는 편리했다. 집이 얼마나 작은지 안방은 두 평쯤 되고, 한 평쯤 되는 대청, 평 반쯤 되는 건넛방이 있었다.
5 아름다운 삼층 자개장이 있었는데 그것이 안방에 들어가지 않아서 세 짝을 각각 메어 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낮은 집이었다. 그러나 불만은 하나도 없었다. 교회와 붙어 있어서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신옥순 권사님이 오셔서 겉보기는 허술해도 여기가 천국이오 하여서 기뻤다. 6 어느 날 여자 영통인이 지나가다가 들어와서, 이 집터가 명당이니 절대로 팔지 말라고 하였다. 이 집터가 후에 바로 청파동 전 본부교회의 대문이 되었고 선생님 차고가 되었으니 어찌 명당이 아닐 수 있겠는가.
7 그때 교회에서 먹고 자는 식구들의 생활이 무척 어려워 식사도 보통 김치와 된장찌개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나도 교회 식구들과 똑같은 생활 수준으로 낮추어 실천에 옮겼다. 약국도 비록 내가 경영하고 있지만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늘 것이요, 아버님 것이라 믿었다.
8 내 마음속으로는 하늘 것을 내가 맡아 경영하고 있다는 심정이었기 때문에 약국 수입을 함부로 쓰지 못했다. 입교 전에 가졌던 핸드백이 낡아서 바꾸어야 했지만 선뜻 새것을 살 수 없어서 5~6년 동안 핸드백 없이 지냈다. 그 집은 우리 식구는 누구든지 와서 먹고 쉴 수 있고, 물건들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9 서울로 이사 오려고 할 때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어떻게 외로이 지낼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아버님 이제 제가 생소한 곳 서울에 가면, 가장 심정이 잘 상통할 수 있고, 뜻을 받들어 나가는데 서로 도움이 되고, 가장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분으로 두 분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고 세 번이나 기도했다.
10 그래서인지 상경해서 본부교회에 와보니 선생님께서 이득삼 형님과 최원복 선생 두 분과 삼위기대를 묶어 주시었다. 최 선생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 내용을 알려주시면서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껴안아 주시면서 기뻐하셨다. 이렇게도 빨리 내 기도를 이루어 주시다니 정말 놀라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