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박항서 “2022 한국대표팀, 2002년보다 전력 낫다”
[이 사람]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
“저는 축구밖에 모르는 生計型 축구인”
장원재 배나TV 대표월간조선
입력 2022.07.24 08:25
축구는 글로벌 차원에서 산업화를 이룩한 종목이다. 막대한 이익을 내는 산업이기에, 거의 모든 나라가 투자 가능한 최대치를 쏟아붓는다. 국가 주도의 단기적 압축 성장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박항서는 단기적 압축 성장을 실현했다. 박항서의 업적이 놀라운 이유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남자. 그는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영웅을 넘어, 전 세계적 개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어머니 백순정 여사의 100세 생신을 맞아 일시 귀국한 영웅을 만난 이유다.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사진=전형찬
“축구가 제 밥벌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박항서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제일은행 축구팀에 입단하고(1981), 얼마 후 육군에 축구 선수로 입대, 3년을 복무했다. (1981~1984) 제대하니 그 사이 프로축구가 생겼다. 1983년 할렐루야, 유공 등 2개의 프로팀에 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 등 3개의 실업축구단이 결성한 수퍼리그가 흥행몰이를 하자 이듬해 럭키금성(현 서울 FC), 현대(현 울산 현대) 두 팀이 프로팀을 창단했다. 박항서는 럭키금성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프로선수로서는 1985년 우승, 주장으로 활약한 1986년 준우승 등의 업적이 있다. 1988년까지 딱 다섯 시즌만 뛰고 은퇴. 30대 초반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가정을 꾸렸으니 가장(家長)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럭키금성 코치로 들어갔다.
“축구가 제 밥벌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은퇴에 후회는 없어요. 지도자가 되어 보니까, 제가 얼마나 재능이 부족한 선수인지 알겠더라고요. 저는 생계형(生計型) 축구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으니, 축구가 제 천직이죠.”
프로팀 지도자, 2002년 월드컵 수석코치 등을 거쳐 2017년 10월 박항서는 베트남에 부임한다. 외국인 감독의 평균 수명이 8개월밖에 안 되던 곳에서 박항서는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2018), 아시안게임 축구 4위(2018), 동남아시안 게임 우승(2019, 2021),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스즈키컵) 우승(2018), AFC 아시안컵 8강(2019),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 예선 진출(2022) 등 혁혁한 업적을 세웠다. 그는 베트남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기쁨에 넘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베트남!’을 연호하면서, 박항서 호는 베트남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성취가 훌륭한 한국인, 베트남 코치 그리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만난 ‘행운의 결과’라고 말한다.
◇성공 요인
-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무엇입니까?
“첫째, 베트남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할 것. 둘째, 스탭들을 조직화하고 전문화한 것입니다.”
‘스포츠는 과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2002년 전까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죠. 의무팀, 피지컬 코치, 비디오 분석관 등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력이 꼭 필요한데, 베트남은 아직 그 수준까지는 다다르지 못했어요. 감독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구조였습니다. 전문가가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면 그 팀은 강해집니다. 신규 인력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추가로 들어가니까, 기존 인력을 활용하기로 했어요.”
베트남 코치 중 컴퓨터에 능숙한 인력에게 ‘당신은 코치 겸 분석관’이라고 했다. 대한축구협회 홍명보 당시 전무에게 지원을 요청, 대한축구협회 분석관이 베트남으로 날아와 2박 3일간 노하우를 전수해 주기도 했다. 베트남 체육부에는 전 종목 국가대표팀을 담당하는 의료팀이 있었다. ‘통일성·일관성이 중요하니 축구팀에는 늘 오시는 분이 고정으로 오면 좋겠다’고 했다. 새 인물이 오면 팀 사정을 알려주는 작업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 분이 4년째 대표팀과 함께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함께 한 최주영 의무팀장을 베트남 대표팀으로 초빙, 현장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인지하면, 임무 세분화가 가능합니다. 전문가를 전문가로 존중하고 대우하면, 모든 사람이 명확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팀을 위해 기여합니다. 시너지가 일어나요. 세밀하게 준비하면 그만큼 이길 확률이 높아집니다.
지금은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의 발전 과정과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경제 성장을 하면 보다 많은 전문인력을 대표팀에 지원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팀을 전문화·세분화해서 운영하는 것, 이 시스템을 남겨주는 것이 제가 베트남축구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프로팀과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언젠가, 누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후임 감독에게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솔선수범
박항서 감독은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강조한다. /사진=베트남축구협회
- 베트남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했다는 건 어떤 이야기입니까?
“2002년 히딩크 감독을 모시면서, ‘외국에 감독으로 나간다면 이런 점이 중요하겠구나’, 느낀 바가 있었어요. 베트남 코치들에게 ‘베트남축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대들이다. 나한테 맡기지 말고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으라’고 하죠.”
쌀국수는 베트남의 국민 음식이다. 하지만, 축구 선수들에겐 보다 고열량 음식이 필요하다. 박 감독은 ‘먹지 말라’고 하는 대신 베트남축구협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베트남 영양학 최고 권위자를 불러 강의를 부탁했다. 선수들은 그런 교육을 처음 받아본다고 했다.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이제는 선수들이 먼저 우유를 마시고 자발적으로 섬세하게 몸을 돌본다.
“처음엔 낮잠 문화도 이해 불가였어요. 그런데, 제가 겪어보니까 더울 땐 쉬는 것이 효율적이더군요. 지금은 저도 낮잠을 잡니다. 연습 시간을 늦추면 효율이 더 높아져요. 현지 문화를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선택입니다.”
박항서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최고 덕목 중 하나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이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죠. 선수단과 동화(同和)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부임 초에 선수들에겐 베트남 음식을 주고, 저에게는 한식, 스테이크 등을 주더군요. 저한테야 당연히 한식이 좋죠. 하지만, 선수들과 똑같은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안 보는 것 같지만, 선수들은 언제나 감독을 보고 있거든요. 제가 한식을 먹으면, 저와 선수들 사이에 조그만 심리적 벽이 생기죠. 그건 팀에 마이너스가 됩니다. 지금은 베트남 음식을 제가 좋아서 먹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이다!’
‘전문화, 세분화’ 전략은 선수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발적 의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박 감독이 활용하는 방안이 있다. ‘분임토의’다.
“대회 전에 30명 팀원을 세 그룹으로 나눕니다. 각 조(組)마다 스스로 조장을 뽑아서 토의를 하죠. ‘우리 팀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각자가 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등을 토의하도록 합니다. 합숙 전에 선수단이 다 모여서 조별로 토의 내용을 발표해요. 이렇게 하면, 선수단 모두가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게 되죠. 선수들 스스로가 책임감을 느끼고 의무를 이행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이다!’로 정리한 베트남 축구팀의 슬로건도 분임토의의 결과물이다. 2018년 중국에서 열린 AFC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이 승승장구하자 베트남 언론이 ‘베트남 정신이 살아난다!’고 했다.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 속의 거듭된 연장전, 연이은 연장전에 체력이 소진되었는데도 베트남은 기어이 승부차기로 상대를 꺾으며 결승전까지 내달렸다. 박 감독은 선수들이 자랑스러웠다.
“결승에 오르는 과정이 숱한 강대국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 베트남 역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정신이 뭐냐?’라고 묻고, ‘난 한국 사람이니 잘 모른다. 너희들이 알려 달라’고 했죠. 분임토의를 통해 선수들이 ‘첫째 단결심, 둘째 자존심, 셋째 영리함, 넷째 불굴의 투지’가 ‘베트남 정신’이라고 정리했어요. 이 네 가지는 축구와도 연관됩니다. 축구는 단체 경기라 단결심이 필요하고, 대표선수는 자존심이 있어야 하며, 경기 운영은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영리하게 해야 하니까요.”
박항서 감독은 선수들과의 토론을 통해 ‘베트남 정신’을 도출해 냈다. /사진=베트남축구협회
◇“2002년보다 戰力 더 낫다
- 2022년 월드컵, 한국팀 성적을 전망해 주십시오.
“결승까지도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만…. 2002년엔 유럽 리거가 안정환‧설기현 딱 둘이었죠. 지금은 손흥민을 비롯, 유럽 리그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활약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선수들의 능력과 경험인데, 우리 대표팀은 경쟁력이 충분해요. 대한축구협회의 지원도 흠잡을 데 없고, 벤투 감독의 역량과 네트워크도 세계 수준이라고 봅니다. 2002년과 비교하면 전력(戰力)이 더 나아요. 운이 따라준다면, 4강 가지 말란 법이 없죠. 또 하나, 우리에게는 손흥민이라는 탁월한 선수가 있으니까요.”
경기 결과에 따른 비판적인 기사와는 별개로, 얼마 전 마음고생을 했다는 보도도 궁금했다.
- 일부 국내 유튜버들이 베트남축구협회와 박 감독님 사이에 불화가 있다, 갈등이 생겼다,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온갖 얘기가 많았습니다. 진실은 뭡니까?
“갈등은 전혀 없고요, 협회와 저는 잘 소통하며 협조하고 있습니다. 일정 문제 등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다 사소한 것이지 심각한 문제는 전혀 없어요. 유튜버들이 자극적인 내용을 자꾸 올리시는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을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심지어는 한국말이 어색한 유튜버가 갈등설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내용 대부분이 사실무근이에요. 제 업무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면 문제가 많은 거죠.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제해줬으면 좋겠어요.”
- 앞으로 남은 목표나 꿈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단기적으로는 연말 미쓰비시컵(구 스즈키컵)에서 정상을 탈환하는 겁니다. 2018년 대회에서 10년 만의 우승해서 베트남 국민께 큰 기쁨을 드렸는데, 지난 대회 준결승에서 태국에게 져서 2연패(連霸)에 실패했잖아요? 이번에 빚을 갚아야죠. 장기적으로는, 저는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어떤 일을 맡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