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참패했는데 대권 선언…‘승부사’ YS에 분노 느꼈다 (9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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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은 두 차례 큰 선거가 있는 정치의 해였다. 나는 3월 총선에 일단 전념하면서 3당 합당의 기초를 단단히 하려 했다. 하지만 당 내부 사정은 한 지붕 세 가족의 신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내 분열과 갈등이 곳곳에서 터지고 상처가 깊어 갔다.
1991년 1월 11일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오른쪽)이 북아현동 자택에서 노재봉 총리서리 축하파티를 열었다. 왼쪽부터 노 총리서리, 김종필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 중앙포토
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은 149석을 얻었다. 과반수에서 한 석 모자랐다. 김대중(DJ)의 평민당(97석), 정주영의 국민당(31석)이 약진해 정치권은 재편됐다.
2년 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216석의 거대 여당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참패였다. 나의 신민주공화계도 크게 패했다. 개인적으로는 부여 선거구에서 승리해 7선 의원이 됐지만 나의 지역 기반이기도 한 대전·충남에서 대다수가 고배(苦杯)를 마셨다.
지역 유권자들로선 최고위원으로서 나의 위상과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투표했을 것이다. 총선 패배에 책임을 느낀 나는 당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청구동 집에서 칩거(蟄居)했다. 두문불출(杜門不出), 장고(長考)의 시간을 계속했다.
1992년 10월 12일 민자당의 김종필 대표(오른쪽)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영삼(YS) 대표 겸 대통령 후보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YS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노태우 대통령(9월 18일)에 이어 박태준 최고위원(10월 9일)이 탈당하면서 민정계 의원들이 연쇄 탈당할 조짐을 보일 때였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3월 29일. 김영삼(YS) 대표가 예고도 없이 불쑥 청구동 내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바로 전날 기습적인 기자회견을 열어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집에 있던 나는 황당함을 넘어 마음 한구석에 분노까지 느껴졌다. 집권당의 총선 패배에 누구보다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은 당 대표인 YS였다. 하지만 그의 안중에 총선 패배는 없는 듯했다.
YS 특유의 쟁점 전환, 판 뒤집기였다. 그는 총선책임론이 번지는 불리한 국면을 거꾸로 출마 선언을 함으로써 대선 정국으로 돌려버렸다. 굳이 좋게 말하자면 YS의 승부사 기질이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YS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칩거를 그만하시고 당사에 나와 주십시오”라며 나를 종용했다.
그러곤 이내 당내 대선후보 경선 문제를 꺼내며 “나를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지금 총선 패배의 책임을 느끼고 반성하고 있는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앞으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