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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2018년 11월 01일
【冶父】
這一問은 從甚處出來오
이 한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저번 시간에 공부한 내용중에 수보리는 일체의 중생들이 시끄럽게 날뛰어 머물지 않는 것이 마치 창 틈의 먼지와 같고, 요동하는 마음이 마치 바람처럼 날려서 생각이 계속해서 조금도 쉴 사이가 없음을 보았기에,
묻기를, 만일 수행을 하고자 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부 스님은 이 한 물음은 어느 곳에서 왔는가.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경계가 닥치면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했는지요,
우리가 매일 이야기 하지요 일일수행 점검표의 첫 번째 항목은 내가 본래부처임을 잊지 않았는가이고,
두 번째는 이 경계가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했는가 입니다.
이 경계는 자기 마음 즉 성품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근본자리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說誼】
法法이 虛融하야 無法可住요 心心이 寂滅하야 無心可降이니 今此住降二問은
從甚處出來오 又須菩提는 佛稱解空第一하시니 豈不知妄心이 本空하고
塵境이 本寂이리오 若果知得인댄 如何輕發此問來오 又問法에 法無可問이요
修道에 道無可修라 但向未發問時하야 着眼이니 何須更問住與未住와
降與未降이리오 如是着語한 意旨如何오 若明今日事하면 昧却本來身이니라
법과 법이 허융(虛融) 이 말은 빌허에 화합할융자를 써서, 원융(圓融)하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텅 비고 원용하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주하고 어디에 머물 것인가, 원융한 도리는 둘아닌 도리로 그 자리가 어디냐면 우리의 마음자리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 자리에 주해야 하면 되는 것입니다.
법은 가히 주할 것이 없고,왜냐하면 여기서 법이란 원융한 도리를 말함인데 이것은 이미 우리의 마음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마음을 가히 항복받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에게 해가 스님이 와서 마음이 괴롭다고 하니, 달마 스님이 해가 스님에게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면 편안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해가 스님이 괴로운 마음의 실체를 찾아보니 괴로운 마음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달마 스님이 해가 스님의 괴로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느니라고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적멸(寂滅 텅비어 고요한 것)한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것입니다.
물로 비유하면, 물이라는 것은 본래 적멸한 것인데 바람이 부니 물결이 일고 파도가 치는 것이지 바람이 불지만 않으면 언제나 적멸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욕팔풍의 바람만 불지 않으면 천연적으로 고요한 것이고, 고요하면 밝고 밝게 작용하고 잘 비추니 거기에 특별히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멸한 것이니 마음은 가히 항복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머물고 항복 받는다는 물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본래 가지고 있는 허융(虛融)하고 마음마음이 적멸(寂滅)한 그곳(본래면목,참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는 수보리를 부처님께서 해공(解空)제일이라고 일컬었으니 수보리가 어찌 허망한 마음이 본래 공하고 티끌인 경계가 본래 고요한 것임을 몰랐겠는가.
여러분들도 법문을 들어서 알고 있지요. 경전을 읊어서 알기는 아는데, 하물며 공의 도리를 가장 잘 아는 수보리가 몰랐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알았으면 어찌 경솔하게 이런 질문을 하였겠는가.
또는 법을 묻는다 하여도 법은 가히 물을 것이 없고, 도를 닦는다 하여도 도는 가히 닦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법을 얻는다 해도 얻을 것이 없고, 닦는다 해도 닦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얻을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얻을 것이 없어야 참으로 얻은 것이고,
머문바 없는곳에 머물러야 참으로 머문 것입니다.
이런 말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잘 못 들으면 말장난 같이 들리는데,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본래 얻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부족하다고 착하기 때문에 그 착각만 놓으면 본래 이미 얻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얻을 바 없는 것을 확연히 얻는 것이고, 이것을 보고 참으로 얻은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 주(住)한다고 해서, 머문바 없는 곳에 머물줄 알아야 한다고 하여 무주(無住,無住處)라고 말했고, 이것이 참으로 머무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떤 괴로운 경계가 닥쳐서 경계가 없어졌다면, 경계가 없어졌는데 또다른 괴로움이 생기거나 다른 무엇이 생겼나요 아닙니다. 그냥 없어진 것이고, 텅비어 고요한 것입니다.
이때 텅 비어 고요해 졌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괴로워해야 할 것인가요. 마치 이런 형국이지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것이 참으로 얻는 것이고,
머물 곳이 없는 것이 참으로 머무는 것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체 모든 곳에 머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 모든 곳에 머물지 않으면 뭐가 생길까요, 밝은 광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 말고 또다른 무엇을 찾으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형상(相)을 쫓아 뭔가 얻어져야 한다는 집착을 갖거든요, 그것이 착각이고 무명이고 망상이라는 것을 경에서는 끝없이 말씀을 합니다.
경에서는 이런 좋은 말을 하지만 우리는 좋은 말 같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말에대해 믿음과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공부를 하기는 했는데 한 것이 없고, 얻어진게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에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참으로 푹 쉬어진 그 마음은 허융(虛融)하고 적멸(寂滅)한 자리입니다.
그 가운데 밝고 밝게 빛나는 지혜가 이미 생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광명이 나타나길 바라는데, 지혜가 광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으로 찾아야만 뭔가 직성이 풀리거든요, 뭔가 보아고 알아져야하고, 누구를 보면 전생이 보이는 등의 능력이 생겨야 공부가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소인배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건 참다운 지혜가 아닙니다. 그냥 쉬어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말은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마음이 고요하게 쉬어지는 것으로, 그러면 대상을 비출 때 지혜롭게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 즉 참으로 공하면 지혜의 작용이 묘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즉 머문바 없는 곳에 머물줄 알면,
경계가 닥쳤을 때 저절로 한 생각이 날 것이고, 이에따라 작용을 하는데, 이 작용이 바로 지혜의 작용인 것입니다.
마치 거울이 밝으면 밝게 비출 것이고, 어떤 것이 와도 티끌없이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그 큰 거울이 티끌 하나 없으면 세상을 얼마나 밝게 비추겠습니까, 이와 같이 밝게 비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정사(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등이 여여(如如)하게 돌아가는 것이 지해 작용 입니다.
또 그가 만일 법을 묻는다 해도 법은 가히 물을 것이 없고, 도를 닦는다 하여도 도는 가히 닦을 것이 없으니,
불교는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다만 묻기 전의 소식을 향하여 눈을 향해야(착안 着眼) 할 것이다.
즉 그 물음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應云何住 云何降伏基心)이라는 물음이 나온 그곳이 어디냐 이말입니다. 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주와 주하지 않음(주여미주 住與未住)과 항복과 항복받지 않음(항여미항 降與未降)을 물었는가.
이와 같이 말을 붙인 뜻이 무엇인가,
만일 오늘일을 밝히려하면 (약명금일사若明今日事)하면 본래의 몸(本來身 본래면목)은 매(昧 어리석을매)하게 되느니라.
이 말은 오늘일은 지금현재 여러분이 움직이는 작용이고, 본래신은 여러분을 작용하게 하는 본체 즉 본래의 몸입니다.
그런데 오늘일을 밝히려하면 거기에 머물게 되고 그러면 위에서 말한 머무는바 없이 머무는 것이 참으로 머무는 것이라 했는데, 오늘일을 밝히려고 여기에 머물면 거기에 대꾸한 본래신이 매(昧)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이 실체(實體)인줄 알고 이것만이 진짜인줄 안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몸(本來身,참 성품자리,본래면목)은 매(昧)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계추가 왔다갔다 하며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다가 그것을 놓고 저기에 가면 거기서 놓고, 그래서 항상 본체에도 머물지 말고 작용에도 머물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중도법행(中道法行)입니다.
중도가 되면 지혜가 생기고, 중도행을 해야 깨달음이 생기는 것이고, 체험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두 개 즉 본체와 작용의 양변을 놓는 이야기를 항상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밝음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왜 안하느냐 하면, 양변을 놓으면 밝음이 나오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체험해야할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놓아라, 쉬어라, 죽여라등 계속 이야기 하는데 나중에보면 아무것도 없지요, 그럼 뭡니까, 그게 깨달음이고,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도가 깨달음이기는 한데, 중도로서 중도행을 해야 깨달음이 생기고, 이 두개가 합쳐져야 거기서 밝음이 나와서 상대성을 떠나야 거기서 절대의 광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중도(中道)와 중도행(中道行)”이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야 합니다.
이것과 저것이 의지해 있는 그것, 머무는 곳, 나온 곳은 서로 의지해 있습니다.
그럼 너와 내가 의지해 있는 꼭지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점은 너와 내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 점은 너와 나를 초월한 자리로, 거기가 바로 성품이고 여러분의 본래면목입니다.
거기를 여러분의 현재의식이 비춰서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거기서 체험이 생기고 이로써 아 그렇구나 하고 진리(연기법,불이법)를 보게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론으로(알음알이)아는 것은 지식일 뿐인데,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별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직접 맛을 보듯이 체험을 해서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생각되야 여러분의 삶이 한 처원 높아지는 것이고, 그래야 여래의 가문에 태어났다(생재여래가 生在如來家)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뱃속에서 꿈틀꿈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금강경이 선종의 무슨 책이라고 하지요? 맞아요 소의경전(所依經典), 똑똑한 여러분이 곧 나입니다. 나가 혼자가 없어요, 나라는게 고정되지 않아요, 여러분이 똑똑하니가 소의경전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둘이냐 이거지요, 여러분이 말하고 내가 듣고,
내가 말하고 여러분이 듣는 그 가운데, 그 말하고 듣는 그 자리가 하나에 의지해서 붙어있잖아요, 붙어있는 꼭지점, 거기를 여러분이 항상 비추어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보고 깨달음이라고 하고, 체험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아니까 믿어지게 되고, 어떤 경계가 와도 확연히 체험하여 맛을 보게됩니다.
무릎을 치며 그렇구나, 대연(大緣)크게 그렇구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대연입니다.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하신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법문에 나온 말을 듣고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믿고, 분명함을 알면 부처님 제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생재여래가(生在如來家)라.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冶父】
你喜我不喜요 君悲我不悲라 鴈思飛塞北하고 燕憶舊巢歸로다 秋月春花無限意를
箇中에 只許自家知니라
네가 기뻐하여도 나는 기쁘지 않고 그대가 슬퍼하여도 나는 슬프지 아니하다.
여기서 너는 기뻐하여도 나는 기쁘지 않다, 너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다는 것으로 여기서 너는 뭐고 나는 뭐냐, 그 자리는 슬프고 기쁜 이 양변에 의지해 있는, 너가 있고 내가 있는 그 지점을 이야기 할 때, 그 지점은 청정해서 물들지 않는 자리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뒤에 설의(說誼)에서 자세히 말할 것입니다.
기러기는 새북(塞北)에 날기를 생각하는데 제비는 옛집에 돌아가기만 생각하는구나, 이 말은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상대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업식들이 뭘까요, 그 모습을 보면서 상대를 놓고 여러분이 뭘 느끼냐 이겁니다.
그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성스러움의 맛을 보지요, 이것은 한량없는 자신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한량없는 자기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게 없으면 한량없는 자기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이 한량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한량없는 자기를 맛보는 것으로, 기쁨, 슬픔, 좋고 나쁨등의 맛을 보잖아요.
이것이 진리이고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며, 진리를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그걸 버리고 진리가 따로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괴롭다고 싫어하고, 좋다고 좋은데 빠지지 말고, 맛을 보고 알 뿐인 것입니다.
지혜가 점점 풍부해지고 그러므로 지혜가 증장되면서 자기가 자기를 체험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가기를 항상 생각하고, 여러분도 그러잖아요 부모를 항상 생각하고 명절되면 들떠서 괴로움도 없이 열심히 가지요, 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사람을 향해서 온 정열을 바치고, 그래서 무슨 맛을 보냐면 성스러운 맛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혼자서는 맛볼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는 도통 그 맛을 볼 수 없지요, 그러니 그 대상을놓고 내가 맛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뭐냐 이겁니다. 그래서 효도를하고, 사랑하고, 충성하는 등 이런 것이 도닦는 일의 모습입니다.
매일 배신이나 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도를 닦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대의 모습이고, 항상 달라지게 되어있고, 분별입니다.
충성할줄 알고, 효도할 줄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것을 놓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가지면 충성,효도,사랑 어느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이것을 통해서 나가 놓아지는 것이고, 나를 놓으면 내가 본래 없는 나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참나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 광대무변한 나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량없는 자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부처이고 이미 여러분 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가기를 생각하고 제비는 옛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생각하는 구나, 라는 말은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모든 근원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가을 달과 봄 꽃의 한량없는 뜻, 즉 가을에는 밝은 달이 뜨고, 봄에는 꽃이 항상 피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그 한량없는 뜻은, 조금전에 예기한 사랑하고 효도하고 충성하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이 하고자 하고 옳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살고싶어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배신하고, 속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 때문에 배신고 순수함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 달과 봄 꽃의 한량없는 뜻은 오직 자가(自家)만이 아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說誼】
你與我와 君與我는 本分人이 向今時人하야 稱이니 你能住降하면 心生喜動하고
未能住降하면 心生悲憂어니와 我此世界는 本自淸平하야 理亂이 俱亡이니
何傷何喜리오 如雁之思塞北과 燕之憶舊巢어니 豈以悲喜로 爲心哉아
只有一段空이 來去自由耳라 以至春生夏長하며 秋收冬藏과 月圓月缺하며
花開花落히 凡有消長盈虛者가 莫不各有無窮無盡之意存焉하니 此는
父不得而傳이며 師不得而授라 各自當人이 自肯自悟하야사 始得다
너와 나, 그대와 나라는 것은 본분(本分)의 사람이 지금의 사람을 대하여 일컫는 말이다.
본분의 사람은 본래인(本體)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今時)작용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옳다 그르다 분별하고 사는 이것이 금시인(今時人 지금사람)으로 본분인이 지금 사람에 대하여 일컫는 것이다.
무엇이라 했느냐면,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고,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능히 주하고 항복하면 마음이 기뻐 움직이고, 그를 주하고 항복받지 못하여 어긋나고 어긋나면 마음이 슬퍼하고 근심을 일으키지만, 나의 이 세계는, 청평(淸平)하여서,즉 청정하고 평등하여서 다스림과 어지러움이 함께 없거늘, 좋고 나쁘고, 슬퍼하고 기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분자리 이지요,
즉 상대성에 의지한 그 자리(그지점)을 항상 생각해 보세요,그건 본체자리입니다.
즉 그 자리를 알고 있으면, 그 자리에서 울고 웃는 작용이 나왔을 뿐입니다.
그러면 울때는 같이 울고, 웃을때는 같이 웃으면서 지혜가 생기니,
울고, 웃으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게 없으면 목석이지요, 그러니까 작용이 없어는 안됩니다.
앞에서 중도를 이야기 하면서 본체에 머물러도 안되고 작용에 머물러도 안된다고 했지요, 본체에 있는가 싶으면 작용을 포함하고 있고, 작용에 머물러 있는가 싶으면 작용속에 이미 본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바로 지혜이고 중도입니다. 이것을 중도정견(中道正見)이라 하고 중도정견이 서면 체험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상심하고 무엇을 기뻐하겠는가.
다만 기러기가 새북(塞北:만리장성 이북지역)에 날아가기를 생각하고 제비가 옛 집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듯 할 뿐이니,
그러니까 그것이 다 명절에는 고향에 가고, 그곳에 가서 오랜만에 만나서 갈등이 생길수도 있고, 갈등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자기가 지혜 있는 만큼 작용할 것 아니겠어요,어쩔수 없이 지혜가 없으면 없는 상태로 작용하겠지요,
그런데 상대방이 점점 얇밉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 저것이 부처님이 나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구나 하고 공부로 받아들여 내려놓고, 너와 내가 비춰진 그 자리를 함께 비춰 보면 미움이 덜할 것이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까 저것도 내모습이야 하고 알면 크던 미움도 많이 줄어들고, 그러면 마음이 쉬어지고, 점점점 그러다 보면 어떤 것이 밖에서 난리법석을 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즉 부동(不動)해지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은 본래 부동한 자리거든요.
자기의 마음은 본래 부동한 자리이기 때문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부동한 자리는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을게 없고, 얻었다 하더라도 얻은게 아닙니다.
어찌 슬프과 기쁨으로 마음을 쓰겠는가, 다만 일단의 공이 있어서 오고 가는 것이 자유러울 뿐이다.
즉 공(空)하기 때문에 오고가는 것이 자유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봄에는 나고 여름에는 장성하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깊이 저장하며,
여러분의 생로병사도 봄에는 태어나고 여름에는 장성하고 가을에는 늙어가고 겨울에는 죽는 것이지요, 생로병사는 다 옳은 것으로, 생은 생대로 옳고, 봄은 봄대로 옳고, 여름은 여름대로 옳고, 가을은 가을대로 옳고, 겨울은 겨울대로 옳지요, 다 옳은 것이니 진리의 작용입니다.
이걸 알게되면 안죽으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고, 죽을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그때그때 다 옳은 것입니다.
요새 노보살림들 몇 분이 아파서 안 보이는데 생로병사거든요, 그런데 마음쓰는 것을 보면 여여(如如)하게 잘 쓰십니다. 힘이 들어도 내색은 안하시고 여여하게 수행의 길을 가고계십니다. 저의 법문을 녹음한 것을 가져다 드리면 듣는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어느정도 맏아들이니까 그만큼 여여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한살이라도 젊은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그 선배보다 더 수승한 후배가 될 것 아닙니까,
그게 내모습 이잖아요, 눈깜짝하면 그모습이 됩니다. 그럴 때 여여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되려면 지금 부지런히 공부해야 죽을때도 여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달이 둥글기도 하고 기울기도 하며 꽃이 피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함과 같아서, 무릇 소장(소장消長)과 영허(盈虛)가 있는 것은 각기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뜻을 가지지 않는 것이 없다.
여기서 소장(消長)은 쇠하여 사라지기도 하고 성하여 자라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허(盈虛)는 찰영자에 빌허자이니 가득 차거나 텅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꽃이 피고 떨어지는 일과 달이차고 없어지는 것을, 영허와 소장에 비유한 것으로, 여러분이 잘살기도 하고 못살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하고 좋기도하고, 끝없이 변해가는데, 다 있는 것은 각기 무궁무진한 뜻을 갖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닥치는 일체 모든 경계가 무궁무진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부 스님이 가을 달과 봄 꽃의 한량없는 뜻을 그 가운데 오직 자기 스스로 알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서는 각기 모든 것이(경계)무궁무진한 뜻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즉 모든 것이 진리의 나툼이라는 뜻이고,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것이며, 여러분 마음 가운데서 악마같은 마음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고 다시 내려놓고 필요할 때 쓸 것입니다.
만약 독한 경계가 오면, 그 독한 경계에 대해서 전에 내려놓았던 악마같은 마음을 약으로 쓸것입니다.
즉 악마를 건지려면 악마보다 더독한 놈이 나와서 그것을 제압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걸 죽이기 위해서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그걸 살리기 위해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가운데 독한 마음이 나오더라도 이게 쓸모가 있으니까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내려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이 나가서 대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독한 마음을 악한데 그걸 쓰고, 경찰은 똑같은 업식인데 그것을 모두를 위해서 좋은데 씁니다.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은 버리려고 하는 순간 버려지지 않아요, 그게바로 집착이 되거든요,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집착입니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고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아주 수승한 지혜가 됩니다. 그러니 놓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헤아릴수 없는 모든 경계(번뇌)가 무궁무진한 뜻을 가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것입니다.
이는 아비가 자식에게 전해 주지 못하는 도리이며 스승이 제자에게 주지 못하는 소식이어서 각자 당인(當人 당사자)이 스스로 긍정하고 깨달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스스로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렇게 마음을 쓰면 그 마음에 맞춰서 응해주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니 자기 혼자의 뜻으로 되는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명훈가피(冥勳加被)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데 부처님의 힘이 보테지는 것이지요,
자기 힘만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루어지든요, 그래서 여러분 생각에는 우연히 됬나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마음쓰는대로 그것에 의지해서 일체 제불(諸佛)이 응해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한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해주신것도 아닙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손바닥에서 소리가 나듯이 이렇게 이루어짐니다. 이것도 연기법이지요, 그러니 내가 한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해주셨다는 생각도 놓아라 이말입니다.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設하야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나니 汝今諦請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佛言 善哉善哉 須菩提)여, 선재선재란 착하고 착하다는 말이고, 너의 말함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고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나니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하여 말하겠다. 선남자와 선녀인으로서 아욕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발심한 이는 응당 이와 같이 주하여야 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말하기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말씀을 잘 듣고자 원합니다. 유연세존하 원요욕문(唯然世尊하 願樂欲聞) 하노이다.
【說誼】
當爲汝說이여 欲說這介事요 願樂欲聞이여 欲聞這介事로다
“마땅히 너를 위하여 말하겠다.고 하셨으니, 이 일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요 “원컨대 듣고자 합니다. 하였으니. 이 일을 듣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이 일이란 본래면목의 일(본질자리)을 말합니다.
【六祖】
是는 佛이 讚歎須菩提가 善得我心하며 善知我意也니라 佛이 欲說法에
常先戒勅하사 令諸聽者로 一心靜黙일새 故로 云하사대汝今諦聽하라
吾當爲說이라하시니라 阿之言은 無요 耨多羅之言은 上이요 三之言은 正이요
藐之言은 徧이요 菩提之言은 知니 無者는 無諸垢染이요 上者는 三界無能比요
正者는 正見也요 徧者는 一切智也요 知者는 知一切有情이 皆有佛性하야
但能修行하면 盡得成佛이니라 佛者는 卽是無上淸淨般若波羅蜜也니 是以로
一切善男子善女人이 若欲修行인댄 應知無上菩提道하며
應知無上淸淨般若波羅蜜多法하야 以此로 降伏其心이니라 唯然者는 應諾之辭요
願樂者는 願佛이 廣說하사 令中下根機로 盡得開悟니 樂者는 樂聞深法이요
欲聞者는 渴仰慈誨也니라
이것은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내 마음을 잘 얻었고 내 뜻을 잘 알았음을 찬탄한 것이다.
선재선재라 함은 찬탄을 크게 했다는 말이거든요, 부처님이 법문을 말씀하실 적에 여러 듣는 자들이 한 마음으로 고요하고 잠잠하게 하신다.
그러기에 네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내가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당위여설 當爲如說)고 항상 계칙(戒勅)하였다.
계칙이란 계로써 준칙을 삼았다. 즉 이렇게 이야기 했다는 말입니다.
이부분에 대해서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나온 말인데 들어보세요, 들을때는 눈을 마주치고 들어야 합니다. 일심(一心)으로 들으세요,
법을 듣는자는 단정하게 우러르는 것이요, 즉 단정하고 눈을 깜밖거리지도 않고, 마치 목마른자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일심으로 말뜻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마음으로 슬퍼하고 기뻐하며, 이같이 감동하는 일을 위하여 가히 설한다.라고 했습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용수(龍樹)보살이 지은 것으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입니다. 줄여서 지도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기가 쉽지 않지요, 여기서 이야기 하듯이 단정하고 눈한번 깜박하지 않고 우러러 처다보고 목마른자가 물을 마시듯이 일념으로, 말의 뜻 속으로 들어가야하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듣고, 그리고 감동해서 울고 기뻐서 웃고, 이런 마음이 되면 공부는 저절로 될 수밖에 없고, 온통 자기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참선을 하고 백팔배를 하고 삼천배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상태에서는 따로 정진이 필요할까요?
그게 안되니까, 참선하고, 좌선하고, 화두를 들고, 삼천배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게 내입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육조스님의 말씀이시고, 함허득통 스님의 말씀이시고, 야부 스님의 말씀이시고, 종경 스님의 말씀이시고, 부처님의 말씀으로 모두 깨달은 대선지식의 말씀이니 믿고 들어야 겠지요, 그러면 자기에게 큰 선지식들은 부모와 같습니다.
그러니 항상 이익되게 말하고 손해되는 말은 할 까닭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손해되게 절대 안하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인들의 일이고 그래서 이름을 성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어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안믿어 지는 것은 업식이 두터우니까 잘 안믿어지는 겁니다.
공부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자기 업식 때문에 잘 안되서 어려운 겁니다.
그렇게 업식을 녹이는 공부를 하려면 부지런히 듣기 위해서 자주 나와야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눈으로 보여드리고 귀로 들어드리는등, 여러분은 이 몸과 마음속에 있는 중생들에게 내가 한생각에 부모가 되어서 나의 중생들에게 끊임없이 보여드리고 들려드려야 합니다.
선재동자가 일만팔천 대중을 이끌었다고 하지요, 그 대중이 다 이 몸속에 있는 중생들입니다. 선지식들에게 가서 몸으로 행하면서 보여주고 들려준 것입니다.
가끔 어린애들 데리고오는 사람들은 자기는 인사하지 않고 애들에게만 스님에게 절해 라고 하면은 네가 해라 이렇게 합니다.
빨리와서 삼배하시오, 자기들이 하면 아이들은 저절로 보고 배웁니다.
내 한생각의 부모가 여기 일체 중생에게 모범을 보여야 이 중생들이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밝아지니까 내안의 중생 전체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형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온통 마음쓰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책으로 돌아가면 아(阿)라는 말은 없다는 뜻이요, 욕다라(耨多羅)라는 말은 위라는 뜻이니, 이보다 더 위는 없다는 말이다.
삼(三)이라는 말은 바르다는 뜻이요, 먁(藐)이라는 말은 두루한다는 뜻이고, 바르고 보편(普遍)한 진리를 말한 것이다.
다음의 삼(三)은 앞의 삼과 같이 바르다는 뜻이요, 보리(菩提)는 안다는 뜻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를 말하는데,
없다(無)는 것은 더러움 즉 온갖 때(垢 때구)의 더러움이 없다는 말이고, 위(上)라고 하는 것은 삼계에서 가장 높아 비교할자가 없음을 뜻하고, 정((正))은 바르다고 하는 것으로 바른지견(正見)을 뜻하고 ,두루함을 뜻하는 변(遍)은 일체 모든 지혜(一切智)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 일체지는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부처될 성품이 있기에 다만 수행을 하면 모두가 부처를 이룰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부처라 함은 위가 없이 청정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이로써 모든 선남자 선녀인이 만일 수행을 하고자 하면 응당 가장 높은 보리의 도를 알아야 하며, 응당 가장 높아 청정한 반야바라밀법을 알아서 이로써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유연(唯然)세존아, 할 때 유연이라함은 응낙하는 말이요, 원요(願樂)라 함은 부처님이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중하(中下)근기의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다 얻게 함이요,
즐긴다(욕 樂) 함은 심오한 법 듣기를 즐겨함이오, 듣고자 한다 함은 자비하신 가르침을 갈앙(渴仰 목마르게 바라다. 불도를 깊이 숭상함)하는 것이다.
【冶父】
往往事因叮囑生이로다
일은 가끔 정녕한 부촉으로 인(因)하여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정녕(丁寧)이란 자세한 이란 뜻입니다.
【說誼】
只這介事는 要因叮囑而現이로다
이 일이란 것은 설법입니다. 깨달은 설법,
즉 설법이 나오면 깨달음이지요, 법문을 하니까 깨달아지는 것이니까요,
이 일은 가끔 자세한 부촉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 것은 자세한 부촉(付囑)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안에 있는 부처님과 법을 설하는 부처님을 따로 생각하거든요, 이 것이 큰 병입니다.
그 병을 어떻게든 없어야 하는데, 부처라는 것은 여러분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체험하고 깨달아지는 것이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입니다.
여기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도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입니다.
여러분이 뭔가 마음속에 얻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지요, 그럼 누가 얻어지게하고 깨달아지게 했을까요?
자기속의 부처가 얻어지게하고 깨달아지게 한 것입니다.
항상 둘로 보는 습성이 너무 완연(完然 흠이없이 완전하다)한 겁니다.
그러니까 깨달아 들어가기가 어렵고, 체험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 이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미묘하게 콕 집어서 분별해 버리거든요, 이게 우리들 공부의 큰 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앞에서 부촉(付囑)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부촉이 무엇에 쓰였느냐면 선부촉(善付囑)한다고 하면 근기가 미숙한 보살을 상대로하여 설함이니 혹 물러설까 두려워하여 지혜로운 사람에게 붙여주는 것이 부촉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끔 가끔의 일이 자세하게 부촉함으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경계가 닥쳤을 때 그 경계를 나를 위해서 상대하면 안됩니다.
그 자리의 중생들을 위해서, 여러분이 경계를 대적하는 마음이, 저기서 악하게 대하면 나도 똑같이 악하게 대처해서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악하게 대응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누구에게 붙여주나요, 미성숙한 보살에게 법문을 붙여주어서, 이 경계를 대처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을 보고 부촉이라 하는 것입니다.
즉 미성숙한 보살에게 붙여주는 것이지요, 법문에 의지해서 해석을 잘해주는 것입니다.
경계가 닥치면 업식대로 막 행하지 말고 들은 법문에 의지해서 대처해 보십시오,
그래서 야부 스님은 일은 자세한 부촉으로 인(因)하여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왜 자세하냐면 막연하지 않거든요, 구체적으로 들어나니까요, 이때 법문에 의지해서 잘 대처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게 부촉이 되거든요,
뭐가 일어나느냐면 설법(깨달음)입니다. 즉 자기속에 있는 부처로부터 법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깥에 있는 경계를 잘 해석 하면 이것에 의지해서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참부처가 법문을 설해줍니다.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달음이 생깁니다.
잘 보세요 너무나도 잘 써놨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기막히게 써놨을까요,
이게 바로 위에서 말하는 이 일입니다.
그래서 설의에서도 똑같은 말을 설명도 안하고 말했습니다.
【冶父】
七手八脚이요 神頭鬼面이라 棒打不開요 刀割不斷이라 閻浮踔躑幾千廻요
頭頭不離空王殿이로다
칠수팔각(七手八脚)이요 신두괴면(神頭鬼面)이라, 손이 일곱에 귀신의 머리와 얼굴이어서, 이 말은 손이 일곱에 다리가 여덟이니까 바로 여러분을 일컫는 것입니다.
자식이 오면 어머니로서 너무도 작용을 잘하지요, 그리고 옆에서 남편이 여보하고 부르면 찰나에 반응을 하고 아내로서 작용합니다, 신통이 자재하고, 여기와서는 청신녀로서, 다른곳에 가면은 그곳에 가서도 잘 반응합니다.
그러니 칠수팔각이요 신두귀면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악했다 선했다, 성스러웠다 속스러웠다, 순간순간 얼굴이 바뀌잖아요, 이게바로 신두귀면인데 어떻게 이렇게 바뀔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그래서 칠수팔각(七手八脚)이요, 신두귀면(神頭鬼面)신의 머리에 귀신의 얼굴을 이미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을 다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봉타불개(棒打不開) 몽둥이로 쳐도 무너지지 않음이요, 도할부단(刀割不斷)이요 칼로 베어도 잘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참 성품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자재 합니다.
그리고 염부탁척기천회(閻浮踔躑幾千廻)요, 염부제(閻浮提 사바세계)에 머뭇거리기를(척 躑:머뭇거릴척) 수없이 죽고 살고를 몇천번(閻浮踔躑幾千廻) 입니까?
사실 죽고 나고 또 젊게 나올거니까 걱정할 것도 없어요, 믿는 것은 오직 내자성의 부처가 알아서 나를 잘 끌고갈 것을 믿으면, 그 믿음은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항상 염부제에 머뭇거리를 몇 천 번이었던가? 사바세계에 여기서 나고 저기서 나는 것이 몇천 번 이었는가라고 했습니다.
낱낱이(頭頭) 공왕전(空王殿 부처님 전각)의 전당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