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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법문>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온다. 아름답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와 캐롤송은 타종교인들도 행복해지게 만든다.
1. 신을 찬양하는 수행법
교회나 성당의 수행법은 ‘신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모하며, 열광한다.
그들은 그런 ‘신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리워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오늘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 그러나 불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해 보면 그러한 기도법은 ‘無我’속에 하나님을 담는 행위이다.)
교회나 성당의 에너지는 그래서 밝고, 성스럽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들도 그 에너지와 더불어 좋게 변해간다.
따라서 교회나 성당에서 신을 찬양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 속에 품은 ‘신이 되어간다’.
그것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成佛한다’는 뜻인데, 성서의 교리는 그러한 법을 부정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신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불교교리상으로 그들의 ‘신’은 ‘成佛’하신 분이고,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교리와 불교교리가 명확하게 달라지게 하는 부분이다.)
그 안에서 ‘신격화 된’ 수많은 사람들은 ‘신’이 아니다. (성서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SAINT; ST. ;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Santa라고 부른다. ‘成’이 아니고 ‘性<心〸生 : 마음으로 태어난?의 뜻이면 필자의 법명에도 들어있다.>이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에도 불보살을 찬탄하고 경외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교회나 성당만큼 그 찬양, 찬송의 에너지가 열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 나도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하다.
부처님께서 ‘중도’수행을 하라고 하셔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무당’은 무엇인가?
무당은 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며 굿을 전문으로 하는 사제자(司祭者)를 의미한다.
(필자는 서양문화에서 온 ‘목사’는 동양에서의 ‘무당’이라고 본다.)
불교는 ‘성불’을 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종교이지, ‘신’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
(물론 불보살을 찬탄하는 일은 ‘선업’을 쌓는 일이지만, 불보살은 ‘신’이 아니다. 절에 있는 ‘신장들’, 예를 들면 산신, 칠성신, 신중신, 화엄신 등은 중국의 불교학자들이 불교 수용 초기에 불교교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격의(格義 : 불교교리를 널리 이해시키기 위해서 유교·도교 등 중국 고유의 사상에서 비슷한 관념이나 용어를 빌렸던 문화)불교에서 온 것일 뿐 순수 불교라고 볼 수 없다.)
2. 귀신문화의 유래
‘좀비’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말한다. 이 외에도 전 셰계적으로 미라, 강시, 유령, 드라큘라 등 초자연적인 귀신문화가 존재한다. 또한 이러한 귀신복장을 하고 즐기는 ‘할로윈’은 현대사회에서 즐거운 축제문화로 번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귀신문화’는 어디서 왔는지 짚어보자.
부처님의 ‘열반’과 예수의 ‘부활’을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온다.
‘부활’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과 육신에 일시적으로 생명을 되돌려 주시는 ‘하느님의 기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한 사람들의 마음이 현대에 와서 ‘귀신문화’로 바뀐 것이다.(불교에서는 이 원인을 ‘집착심’이라고 본다. 일례로 2009년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사망 후 관 뚜껑이 덮이기 전의 모습을 전국방송을 통해서 공개했다. 하느님이 기적으로 ‘부활’을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반면, 불교 수행승등은 ‘부정관’을 하며 육신에 대한 ‘무상성’을 잘 알아차리고, 장례는 ‘화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의 죽음은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한다. 성서에서처럼 한 번 사망한 육신은 부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승의 ’집착‘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행복한 열반이라고 말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부활'이 아닌, '윤회(輪迴)'라는 용어를 쓴다. 이는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업에 따라 영혼이 새로운 생명체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태어나기까지 500생애의 윤회과정을 거쳤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혹은 ’나고 죽음‘은 ’고통‘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열반상‘은 매우 유명하다. 중국의 황제들이 따라할 만큼 편안한 죽음의 자세이다. (실제로 중국황제들 중에는 부처님처럼 신하들이 보는 가운데, 와상으로 누워서 죽은 분들도 계시다.)
3. 현대의 추모문화
부처님오신 날은 아기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크리스마스 역시 아기예수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날이다.
’제사‘는 죽은 사람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문화이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을 더 이상 기념하지 않는다. 돌아가신 날을 기억했다가 다례를 모신다.
’잘 죽었다‘는 의미인가?
우리는 죽음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필자는 ’문재인‘대통령과 ’세월호‘참사에 대한 추모이야기로 이야기를 확장해 볼까 한다.
문재인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대통령에 당성되기 전, 한 일 중에 대표적인 일은 ’노무현의 죽음‘과 ’세월호‘를 추모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노란리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뺏지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달고 다닐정도로 그 추모문화는 대단했다.
1) 문재인 대통령의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의 의미
박근헤는 박정희의 딸이었기 때문에 고종황제 이하 왕권이 끊긴 우리나라의 보기 드물게 혈연관계로 인해 정권을 계승한 ’공주‘였다.
그리고 흑인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나, 여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던 미국보다 먼저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문재인의 촛불’혁명‘으로 아쉽게도 ’하야‘를 하였다. 이 일에 우리나라의 ’왕권‘을 끊어놓은 자들의 ’음모‘내지는 일본 천황이나 북한 김정은 정권의 ’질투‘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일본 천황이 어제 뉴스에 나와서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언급을 했다. 이것이 자신이 우리민족이라는 것을 앞세워, 또 다시 ‘지배’를 하고자 하는 ‘노림수’가 아닌가?)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권 당시 노무현의 측근으로서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한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중을 이끌면서 대권에 도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재인은 노무현과 혈연관계가 아닌, ’우정‘과 ’충신‘관계로서 그를 승계하게 되었고, 많은 대중의 지지와 인정을 받았다.
이것은 혈연관계로 인한 왕권이 없어진 21세기 우리나라 정권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본다.
2) 문재인 대통령의 세월호 추모의 의미
세월호는 한 날 한 시에 ’단원고‘라는 한 집단이 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감춘 ’참사‘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꽤 오랫동안 추모열기가 이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북한 김정은 삼대의 ’핵무기‘도 그런 의도(한 날 한시에 모든 사람들을 끝낼 목적)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렇게 중요하게 되지 않았을까?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않은 ’종교‘는 없고, 사람이 죽은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며, 죽어보지 않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늘 ’죽음‘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행복한 죽음‘ 꿈꾼다. 그리고 어떻게 죽고 싶은 지 ’영화‘나 실제로 ’죽은사람‘을 추모하면서 죽음을 마음 속에 그린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망자가 타고가는 배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부르며, 세월(세월이라는 이름)호가‘배’를 타고 가다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의미를 두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세월호‘추모는 요절한 아이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도 너희들처럼 그렇게(‘빨리’가 아니고 ‘사랑’받으면서) 가고 싶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추모기간이 길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5년이상 계속되었던 세월호 추모를 대한민국국민의 ’생전 예수재‘라고 부르고 싶다.^^(반대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그래서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끔찍하게 사망한 사례는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빨리 잊고 싶어하고, 추모기간이 짧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죽음으로 간다.
(이 사실을 몰랐거나, 기도하고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잘 죽기 위해서‘기도하고 수행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월호‘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죽음의 공포는 고작 20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성장기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사색은 어른들보다 길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20분‘동안 죽음을 생각했고, 그리고 죽었다.
(그들 부모들의 절규 속에는 자기들보다 이렇게 쉽게 죽는 아이들에 대한 시샘도 섞여있으리라고 본다. 그만큼 그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愛別離苦‘는 부처님께서 말한 8가지 고통 중의 한 가지이다. 세월호의 죽음에는 ’사랑‘도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처럼 그렇게 추모의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물 안에 들어가면, 호흡이 멈추기까지 20분정도 걸린다. 그래서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20분안에 모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고통없이 죽었다.
그들은 죽으러 간 것이 아니라, 즐겁게 수학여행을 즐기러 간 것이었고, 죽을 줄 몰랐다. 그리고 죽었다. 그리고 다른 죽음들보다 고통의 시간이 짧았다. 늙고 병들어서 죽음에 대해서 지겨울만큼 생각하다가 죽은 게 아니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했다.
그리고 그 안에 문재인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려면, 문재인처럼 이러한 추모의 문화를 잘 이해해야 하며, 그들과 합류해야 한다.
또한 ’무당(신을 섬기는)‘문화는 불교가 아니며, ’귀신문화‘는 기독교 성서의 ’부활‘에서 온 것이다.
성경보다 500년 앞선 불경(우리나라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불경의 하나임)의 교리가 더 상세하고 우수하다.
※ 참고
<다례를 모시는 의미>
‘보시’로 옮긴 원어는 yaňňa(제사)인데 문맥에 따라 보시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제사 자체가 신들에게 공물을 보시하는 것이며 제사에 동참하는 사제나 여러 사람들에게도 보시를 하기 때문입니다.
(천도재 할 때 ‘재’와 부모조상한테 지내는 ‘제’는 좀 다릅니다.)
재(齋)는 재계할 재자(字)로, ‘공경하다, 엄숙하다, 공손하고 삼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祭)는 제사 제자로, ‘제사지내다, 사귀다, 사람과 신이 서로 접하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교《능엄경》에 따르면, 제사를 의미하는 ‘제’ 자는 죽은 자인 신에게 음식을 올리는 뜻이라 쓰여 있습니다.
이에 반해 ‘재’는 재공(齋供)의 뜻으로 마음을 닦는 절차를 의미합니다. 즉 재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여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나 산 사람에게 그 공덕(功德)을 널리 베풀어 줍니다. 또한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두루 하는 제불제성(諸佛諸聖), 선신(善神)들의 가피(加被)를 입도록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통일을 이뤄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기도 때마다 행해져야 하는 것이 바로 부모조상에 대한 ‘다례’입니다. 남북통일이라는 국가적인 숙원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부모조상기도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어머니 자궁에서 나오지요? 이렇게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례를 모시는 것입니다. ‘효’를 행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많이 사랑하고 고맙고 해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서 모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다른나라와 고립되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일수록 다례제가 모셔져야 합니다.
이 곳 창건주 역시 나라가 국난에 처했을 때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절입구에는 애국지사 묘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지난 해에 연표도 붙였습니다.
아마 남북통일이 되고, 외국과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면, 사찰에서 모시는 다례제가 이렇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방불교처럼 ‘명상센터’가 운영될 수도 있겠지요. (금강경에도 보면 법이나 제도는 그 시대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므로 시대에 맞지 않는 법이나 제도는 아무리 그 뜻이 좋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을 고집하면 안 됩니다. 금강경 제6분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 보면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으니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법 아닌 것에 집착하리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보사 성동스님 초파일 법문 중에서
<참고>
(성경의 오류1)
창조에 대한 성경의 일화는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 위에 있는 모든 가축과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동물을 지배하도록” 인간을 창조하고 모든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이 정당하게 자연계를 “지배하고”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인간은 결국 신의 창조물에 개해 관리인이나 대리인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음 1) 인간은 자연계(물고기, 새, 모든 가축과 야생 동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동물)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없다.
‘지배하다(支配)’의 사전적 의미
1.(사람이나 단체가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자기의 뜻이나 규칙대로 복종시켜 다스리다
2.(외부 요인이 사람이나 조직 따위를)생각이나 행동을 규제하고 속박하다
인간은 자연계와 투쟁하면서 산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새를 기르기도 하고, 가축을 사육하고,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를 통해서 수세기 동안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지배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은 우리에게 지배권을 주지 않았고, 자연계는 인간이 지배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없는 이유
1. 인간은 자연계보다 존재기간이 짧다.
인간이 생기기 전부터 자연계가 존재했고, 인간이 멸종한 뒤에도 자연계가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통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계를 통치하려면, 자연계 이전에 존재하고, 자연계 이후에도 존재해야 한다.)
2.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하려고 여러차례 시도는 했으나, 그 과보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을 지배할 수 있는가? 그러한 성경의 ‘지배권’에 대한 언급 때문에 수많은 살생이 허용되었고, 우리는 그 업보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상과 벌을 준다. 이것은 불교와 매우 다른 특징 중 하나이다.
불교는 누가 상과 벌을 주지 않는다. 상벌제에 관여하는 ‘신’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업’에 따른 결과물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또한 기독교와 달리 유일신이 아니다.) 불교는 정확한 ‘인과’와 ‘업’의 논리로 인간의 운명을 설명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이 아니였으며, 인간의 상벌에 관여하지 않았다. 단지 ‘因果’와 ‘業’을 법으로 설하셨을 뿐이다.
우리는 신에 의해서 상을 받고 벌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因果’와 ‘業’의 인연으로 살아가는 유정체이다. 또한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을 지배할 수 없고, 상벌을 줄 수도 없다. 인류 문명 초기에는 우리가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해 왔다고 자부하지만, 그로 인한 여러 가지 ‘과보’에 시달리고 있다. 과보에 시달린다는 것은 지배권이 없다는 뜻이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계율에는 육식에 대한 금지조항으로 ‘자신 때문에 동물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을 때,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동물과 영적인 교류 가능성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신으로부터 자연계의 지배권을 받았다는 것은 오류이다. 이런 식으로 신이 지배권을 부여했다고 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폐단이 만만치 않다. 그 중의 하나가 신의 이름으로 재판을 하는 것이다.
3. 인간은 자연계의 생사에 관여할 수 없다.
애완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애완동물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을 뿐, 지배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업보로 지금은 애완동물들을 상전 받들 듯이 모시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개념적인 모든 것은 무지에서 생겨난다. ‘지배권’이라는 개념이 지금 현재 축생의 노예로써 살게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애완견의 똥오줌을 치우면서 하루를 시작할 정도이다. 죽는 날까지 먹이를 챙겨주고, 병원에 데려가고, 간식까지 개발해 준다.
그들은 애완동물을 지배하는가? 먹이를 주고, 같이 산다. 때로는 때리기도 하고, 때로는 귀여워해 주기도 한다. 이것이 지배하는 것인가? 애완동물은 주인이 귀여워해 준다고 한없이 좋아하고, 때린다고 슬퍼하는 유정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주인의 뜻대로 복종하고 따르는 동물은 없으며, 그저 그들을 가두어 두고 사육할 수 있을 뿐이다.
지배할 수 있다면,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왜? 죽일 수는 있는데, 살릴 수는 없나? 우리가 전멸시키고 싶은 해충들은 왜 아직도 완전히 박멸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것인가?
‘인’과 ‘연’으로 맺어진 생태계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원리로 사는 것이고, 공존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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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대중적 견해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의 십자가)
이것은 로마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님처럼, 일제침략기에 일본군사들에게 젊은 나이에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한국의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이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 십자가에 대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사의 찬미의 死는 죽음에 대한 찬미이다. 도대체 그런 죽음이 뭐길래 찬미하며 칭송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죽음을 찬미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유는 주변의 모함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은 고통의 일부이며, 무상하다고 이야기 할 뿐 찬미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것을 기억하려고 할 때, 좋은 물건으로 남겨서 기념하고 보관하려고 한다. 예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좋은 기억과 상징적인 물건들이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일까 하는 생각에서 몇 자 적어본다.
서울의 밤하늘을 보면, 네온으로 만든 교회의 십자가가 가득 메워져, 묘지의 무덤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십자가는 당시 예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죄수들이 매달려 처형당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그게 지금의 기독교의 성스러운 상징물처럼 되어버렸다.
동양에도 나쁜 짓을 한 죄수를 교수형 시킨 후, 그 시체를 매달아 마을어귀에 둠으로써 사람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게 죄수를 매다는 물건이 지금까지 성스럽게 남겨진 것이다.
교회뿐 아니라, 성경, 납골당의 십자가 표시, 비석, 악세사리 등등 예수님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많이 만들어서 남겨져 있다.
문제가 있다.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면서, 단두대를 상징화 하는 격과 무엇이 다른가? 프랑스 혁명으로 달라진 선진화되고 정돈된 사람들의 모습이나 정치, 문화 등을 기억하여 상징화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 건축물 중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패배한 국가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기둥으로 조각해서 남겨놓는 관습이 있었다. (카리아티드 ; caryatid) 무거운 기둥 속에 갖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패배한 민족은 점점 소멸되어 간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남겨져 있고, 부처님은 바른 자세로 앉아서 좌선을 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공포심을 주어 통치해야 하는 중생이라면, 이런 의미의 십자가도 통했을 법하나 시대가 변했다.
성적 고통으로 신음해야 했던 소녀상도, 지금은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만약에 소녀상의 모습이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모습으로 남겨놨다면, 지금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와 유래를 잘 알아서, 이제는 그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상징물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이들은 전생에 예수를 몹시도 미워했던 로마황제의 후손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ublic viewpoints on the symbolic meanings of Christ’s Cross
The sun rays that chased me
Are now on the tip of the church
Hanging on the cross.
The steeple is so high
How did it get on top?
No ring can be heard,
Only the whistling as it wanders,
The man who suffered,
To the happy Jesus Christ
If the cross allows it
His head lolling
And the blood that blooms like a flower
Under the sky that grows darker,
He will quietly shed
(Cross written by Yun Dong Ju)
This is the poem by Yun Dong Ju, a Korean poet of resistance who was killed by Japanese soldiers in his young ag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ike Jesus killed by the Roman soldiers. Also, it reflects the Korean sentiment on the Christian Cross.
Death Song is to praise the death. Why on earth do they praise the death what it is?
Do they praise Jesus Christ’s Holy death? The reason why Jesus nailed and died on the Cross was due to the sacrifice innocently from false incrimination. The death in Buddhism is a part of suffering and said to be impermanent, but not be praised.
Generally, people leave and keep the good things when they try to remember something. Although there might be lots of good memories and symbolic items that they can praise Jesus, I will write a few lines considering why that is Cross.
When we look up the nighttime sky in Seoul, sometimes it feels like the tombs of graveyards filling with crosses of the churches made of neon.
The Cross was the item to be used on death penalty not only for Jesus but also for the other criminals. That became the holy symbol of Christianity now.
In Orient, there was a custom to warn the people by hanging the dead body in the edge of the village after hanging punishment of the criminal, too. The item to hang the criminal remained sacred up to now.
It remained as the symbol of Christ not only in the church but also in Bible, cross signal in the charnel house, tombstones, accessories, and so on.
However, it has the problem.
What is it different from the symbolization of the guillotine commemorating French Revolution? Can’t they symbolize the appearance of the people who were advanced and well organized upon French Revolution, or politics and culture?
There used to be the custom in the ancient Greek architecture that they had made the defeated people from the war as the slaves and recorded them as the pillar of the sculpture (caryatid). Seeing the painful scenes captured in the heavy pillars, the people in the defeated country became extinguished more and more.
Jesus remains as the shape of nailed and bled to be painful on the Cross while Buddha remains as that of Zen meditation sitting with right posture.
If they were the people who were reigned with sense of fear, the Cross with this meaning could be accepted, however, times have changed.
Status of Peace that suffered from sexual abuse remains as the shape of right sitting posture on the chair. If they remained its shape as the scene of sexual abuse, how would it be in our mind now?
Since we know the symbolic meaning and the origin of the Cross to remember Jesus well, I think we should change the image now.
The writer thinks that those who hang around and enjoy the Cross hanging the symbolic item Jesus was nailed and felt painful seem to be the descendants of Roman Emperors who hated Him very much.
(실제로 나는 십자가에 대한 이러한 내용의 서신을 이탈리아 교황청에 수도 없이 보낸 바 있다. 유럽 신학대 교수(지금 명퇴한 독일 00대)의 말에 따르면, '십자가'가 '생명의 나무'로 변할 거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