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들이 날린다. 손사래를 치듯 노란 잎들이 바람을 탄다. 고개를 들어보니 겨우 몇 개의 잎을 매단 나무가 안타까운 모습으로 서 있다. 모두 들 보내고도 처연한 나무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바싹하니 마른 사람의 모습은 나무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모진 세월을 견딘 나무에는 생채기가 가득하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을 한 나무의 몸에는 아픔이 옹이로 맺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꽃도 나무도 짐승들도 죽음을 맞는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생성하고 소멸한다. 지금 내가 맡는 초겨울 바람은 어제의 늦가을 바람이 아니다. 높다란 산들도 언젠가는 깎이어 낮은 언덕이 되고 들판이 된다. 까만 밤하늘의 별들도 별똥별로 사라진다. 세월이 걸릴지라도 처마의 낙수는 돌에 구멍을 새기고, 바람이 불면 바위가 닳아 모래가 되는 소멸의 길로 접어든다.
올해는 새해 첫날부터 연이어 가족과 지인들이 죽음을 맞았다. 집안 친지들 외에도 친구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일곱 분이나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한 장소에서 나란히 하는 때가 삼일간의 장례식 기간이다. 영혼이 정말 있어 자신의 조문 행렬은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싶다. 아직 이르다 싶을 때 가신 분이나 병치레도 없이 급작스레 사고를 당한 경우는 가족도 지인도 황망하여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힘든 삶이라지만 꿋꿋이 살아 자수성가했거나 주변 사람을 외면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생만 하다 살만하니 갔다.’는 안타까운 말들을 한다. 반면 주변 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가는 원망의 대상이었거나 미움을 쌓던 사람은 가는 길조차 외롭고, ‘여러 사람 위해서 잘 갔지.’라는 속말을 듣게 된다.
살아서도 삶의 질이 다르듯이 장례식장에서의 풍경은 각양각색이다. 집안이 번성하거나 자식이 번듯하면 화환이 즐비하고 밀려드는 조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반면 몇 안 되는 가족들만 덩그러니 앉아 깊은 슬픔에 잠겨 있거나 장례비용과 절차를 두고 다투는 와중에 옥신각신 엄숙해야 할 자리가 야단법석의 풍경이 되는 곳도 있다. 부모 살아계실 때 살가운 정 한번 안 쏟던 자식도 이날만은 효자 효부가 되어 곡을 하고 후회의 가슴을 뜯는다. 혼자만이 고인을 생각하는 양, 화장만은 안 된다며 산으로 모셔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하는 사람도 있다. 평소 알뜰한 정 한번 나누지 않고 얼굴조차 보기 힘들던 사람들도 이번을 기회로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가까이는 사촌에서 멀리는 사돈에 팔촌까지 촌수만큼 고인과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다. 조문이 끝나고 나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기억조차 못 할 그들도 말없이 미소하는 사진의 주인공과의 친분을 이유로 한자리에 모였다.
문상을 하고 상주와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몇 마디의 위로의 말을 우리는 주고받는다. 생전의 사람과의 몇 가지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이고 ‘그랬지, 정말 그 사람.’하는 안타까움을 함께 나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 어땠을까. 생전의 사람과의 거리를 재어보고 봉투의 두께를 셈해보고 어딘가 잘 챙겨 놓은 장부를 꺼내어 상대의 씀씀이도 따져보았을지 모른다. 이번 달은 경조사비가 한꺼번에 왕창 나간다며 푸념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색을 바꿔 한 사람도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죽은 자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 어쩌면 죽은 자가 우리를 너그러움으로 용서하는 것인지 모른다. 영정 사진 속의 얼굴도 모인 사람들의 모습도 평화롭기만 하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한때 나를 경원했던 사람까지 모여서
국밥을 먹고 소주를 마시고
몇 마디 눈물 어린 이야기를 나누고
지난 일을 그리움처럼 이야기하고
아, 죽음은 이토록 평화로운 것이었구나
나의 관 앞에서
나의 머나먼 여정의 길은 끝나고
나는 무거운 짐을 모두 풀어버렸다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얼마나 먼 길을 돌아서 왔던가.
임명수 시인의 「관 앞에서」의 일부분은 더도 덜도 아닌 우리의 모습이다. 조금 전 젖었던 눈시울이 마르기도 전 상머리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쪼개고 머릿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 것, 그것이 산 자의 고통이다. 죽은 자를 앞에 두고서 뜨거운 국밥에 숟가락을 꽂고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고스톱 한판이라도 치면서 밤을 새워 주는 게 산 자의 지극한 신의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삼 일간의 장례식, 조문을 다녀보고 나니 삶도 죽음도 혼자 가는 오솔길이란 생각이 든다. 어깨동무하고 나란히 갈 수 없는 외롭고 빠듯한 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 나들목에 뜨거운 눈물이 없기야 하겠느냐만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지극한 진리를 아는 자의 여유를 본다. 버거웠던 짐을 부려놓고 가는 마지막 길에 그나마 배웅을 할 수 있음을 다행이라 여긴다. 또한, 스스로를 위안하고 훗날 먼길을 자신이 갈 때도, 외롭지 않게 배웅받기를 은연중에 염원한다.
뒤돌아 오는 길 때죽나무처럼 말라버린 가지를 본다. 누군가의 마지막 숨결인 듯 낙엽 한 장이 또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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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