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노예 해방에 깊은 영향을 준 흑인도 많습니다.
어쩌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보다 더 영향이 컸다고도 합니다.
그냥 참고로 읽어 주십시오.
프레데릭 더글라스(1818? - 1895)
더글라스는 탈출 노예이다.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강연을 하면서 전국을 누빈 적극적인 사회운동가이다. 중편 소설 ‘영웅의 노래’와 세 권의 자서전을 출판한 문인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자서전은 19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글로 평가한다. 그가 탈출 노예로서 흑인의 삶을 기록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아주 크다.
메릴랜드의 동부 해안가에 위치한 탤버트 카운티의 홈 힐 농장에서 태어났다. 흑인 어머니 헤리엇 베일리와 신원 미상의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홈 힐 농장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년 쯤 지나서(1826) 볼티모어에 있는 앤서니(어머니의 노예주이다)의 출가한 딸인 소피아와 그의 남편 휴 올드 가정의 하인으로 갔다. 당시의 남부에서는 노예는 글을 배울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소피아가 그에게 글을 가려쳤다. 남편이 노예가 글 배우기를 금지했으므로 그는 숨어서 글 공부를 했다.
노예 억압을 반대하는 연설집인 ‘컬럼비어 오레이터’를 사서 열심히 읽었다. 볼티모어 아메리칸 지에 실린 노예 반대 글을 찾아서 열심히 읽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있음을 알았다.
7년 뒤에 다시(1833) 메릴랜드로 보내져서 토머스 올드의 노예가 되었다. 이곳의 농장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더욱이 더글라스가 반항심이 강한 것을 알고 악명이 높은 코비 농장으로 보내졌다. 코비는 그를 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유도 없이 매질하면서 학대했다. 그는 코비에게 저항했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 저항이 그의 일생에 크다란 영향을 주었다.
1836년에는 휴 올드는 더글라서를 다시 메릴랜드로 데려와서 근처의 조선소에 공장 노동자로 보냈다. 더글라스의 인금은 대부분을 주인이 휴 올드가 가져갔다. 공장 노동자를 하면서 더글라스는 탈출 자금을 조금씩 모았다.
1983년 9월 3일에 선원으로 위장하여 뉴욕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성공의 뒤에는 자유인인 흑인 여성 애너 머리의 도움이 컸다. 뉴욕에서 머리와 결혼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포드에 가서 정착했다. 이때 자기의 성을 더글라스로 바꾸었다. 노예 사냥군의 눈을 피하기 위혀서 였다.(자서전에 탈출 경로늘 세세히 밝히지 않았다. 이유는 탈출 경로가 폭로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1840년대 초에는 미국의 북동부 지역에서 노예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뉴베드포드 지역은 도망 노예가 살기 좋은 땅이었지만 인종차별은 심했다. 노예폐지 운동을 펼치는 게리슨의 신문을 구독했다. 1841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의 낸터컷에서 개죄한 노예폐지 촉구 모임에 참석하여 개리슨을 직접 만났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경험을 연설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모임에서 정식 연설가로 참여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어나갔다. 그의 연설은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가 너무 지적수준이 높은 탓에 일부에서는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845년에는 자신의 과거 삶을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라스가 직접 쓴 그의 삶의 이야기’를 출판하여 작가로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이로 인해 더글라스는 자유와 평등의 대변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불어와 독일어로도 번역되었다.
1855년에는 이 자서전을 보강하여 ‘나의 속박, 그리고 나의 자유’를 출판했다. 두 번 째 자서전인 이 책에서는 자신의 노예로서의 삶 뿐 아니라 노예제도 폐지론자와 만난 이후에 그가 이룬 지적 성장과 성과에 대하여 좀 더 상세하게 기술했다. 여기서는 북부의 인종차별 문제도 다루었다.
1881년에 출간한 더글라스의 세 번 째 자서전은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삶과 시대’였다. 남북전쟁과 그 전 후 시기의 상황이 실려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 특히 남부에서 흑배간의 인종문제를 비관적으로 보았다. 끊임 없이 자행되는 백인의 린치, 인종차별법(짐 크로우 법 제정)의 제정, 남부 흑인의 공민권 박탈 등으로 흑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미국 사회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남북 전쟁 후에 해방 흑인에게 참정권을 주는 문제 등 흑인의 권익을 위한 사회운동을 펼쳐나갔다. 1877년에는 17대 대톻령인 룰더포드 헤이즈가 콜롬비아 특별구 연방 보안관으로 임명했다. 흑백 차별에 대한 투쟁과 참정권의 입법 투쟁을 꾸준히 벌렸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서 대통령을 도와 해외 대사로 나가기도 했다.
그는 소수 혹은 약자를 위한 인권 투쟁을 함으로 미국의 민권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후대의 흑인 지도자와 흑인 문학가에게도 영향을 많이 주었다. 그의 자서전은 ‘노예 이야기’라는 장르를 통해 미국의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 큰 공헌을 한 작가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