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종] 상해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
재미 언론인 한우성씨 발굴 기록
1918년 1차 대전 참전해 156회 출격
한인 최초 파일럿은 ‘조지 리’였다
7살 때 아버지 따라 미국 이주… 안창남보다 3년 먼저 하늘 누벼
▲ 조지 리로 추정되는 인물(왼쪽). 남가주대 동아시아도서관에서 찾아낸 이 사진에는 이 인물의 이름이 ‘Young Lee’로 표기돼 있다. 조지 리의 활약상을 보도한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기사 역시 조지 리를 ‘Young Lee’로 표기하기도 했다. 당시 신한민보가 조지 리의 한국 이름을 ‘이응효’ ‘이윤호’ 등으로 불분명하게 기재한 점을 감안하면 조지 리의 한국 이름이 ‘이영효(호)’였고 이 가운데 글자를 따 미국인들이 그를 ‘Young Lee’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같이 사진을 찍은 한인 청년들은 비행기 정비사 자격증을 딴 우병옥(가운데ㆍ미국명 피터 우)과 상하이 임시정부 비행학교 출신인 이초(미국명 찰스 리)다. photo 남가주대 동아시아도서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미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해 156회 무사고 출격이란 대기록을 세운 조지 리(George Lee)라는 한국인이 있었으며, 그가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1921년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한 안창남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일반적 통설을 3년 이상 앞서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공군사 연구가 등 전문가들 사이에선 ‘1920년 상하이임시정부가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설립한 비행학교 출신 한인 청년들이 안창남에 앞서 미국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이 관련 논문 등을 통해 알려져 있었으나 조지 리에 대한 기록은 보고된 적이 없다.
재미 언론인 한우성(53)씨는 지난 2월 24일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이자 전쟁 영웅인 조지 리의 삶이 재조명 돼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하고 조지 리의 활약을 보도한 1918년 12월 18일자 미국 일간지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 기사와, 샌프란시스코 교민신문인 ‘신한민보’의 1919년 6월 7일과 1920년 7월 8일자 보도, 그리고 1917년 6월 5일자로 작성된 조지 리의 ‘미군 징집 등록카드’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들 기록은 일본이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에 작성된 것들이지만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는 조지 리에 대해 (일본이 아니라) ‘한국 출생(a native of Korea)’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부친을 따라 7세 때 미국으로 건너온 조지 리도 징집 등록카드에 출생지를 ‘한국’, 국적을 ‘일본’이라고 기재했다. 당시 조지 리의 활약상을 보도한 신한민보는 ‘조지 리가 조선을 돕기 위해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보도해 조지 리가 조국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조영식 교수(역사학)는 “한우성씨 주장과 관련 기록들이 사실(事實)이라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사실(史實)이라 할 수 있다”며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공군 박물관 측은 “조지 리란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직까지 관련 기록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조지 리의 활약상을 보도한 캘리포니아 지역 신문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1918년 12월 18일자 기사. ‘조지 리, 명예와 아내를 얻다(George Lee wins honors and bride)’란 제목이 달려 있다. photo 캘리포니아주립대 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
조지 리의 활약
사탕수수 농사 짓다 남몰래 자원 입대
인종차별 극복, 항공대서 공훈반지 받아
미국 일간지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1918년 12월 18일자는 조지 리란 전쟁 영웅에 관한 기사를 지방면 머리기사로 처리했다. 캘리포니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1895년부터 발행돼 온 이 신문은 ‘조지 리, 명예와 아내를 얻다(George Lee wins honors and bride)’란 제목의 기사로 그의 삶을 소개하면서 “무려 156회나 되는 무사고 출격을 기록해 지휘관으로부터 훈장의 일종인 미국 육군항공대 공훈반지(meritorious ring)를 받은 뒤 21세로 명예 제대했다”고 보도했다. 한우성씨는 “당시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라고 말했다.
한씨의 취재에 따르면 조지 리는 1896년 제물포(지금의 인천)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903년 3월 30일 아버지 이두형을 따라 이민선 갈릭(garlic)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는 “캘리포니아 북부 맨티카(Manteca)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던 조지 리가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 참전을 선언하자 ‘아버지 몰래’ 미군 육군항공대(당시 공군을 대신)에 자원 입대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에게 왜 입대 사실을 숨겼는지는 보도하지 않았다.
한씨는 “조리 리가 미군 비행사가 된 직접적 동기는 확인되지 않았다”면서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을 선언하자 ‘미군에 들어가 전쟁 기술을 배워 조국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동포 청년들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미뤄 조지 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에 따르면 입대 과정은 험난했다. 미국 군대는 원칙적으로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지 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수차례 입대를 거듭 청원한 끝에 결국 미국 육군항공대에 들어갔다.
이 신문은 “군인이 된 조지 리는 텍사스 샌안토니오의 켈리필드(Kelly Field) 비행장에서 훈련을 시작한 뒤 1918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미첼필드(Mitchell Field) 비행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식 파일럿이 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조지 리가 유럽 전선으로 배치된 것은 그 해 6월이었다. 이후 1918년 12월, 전쟁이 끝나고 귀향할 때까지 그는 156회의 무사고 출격 기록을 세웠다.
이에 대해 한우성씨는 “미 공군 예비역 장교들에 따르면 당시 6개월 남짓한 기간에 156회 출격했다는 기록은 거의 하늘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의미”라며 “그 자체로 경이적인 대기록”이라고 말했다.
조지 리의 활약상에 대해 당시 신한민보는 “조지 리가 전쟁 중 독일·프랑스 국경지대에서 공기선을 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우성씨는 미국 예비역 공군중령인 로버트 존슨의 말을 인용해 “당시엔 비행선이 정찰기로 쓰이곤 했다”며 “여기서 말한 공기선은 비행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씨는 “그 시기엔 비행선 조종사가 전투기 파일럿으로 변신하기도 했다”며 “따라서 조지 리의 행적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가 보도한 조지 리의 최종 계급은 상사다. 한우성씨는 “미 공군에 따르면 1차 대전 때엔 미군에 비행 부사관이 있었다”며 “비행 부사관은 2차 대전 초까지 일부 존재하다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져 이후엔 장교들로 조종사가 구성됐다”고 말했다. 조지 리의 계급과 관련해 캘리포니아주립대 장태한 교수(소수인종학)는 “당시 미국에선 인종차별이 합법이었다”며 “조지 리가 파일럿 자격을 획득하긴 했지만 아시아계라는 이유 때문에 장교 계급장을 달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조지 리의 연인
롱아릴랜드 생도 시절 미국 여성과 연애
제대 후 결혼, 장인과 고무 사업 계획
▲ 1917년 6월 5일자로 작성된 조지 리의 ‘미군 징집 등록카드’. 출생지는 ‘한국’, 국적은 ‘일본’으로 기록돼 있다. photo 미 육군
조지 리에겐 미국인 애인이 있었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에 따르면 두 사람은 조지 리가 롱아일랜드에서 생도로 생활할 때 서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 이 신문은 “조지 리가 수개월 안에 그녀와 결혼해 뉴욕에서 장인과 함께 고무사업을 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우성씨는 1920년 7월 8일자 신한민보 기사를 근거로 “조지 리가 조선을 돕기 위해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계획을 세워 1920년 6월 부인이 기다리는 뉴욕으로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첫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한씨가 제시한 1917년 미군 징집 등록카드엔 조지 리에 대해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을 가졌으며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미혼이고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 국적자”라고 적혀 있다. 조국을 잃고 이민 또는 망명 생활을 하던 선조들의 비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지 리의 부친 이두형
대한인국민회 회원… 봉사·기부 활동 활발
안창호 선생과 친분 다지며 애국운동 나서
조지 리의 아버지 이두형은 1903년 이민선을 타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우성씨는 이두형에 대해 “도산 안창호가 세운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한인 2세들을 위한 봉사와 기부 활동을 성실히 전개해온 동포”라며 “3·1절 2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1921년 3월 1일에 동포들과 함께 기념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자 ‘새벽 4시에 혼자 일어나 책상 앞에서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씨에 따르면 이두형은 1913년 8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당시 이두형은 도산에게 “왕복 여비는 못 드려도 편도 여비는 부담하겠으며 오시면 마차로 마중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한우성씨는 “초청 서한에서 이씨는 도산의 자녀들 안부를 물었다”며 “이 점으로 미뤄 이씨가 도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우성씨에 따르면 조지 리의 한국 이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고 한다. 한씨는 “조지 리에 대해 1918년 5월 24일자 신한민보는 ‘이응효’라고 실었으며, 1919년 1월 2일자 같은 신문은 ‘이윤호’라고 다르게 게재해 현재로선 어느 것이 확실한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조지 리의 아버지 이름도 “하와이 이민국 출입자 명단에는 ‘이원형’으로 적혀 있지만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 ‘이두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 지금까지의 ‘한국인 최초 파일럿’들 |
미국 하늘은 1919년 노정민, 중국선 1921년 서왈보, 한국선 1922년 안창남
여성은 1925년 권기옥이 최초… 영화 ‘청연’ 모델 박경원은 1928년 첫 비행
▲ 한장호 / 이초 / 오림하 / 장병훈
▲ 이용선 / 이용근 / 권기옥 / 박경원 / 안창남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안창남(安昌男·1900~1930)이다. 안창남은 1921년 일본 도쿄의 오쿠리 비행학교를 3개월 만에 졸업하고 제1회 비행사 면허시험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오쿠리 비행장에서’란 글을 통해 “조국의 하늘에서 자신의 비행술을 선보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자 1921년 11월 안창남 후원회가 조직됐고 이듬해인 1922년 12월 10일 용산에서 1인승 단발 쌍엽기 ‘금강호’를 몰고 시범비행을 했다. 그의 비행은 망국의 청년들에게 ‘창공의 꿈’을 불어넣었다. 애국심이 강했던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1925년 조선청년동맹이란 독립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무장항일단체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해 무력 투쟁을 펼쳤다. 하지만 1930년 4월 2일 중국 산시성에서 훈련하던 도중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창남으로 알려졌던 ‘최초의 비행사’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서왈보(徐曰甫·1887~1926)다. 188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병합하기 직전인 1909년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만주~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적 활동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19년 1월 28일 32세의 고령으로 중국 남원항공학교에 입학했다. 공군박물관은 서왈보에 대해 “1921년 11월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그가 안창남보다 한 해 먼저 비행기 조종사가 됐음을 밝혔다.
하지만 서왈보의 기록을 깬 한인 청년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지난 1992년 ‘1920년 임시정부 군무총장(국방장관) 노백린 장군 등이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설립한 비행사 양성소에서 오림하, 이용선, 이초,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 등 6명의 비행사를 배출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1920년 4월 독립신문은 최초의 조종사 6명이 탄생했다는 사실과 함께 약 40명의 조종훈련생이 미국에서 양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들에 앞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에싱턴(Essington)비행학교를 나와 미국 해군비행사가 된 노정민이 1919년 비행학교를 마치고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일단의 재미 동포 청년들은 조지 리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최초의 한인 비행사로 알려져 왔다.
최초의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는 권기옥(權基玉·1901~1988)이 꼽힌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4년 중국 운남항공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해인 1925년 2월 28일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4월 20일 중화민국 항공처 부비행사로 임명돼 10년 이상 조종사로 활동했다.
영화 ‘청연’의 모델로 알려진 여류비행사 박경원(朴經遠·1901~1933)이 비행사 자격을 딴 것은 권기옥보다 3년 뒤인 1928년이다. 박경원은 1925년 일본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해 3년 뒤인 1928년 2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했다. 진취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1933년 8월 7일 아끼던 ‘청연(靑燕)호’를 몰고 조선을 향해 날았지만 이륙 50분 만에 시계를 잃고 추락했다.
| ‘조지 리’ 발굴 재미 언론인 한우성씨 |
상하이임정 비행학교 취재하면서 조지 리 존재 확인
“조지 리의 활약이 임정 비행학교 설립에도 도움 됐을 것”
“조지 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말을 직접 했는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그의 활약상이 당시 재미 동포 사회에 공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조종사를 양성하자는 열기를 북돋운 것은 확실합니다. 조지 리의 활약 이후인 1920년 상하이임시정부가 재미 동포들의 지원 속에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운 게 이를 방증합니다.”
‘한국인 최초 비행사’ 조지 리를 발굴한 재미 언론인 한우성(52)씨는 조지 리라는 인물이 갖는 의의가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인 비행사 중 ‘최초’라는 기록에만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를 통해 당시 재미 한인사회의 공군 육성에 대한 의지와 상하이임정 비행학교로부터 출발한 대한민국 공군의 기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공군사 연구가 등 전문가들은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세워진 상하이임정 비행학교가 우리 공군과 공군사관학교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한우성씨는 상하이임정 비행학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조지 리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인 최초 비행사’로 흔히 알려진 안창남보다 앞서 윌로우스 비행학교 등을 졸업한 한인 청년들이 미국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비행학교 설립 전인 1918년 1차 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린 한국인 조종사가 있었다는 또 다른 사실은 짜릿한 것이었다. 한씨는 조지 리에 대한 상세 기록을 찾기 위해 지난 1년간 미국 각 도서관을 뒤졌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신문에 난 조지 리의 기사를 찾아냈고 그의 징집카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지 리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만 구했을 뿐 100% 확실시되는 사진을 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한씨는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줄곧 기자생활을 해 왔다. 미주 한국일보와 통신사인 뉴아메리카미디어(New America Media)에서 작년까지 일했고 올해부터 프리랜서로 뛰고 있다. 한씨는 그동안 한인 이민사와 종군 위안부 문제 등 현대사에 얽힌 이슈들을 추적해 왔다. 미국에서 진행됐던 강제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도 깊숙이 관여했고 이와 관련된 논문도 썼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문제를 다룬 30여회의 시리즈 기사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미국계소수기자상, AP통신 기자상도 수상했다.
한씨는 국내에서는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영웅인 고 김영옥 대령 ‘전도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사망한 김영옥 대령을 생전에 장기간 인터뷰했고 2005년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을 펴냈다. 미국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김영옥 대령에게 프랑스 정부가 자국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 한국 정부가 태극 무공훈장을 추서하게 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작년에는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설립 지원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영옥 연구소’ 지원 관련법은 지난 정기국회에서 통과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윌로스 비행학교 (上)
임시정부의 ‘비밀 공군사관학교’
‘한국인 최초 파일럿 조지 리’를 발굴(주간조선 2045호 보도)한 재미언론인 한우성(52)씨가 자신이 취재한 상하이임시정부 비행학교와 이를 지원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의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의 연원으로 알려진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관련 논문 등을 통해 개략적인 사실이 알려져 있었지만 한우성씨는 1년에 걸친 현지 취재를 통해 설립부터 폐교에 이르는 전 과정을 꼼꼼히 복원해냈습니다. 특히 비행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재미동포 김종림의 활약상이 자세히 보도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우성씨의 기고를 상ㆍ하편으로 나눠 소개합니다.
임정의 윌로스 비행학교는 당시 ‘한인비행학교’ ‘비행가양성소’ ‘사관양성소’ ‘노백린(임정 군무총장으로 비행학교 설립 주도) 군단’ 등으로 불렸으며 일본도 ‘호국독립군 비행기학교’라 칭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곳이다.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약 230㎞ 떨어진 캘리포니아주 북부 윌로스(Willows) 시(市) 일원의 광활한 대평원에 문을 연 이 비행학교에서는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임정의 원대한 꿈이 최소 1년6개월 정도 이어졌다. 수십 명의 한인 청년들이 이곳에서 비행사 훈련을 받았고 임정은 이 중 최소 2명을 (독립군) 비행장교로 공식 임관시켰다. 홍선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홍윤정 박사(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등 이 사안에 정통한 학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도 이 비행학교의 법통을 잇는다고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현재 대한민국 공군은 공식적으로 윌로스 비행학교를 자신들의 연원으로 삼고 있다.
▲ 윌로스 비행학교의 1920년 모습. ‘미국 가주(加州·캘리포니아) 한인 비행대… 노백린 장군 지휘하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photo USC 동아시아 도서관
윌로스 비행학교가 문을 연 1920년 2월은 1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열강에 침탈된 약소국의 독립 열기가 어느 때보다 높았고 국내에서도 상하이 임정이 탄생(1919년 4월 13일)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이 전열을 정비하던 무렵이었다.
윌로스 비행학교를 추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은 노백린 임정 군무총장(현 국방장관에 해당)이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장을 지낸 노백린은 1916년 하와이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자신이 임정 군무총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건너간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노백린은 군사력을 통한 독립 쟁취를 중시했던 인물로 1차 대전을 지켜보며 공군의 효율성에 주목하다가 군무총장이 되자마자 공군 양성을 임정의 공식 정책으로 추진했다.
조국 독립을 향한 꿈
1920년 7월 5일 개소식… 현지 신문 대대적 보도
한국·중국 등 여러 곳에 비행학교 추가 설립 계획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2월 20일 설립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현지신문 ‘윌로스데일리저널(Willows Daily Journal)’은 2월 19일자에서 ‘한국인들 비행장을 갖는다’며 1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제목의 톱기사로 비행학교 개설 소식을 상세히 전하고 있어 비행학교 설립의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하다.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노백린이 비행학교 설립에 대한 사전조율 없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동포들이 주선한 성대한 환영식을 가진 게 1920년 1월 15일이었는데 2월 19일 이전에 비행기 3대와 비행장부지 40에이커 구매, 교관과 정비사 채용, 학교건물 임대차 계약, 학생 15명 모집 등이 모두 마무리된 것으로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윌로스데일리저널은 1920년 2월 19일자에서 “쌀농사로 부자가 된 한국인 김종림이 한인 청년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이를 위해 최근 문을 닫은 퀸트학교(Quint school)를 임대했으며 학교 인근 비행장부지 40에이커(약 4만9000평)도 이미 구매했다. 교관도 1명 채용했고, 최첨단 기종인 비행기 3대도 이미 사들여 곧 도착하는데, 정비사 2명이 책임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퀸트학교는 이 지역 백인이주자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1914년 개교했다가 1918년 문을 닫은 곳이다.
윌로스 비행학교는 설립 후 급속히 자리를 잡으면서 학생들도 늘었다. 신한민보 1920년 3월 19일자는 “노백린 각하가 경영하는 윌로스 비행학교에 나아가 비행술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학생은 건장한 청년 24명”이라고 썼다. 이들은 박희성·조종익·정몽룡·홍종만·최능익 등인데 김종림이 당초 학생수가 15명이라고 한 지 약 1개월 만에 24명으로 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비행학교 학생 수는 6월 22일 다시 30명으로 늘었다.
▲ 임정 비행학교가 있던 퀸트학교 건물 일부(지난 1월 23일 촬영) / photo 김상경
윌로스 비행학교는 6월 22일 첫 비행기를 소유하게 된다. 이날 윌로스데일리저널은 “비행기가 홀스콧(Hall-Scott) 엔진을 장착한 최신형”이라며 “한국인들은 비행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그곳에도 여기저기 비행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야심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재미 중국인들도 레드우드시티에서 대일전쟁을 위한 비행가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중국인들은 훈련기 한 대를 갖추고 중국인 청년 수십 명을 훈련시키는 규모였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초기부터 최소 3대의 훈련기를 갖추고 훈련생 100명을 동시에 교육할 수 있는 규모를 염두에 뒀을 뿐 아니라 비행학교를 동북아 여러 곳으로 확산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실제 노백린은 1920년 3월 1일자 윌로스데일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비행학교는 3·1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며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했다.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5일 동포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 개소식을 거행했고 오림하와 미국인 수석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이후 비행학교는 더욱 체계화된 시스템을 갖춰 나갔다. 편제상 비행학교(비행가양성소)의 상급기관이자 후원기관으로 일종의 회사인 비행가양성사를 뒀고 ‘비행가양성사 장정’까지 채택했다. 당시 채택된 ‘비행가양성사 장정’은 출범 취지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 데 있음’(1장 2조)을 명확히 했다. 부칙에서는 ‘본사는 본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함’(부칙 3조), ‘비행가양성소는 감독 1인을 두어 관리함’(부칙 4조), ‘비행가양성소의 감독은 임원부가 선정함’(부칙 5조)이라고 정했다. 비행가양성사 초대 총재에는 김종림, 비행학교 초대 감독에는 곽림대가 각각 취임했다. 학교가 자리잡는 것을 본 노백린은 임정으로 가기 위해 7월16일 북미를 떠났다.
비상(飛上)을 향해
최첨단 훈련기 3~5대… 정비·통신·군사학까지 교육
일본도 예의주시 “비행기 이용해 독립운동” 정보 보고
당시 윌로스 비행학교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꿈꾸며 비행술 훈련을 했다. 학생들은 조종뿐 아니라 정비·무선통신·군사학 등도 교육받았다. 신한민보는 1920년 8월 5일 현재 (비행학교가 있던) 김종림 농장의 모습을 “망망 무제한 평원광야의 3000여에이커의 넓은 들”이라고 표현하며 “이곳에 동포 32명이 같이 살고 비행학교에 학생 16명이 기숙하는데 8월 6일 이른 아침에 연습장에 나가서 비행기 연습을 봤다”고 썼다.
당시 비행학교에는 최첨단 훈련기 가운데 하나인 ‘스탠더드 J-1(Standard J-1)’으로 확실시되는 훈련기가 최소 3대 이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행학교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태극 문양이 선명한 비행기 3대가 확연히 보인다. 신한민보는 7월 2일자 ‘한국 비행기 4척’이라는 부제의 기사에서 “비행기 4대를 사오게 하며”라 했고, 8월 5일자에서는 “이제 비행기 1대를 더 사서 연습을 충분케 하며”라 보도했다.
당시 이 비행학교를 주시하고 있던 일본의 정보보고서에는 이곳 비행기가 5대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이 수신자로 돼 있는 일본의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문서번호: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은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요지의 보고를 했다.
당시 훈련기에는 ‘K.A.C’라는 표시도 선명히 보인다. 이것이 실제로 무엇의 약자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주장처럼 ‘대한인 비행가 구락부’를 뜻하는 ‘Korean Aviation Corps’나 ‘Korean Aviation Circle’ 혹은 ‘Korean Aviators Club’은 아닌 것 같다. 이 학교를 깊게 연구한 케네스 클라인 남가주대학(USC) 동아시아도서관장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이 비행학교는 동호인 모임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군양성을 위해 공식적으로 추진한 곳”이라며 “따라서 ‘K.A.C’는 대한민국 공군을 뜻하는 ‘Korean Air Corps’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당시 비행학교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을 ‘사관생도’라 여겼고 재미동포들이 이 학교를 ‘사관양성소’라 불렀다는 기록들이 이 학교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무렵 비행학교 학생들은 ‘대한인 비행가 구락부’를 조직하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 클럽인 이 모임은 창림멤버가 16명이었고 한장호가 회장이었다. 이들은 비행학교를 위해 헌신한 김종림에게 감사의 표시로 은제 컵을 선물했다.
날개를 접다
종전·폭풍우로 캘리포니아 동포들 쌀 농장 타격
김종림도 치명타, 후원금 끊기자 비행학교 멈춰
윌로스 비행학교는 1차 대전 이후 후원하던 재미동포들의 경제력이 흔들리면서 문을 닫았다. 재미동포 재력가들은 1차 대전 중 캘리포니아가 누렸던 곡물특수가 사라지면서 재정적 피해를 입었다. 특히 비행학교의 최대 후원자였던 김종림은 폭풍우로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것이 비행학교에 대한 후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김종림은 1920년 한 해만 비행학교 지원을 위해 현금 5만달러 기부를 계획했었다. 당시 5만달러는 미국 학계의 달러화 가치 환산기준 6가지 중 최고나 그 다음 기준을 적용하면 2008년 현재 280만달러, 혹은 800만달러에 이른다.
김종림의 피해와 관련해 지역 신문인 ‘글렌 트랜스크립트(Glenn Transcript)’ 1920년 10월 13일자는 “불행히도 지난주 폭풍우로 ‘김 앤 포터(Kim and Porter·김종림의 회사)’가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잘 영글어 이삭이) 무거운 벼가 1700에이커나 되는데 벼들이 절망적으로 넘어졌다. 이 때문에 전량을 (기계가 아닌) 인력으로 수확해야 한다. 이들은 어제 이곳에 와 계약을 체결하고 힌두인 200명을 고용했는데 1인당 인건비가 하루 4달러에 숙식도 제공해야 한다. 기계 수확이 1에이커에 10달러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회사가 폭풍우로 입은 타격은 쉽게 짐작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사용하던 훈련기.
김종림의 피해는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김종림의 막내아들 김두원씨는 최근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선친이 이 해(1920년) 농사만 마치고 은퇴할 계획이었다고 어머니가 생전에 전했다”고 밝혔다. 이 증언은 김종림이 1차 대전 종전에 따라 쌀 특수가 끝난 것으로 보고 쌀농사에서 곧 손을 뗄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통상 10월 첫째 주부터 쌀 수확을 시작하므로 김종림의 농장이 1920년 10월 둘째 주에 발생한 폭풍우에 며칠만이라도 앞서 수확에 착수해 그 엄청난 부를 지켰다면 비행학교와 독립군 공군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식지 않은 공군의 꿈
노백린·김종림, 폐쇄 후에도 재개 위해 노력
임정도 1943년과 1945년에 공군 창설 시도
▲ 임정 공군의 활동을 주시했던 일본 총독부 정보 보고 문서. / photo 국가지식포털
김종림은 1921년 4월 10일 비행학교 학생 박희성 등 3명이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기체사고로 추락해 중상을 입은 후 비행기를 빌려준 백인에 대한 보상 재정지원을 재미동포 사회에 요청하기도 한다. 당시 김종림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 보낸 청원서를 통해 “본사는 …(중략)… 할 수 없이 중도에 폐하게 되었음에 진실로 눈물을 뿌리며 슬픔을 익히지 못하겠으므로”라며 비행가양성사 폐쇄를 알렸다.(1921년 5월 5일자 신한민보 게재)
이를 근거로 보면 윌로스 비행학교를 후원하던 비행가양성사는 공식적으로는 1920년 7월 25일 설립돼 1921년 4월 11일~5월 5일 사이에 폐쇄됐다. 비행가양성사 폐쇄가 곧바로 비행가양성소(비행학교)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행학교는 1920년 2월 20일 또는 그 전에 시작돼 같은 해 10~12월 실체적 기능은 정지된 것 같다.
하지만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김종림, 노백린 등 윌로스 비행학교의 주역들이 이 시점에서 비행학교에 대한 꿈의 날개까지 접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윌로스데일리저널 1921년 6월 1일자는 “퀸트에 있던 한국인 비행훈련장을 다시 열기 위해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언급이 오늘 있었다”고 보도했으며, 신한민보 1921년 8월 25일자는 비행학생 지원을 위한 재미동포 사회의 기부자 명단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 임정이 1921년 7월 18일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으로 조종사가 된 인물 가운데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 비행병참위(소위)로 임명한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계획은 진행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림이 재기를 하지 못하면서 윌로스 비행학교는 결국 다시 날지 못했다. 이곳 출신들도 뿔뿔이 흩어져 더러는 미군이나 중국군에 들어가 직·간접적으로 대일전쟁에 참가했고 더러는 민간인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홍윤정 박사에 따르면 이후 임정은 1943년 8월 공군설계위원회조례를 공포하는 등 공군 창설 시도를 계속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3월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공군을 창설하려는 계획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시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임정의 조종사 양성과 공군 창설 노력은 결국 대한민국 수립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 임정 비행학교 훈련기 기종 |
‘커티스 제니’ 시리즈는 잘못 알려진 것
당시 첨단 기종인 ‘스탠더드 J-1’ 확실
▲ 스탠더드 J-1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사용됐던 훈련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커티스 제니’ 시리즈에 속하는 JN-4D 또는 같은 시리즈의 유사 기종이 아니라 스탠더드 J-1(Standard J-1)인 것으로 확실시된다. 보잉항공사 소속 항공역사가 마이클 롬바디(Michael Lombardi)는 지난 2월 4일 인터뷰에서 윌로스 비행학교 사진 속의 훈련기가 “얼핏 보면 유명한 커티스 제니와 매우 흡사해 보이나, 홀스콧 엔진이 조종석 뒤에 장착된 점과 날개의 세부사항 등으로 볼 때 스탠더드 SJ시리즈”라고 확인했다.
스탠더드 J-1은 미국 스탠더드 항공사가 슬론(Sloan) 항공사의 비행기 ‘Sloan Model H’를 모형으로 개발한 훈련기였다. 1916년부터 생산된 스탠더드 J-1은 당시 훈련기로서는 첨단기종이었으나 경쟁기종이었던 제니 시리즈에 비해 엔진의 내구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총 1601대가 생산된 스탠더드 J-1은 제1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1918년에는 대당 6000달러 정도에 거래됐으나 종전과 함께 수요가 격감하고 잉여품이 남아돌자 가격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임정이 1920년 비행학교를 열면서 이 비행기를 사들였을 때의 가격은 대당 6000달러를 훨씬 밑돌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윌로스 비행학교 (下)
한인 청년들 목숨 건 비행
당시 노백린과 임정의 비행학교 추진이 가능했던 배경 중 하나는 재미동포 사회에서도 공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열기가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발명된 본고장에서 떠들썩한 비행기 관련 뉴스를 접해온 한인들은 미국도 참전한 1차 대전을 지켜보면서 공군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가 동포들을 상대로 펴낸 신한민보는 ‘공군이 필요하다’는 화두를 반복적으로 던졌다. 신한민보는 “공기선이 향후 정찰기나 폭격기로 크게 활용될 것”이라고 보도하거나(1909년 3월 10일), 1차 대전을 이용해 한민족이 장래를 모색할 것을 권하면서 비행기 사진을 함께 싣는다거나(1914년 1월 29일), ‘전쟁과학’난을 만들어 무기로서 비행기 소개 시리즈를 게재하는(1916년 9월 8일~10월 5일) 등 비행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한인 청년들. photo USC 동아시아 도서관
신한민보의 캠페인은 실제 한인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쳐 비행술을 배우려는 한인 청년들이 줄을 이었다. 1918년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해 전쟁영웅이 된 조지 리가 한국인 최초 파일럿으로 날아오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조지 리 외에도 1918년 미군에 자원 입대해 비행기복역병이 된 이성창과 1919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육군비행학교에서 훈련받은 최자남과 박낙선,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 에싱턴(Essington) 비행학교를 졸업한 노정민 등 한인 청년들은 독립전쟁을 꿈꾸며 비행술을 배웠다. 최자남은 1919년 7월 육군비행학교에서 보낸 편지에서 “비행자 중에 부상이 있을 때는 두려움도 없지 아니하되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에 높이 떠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술 예상을 느낄 때에는 대한공화국 만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 썼다. 노정민은 1919년 10월 “천강지손 반도민족은 국가의 치욕을 씻고 민국의국민된 자격과 직책을 하려면 비행술을 연구치 아니하고는 조국을 빛내며 후일에 공중전쟁을 시험하며 세계열강과 더불어 문명을 서로 다툴 수 없다 하나이다”는 내용의 광고를 신한민보에 내기까지 했다.
이들 외에도 당시 많은 한인 청년들이 미국 곳곳에서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0년 2월 5일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노백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으로 약 42㎞ 떨어진 레드우드시티(Redwood City)에 있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오림하 등 한인청년 최소 6명이 조종사가 되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오림하를 제외한 5명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며 1919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청년혈성단 발기인들이다.
▲ 임정 비행학교에 영향을 미친 레드우드 비행학교. photo USC 동아시아 도서관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이 가능했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부쩍 성장한 재미동포 사회의 재력이다. 당시 재미동포 사회에는 쌀농사에 종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거부(巨富)들이 포진해 있었다. 1912년부터 상업적 쌀농사를 시작한 캘리포니아는 세계대전이 터지며 유럽이 폐허로 변하자 쌀농사로 엄청난 부를 긁어 모았다. 캘리포니아 쌀농사의 메카가 바로 윌로스를 끼고 있는 대평원이다.
쌀농사를 통해 부자가 된 재미동포들의 경제력은 이 무렵 독립운동의 버팀목이었다. 1919년 재미동포의 독립자금 기부액 8만8000달러 가운데 49%에 달하는 4만2955달러가 캘리포니아 한인농장의 ‘곳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정휴 교수(포항공대)의 논문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한국사학보 제29호)에 따르면 1919년 5월~1920년 12월 10일 임정 재정수입 13만1909달러(상하이 실버 달러 기준) 가운데 재미동포 기부금이 45%를 차지했다. 당시 임정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로 감사장(1920년 10월 16일자)을 수여받은 재미동포 독립연금 최대 기부자 4명(김종림·임준기·신광희·김승길)이 모두 쌀농사로 부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 중 김종림은 최대 쌀부자로 ‘최초 재미동포 백만장자’였다. 그가 벌어들인 순익만 1918년 약 28만달러, 1919년 약 52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일시불로 2만달러를 내놓고 매달 3000달러씩 지원하기로 하는 등 비행학교 설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당시 김종림은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려는 한장호의 교육비를 이미 지원해주고 있었다.
| 임정 비행장교 박희성·이용근 |
박희성 추락사고 후유증으로 단명… LA 일본인 묘지 틈에 묻혀
이용근 평양서 교사하다 1916년 미국행, 5년 만에 임정 장교로
박희성(朴熙成ㆍ1896~1937)과 이용근(李用根ㆍ1890~?)은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으로 1921년 7월 18일 임정에 의해 비행장교로 임명된 인물들이다.
▲ 박희성 / 이용근
박희성의 유족에 따르면 그는 1910년대 후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다닐 때 형 박희도가 “학교에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미국으로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라”고 권유해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갔다. (박희도는 3·1 독립선언을 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나 일제말 변절을 이유로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박희성은 1920년 2월 윌로스 비행학교가 개교하자마자 입교해 정몽룡, 조종익 등 다른 한인 생도 23명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박희성은 1920년 말 김종림의 농원이 타격을 입으면서 비행학교가 기능을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새크라멘토 소재 미국인 비행학교로 옮겨 훈련을 계속했다. 박희성의 소개로 이용근도 3월부터 이 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박희성은 조종술이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에서 학비를 면제해 줄 정도였고, 당시 신한민보도 “우리 비행학생 중에 가장 이름이 높은 박희성”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1921년 4월 10일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 시험을 치르다가 사고를 당했다. 신한민보는 “마지막 6000척(尺)을 오르는 시험을 치르다가 불행히 비행기가 흠이 나 300척 위에서 떨어졌는데 박씨가 탔던 비행기는 전부 파상되고 박씨는 30분 동안 기절하였다가 천행으로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하체가 크게 상하여 의사의 수술을 받고 겨우 생명의 위험을 면하였더라”며 사고 정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기체사고를 일으킨 비행기는 새크라멘토 비행학교 소속 백인 비행교관 소유였는데, 그가 박희성과 이용근 등 한인학생들의 애국심에 감동해 무료로 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박희성은 입원 3주도 못돼 퇴원해 5월 22일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증 시험을 다시 치르고 기어코 합격했다. 그는 1921년 7월7일 국제항공연맹(FIA)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박희성이 다시 시험을 치르던 날 이용근도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역시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이용근은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 이전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의 미국인 비행학교에서 한장호, 장병훈 등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다 1920년 6월 17일 임정 비행학교로 옮겼다.
이용근은 1890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숭실중학(1906~1911)과 평양 관립일어학교(1911~1912)를 마친 후 3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16년 미국으로 갔다. 그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1~2년간 농장일을 하다 1917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해 흥사단 제80 단우가 됐다.
임정은 1921월 7월 14일 정례국무회의에서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키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포상금도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른 공식적인 임관명령은 이로부터 4일 후인 7월 18일에 있었다. 그러나 박희성은 추락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다 독립전쟁에도 참가하지 못했고 1937년 41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그가 영면해 있는 로스앤젤레스 도심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곳으로 변해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 기념식수를 하기도 했다.
박희성은 바로 그 기념식수에서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본인들의 묘에 둘러싸인 채 잠들어 있다. 묘비명 ‘Son of Korea(한국의 아들)’와 태극문양만이 외롭게 그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발굴]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은 누구
철도노동자로 美 이민, 쌀농사로 거부 돼
독립운동 최대 자금줄…'백미대왕'(Rice King)별명
김종림(1884~1973)은 재미동포 백만장자 1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신문인이자 사회봉사자였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빈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조국도 없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난세를 기회로 삼아 불과 10년 안팎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풍운아였다.
▲ 재미동포 첫 백만장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종림씨의 젊은 시절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야심찬 계획의 착수를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생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 자녀들조차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함경도 원산 출신인 그는 조선에 드리운 일제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1907년 1월 2일 앨러미다(Alameda)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유타주 솔트레이크(Salt Lake)시에 부설되던 철도 건설 노동자 신분이었다.
조국을 향한 그의 기부와 봉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해 공립협회에 의연금 10달러를 기부한 그는 이듬해 정월 공립신보의 신문기계 구입을 위해 30달러를 기부했다. 가난한 철도노동자로서는 큰돈이었다.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창립, 훗날 국민회로 통합된 민족운동단체이며 공립신보는 이 단체의 기관지이다.
김종림은 1908년 철도노동자의 삶을 청산하고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로서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주식태동실업회사의 전신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주관,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 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사업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종림은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식품이나 자신의 시간을 내놓으며, 이승만·이상설 등과 함께 한국에 고아를 돕는 구휼기관인 대동고아원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공립신보의 사무원으로 봉사했으며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인쇄인을 맡기도 했고, 후에는 국민보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특히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한인 2세를 위한 한글학교나 유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또는 시계를 선물했다. 훗날 비행학교의 최대 재정후원자로서 독립군 공군 양성의 대부가 되는 단초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 김종림씨의 두 아들 김진원(좌)과 김두원(우)씨. 이들 3부자는 모두 일본에 맞서 싸웠다.
이 무렵 김종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숙박업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아직은 사업가로서 탐색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3년 안창호·조병옥 등과 함께 흥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당시 각 1명씩이던 8도 대표 가운데 함경도 대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914년은 김종림의 인생도 바꾸었다. 그가 정확히 언제 농사에 손을 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이 해에 농사에 종사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세계대전으로 세계곡물시장의 수급과 가격이 급변하는 격랑을 헤치며 쌀농사를 통해 거부로 떠올랐다.
전쟁으로 유럽이 황폐화되면서 미국은 반사이익을 얻었는데 이 기간 캘리포니아에서 발흥한 3대 업종이 벼농사→수수농사→조선업 순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상업용 벼농사를 시작한 때가 1912년이므로, 김종림이 이 시점에 캘리포니아에 있으면서 쌀농사에 손을 댄 것은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김종림의 농토는 해를 거듭하면서 확장돼 1915년 최소 100에이커, 1916년 최소 280에이커, 1917년 최소 1030에이커, 1918년 최소 1800에이커, 1919년 최소 3300에이커로 커갔다.
쌀농사로 거부를 축적한 김종림은 ‘백미대왕(Rice King)’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기부에서도 ‘큰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해 1918년 신한민보 식자기계 구매를 위해 200달러를 기부했다. 당시 이 신문은 “이러한 연금은 10년 미국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교회 헌금, 무연고 동포, 병에 걸린 동포를 돕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던 그는 그해 3월 치과의사의 딸인 최원희(미국이름 앨리스 최)와의 결혼식에 5000달러라는 거금을 사용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림의 심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역시 조선의 독립이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18년 8월 29일 한일병합 8주년을 맞아 북가주 한인 85명이 김종림의 저택에 모여 넓은 마당에 식당을 준비하고 자동차 12대로 헤드라이트를 밝힌 가운데 망국의 한을 삼키며 독립운동자금을 걷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1919년 약 1년 동안 재미동포의 독립의연금이 3만388달러25센트였는데, 이 중 최대 기부자가 3400달러를 낸 김종림이었다. 이로 인해 김종림은 임시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 임시정부가 김종림에게 보낸 감사장.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독립운동사와 국군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결정을 한다. 독립군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하기로 하고, 즉시 이를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는 이 한 해에 약 5만달러의 지원금을 쾌척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수단으로 군사력을 중시했던 김종림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에 지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두 아들 모두 미국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루샨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작은 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했으니, 3부자 모두 군인이 돼 일본과 싸운 셈이다.
김종림의 조국 사랑은 한국이 독립된 후에도 계속됐다. 그의 독립운동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당시 재미동포들이 안창호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있었다는 통설과 달리, 두 지도자 모두를 지지하고 후원했다는 점이다. 도산 생전에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후원자이며 동지였던 김종림은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 제5차 연례 대표회 의장을 맡을 정도로 이승만과도 가까운 관계다. 그는 재미동포 사회에서 지도자 위치를 유지했다. 1946년 장남의 결혼식 하객이 400명을 넘는 미증유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국민보의 보도 역시 당시 김종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김종림은 1920년 10월 폭풍우로 사업에 결정적 타격을 입은 뒤, 비행학교 재건을 위해 분투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한 채, 89년에 걸친 파란만장하고 이타적이며 애국적인 삶을 뒤로 하고 197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한국정부는 김종림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 만인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잘 아는 장태한 캘리포니아주립대(UC Riverside) 교수(소수인종학)나 김지수 2009년 LA애국선열추모위원장 같은 인사들은 “김종림의 업적은 현저히 저평가돼 있다”며 “조속히 재평가돼야 옳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원 일반인 공동묘지에 영면해 있는 김종림의 유해를 오는 4월 13일 임정 수립 90주년에 맞춰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봉환할 계획이다.
/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