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는 우리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에베소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곳이라고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편지를 쓴 목적이 오늘 1절에서 6절에서 분명하게 나와 있어요.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범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회가 부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도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성도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행여나 성도들에게 죄가 있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목회자가 강단에서 죄를 설교한다는 건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목회자예요. 그렇게 안 여겨지시나 봐요. 그래서 이 사도 요한이 정말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이 죄로부터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어요. 그래서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죄로부터 멀어질까 또 죄를 싸워서 이길까 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썼다는 거예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측하면 일단 바울이 쓴 소아시아의 지역의 교회들이 쓴 편지를 봤을 때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죄가 만연해 있는 상태예요. 교회에 죄가 많거나 아니면 그들이 교회가 있던 마을의 도시에 죄가 만연해 있거나 어떻든 죄가 교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어요. 아마 사도요한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죄가 지금 소아시아에 있는 많은 교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범죄하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와 성도와 자신에게 가장 바라야 할 게 있다면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거죠.
여러분이 교회를 정말 사랑한다면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고,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죄 짓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목회자가 가져야 될 가장 당연한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똑같은 마음이었어요. 바울이 쓴 서신서에도 나타났듯이 사도 요한도 똑같은 마음이어서 어떻게 하면 교회와 성도들이 죄로부터 멀어지게 할까 이런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문제의 해결자이기 때문인 거죠. 그러니까 죄가 교회에 악영향을 미칠 때 그 죄로부터 교회를 구원해낼 수 있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 또 중재자라고 1절에서 말해요. 대원자는 다른 말로 하면 중도자 중재자라는 거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할 분이 계신데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 중재자라고 기록해 놨습니다.
그러면 송아시아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비결은 뭐예요?
예수님을 믿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거죠. 중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또 믿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의 중재로 말미암아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있는 죄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을 하나라고 오늘 1절과 6절에서 말해요.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같은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날마다 알아간다는 것은 지금 죄와 싸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 지킨다는 것은 죄와 지금 싸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와 아무런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으로는 죄를 쌓을 수 없어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죄와 싸울 수 있는 거죠.
여러분 죄는 우리가 가진 우리 육신으로는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우리 앞에 있는 죄들은 우리 육신으로는 싸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싸움이 대신 싸워줄 또 싸울 때 힘이 되어줄 것이 필요한데 그게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성도들이 죄를 싸우기 원하는데 하나님과 교재가 없으면 죄와 못 싸는 거예요. 죄와 싸우기 원하는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죄와 싸울 수 없어요. 죄와 싸우기 원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죄와 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죄와 싸워서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님 죄와 멀어지는 길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죄와 멀어지는 길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또한 죄와 멀어지는 길이에요. 죄와 멀어지 않고서는 성도의 본분을 절대로 우리가 행할 수 없습니다. 죄와 싸우는 사람들이 성도의 본분을 행할 수 있어요. 그래서 소아시아 교회들에 대해서 이 죄에 대해서 기록하고 또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동일한 마음을 마음의 기대감을 갖습니다. 여러분이 저와 싸우기를 바래요.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죄악들과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죄악들과 싸워서 이기셔야 돼요.
어쨌든 어쩌면 예배는 그 죄와 싸움의 결과물일 수도 있어요. 한 주간 동안 죄와 싸운 성도가 예배할 때 그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거예요.
근데 우리가 죄와 싸우지 않고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 죄와 함께 예배하는 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가 예배를 통해 누려야 될 많은 것들을 못 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야 될 이야기가 죄이기도 하고요.
어떨 때는 가장 많이 듣기 어려운 게 죄이기도 해요. 그리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도 또한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그 어떤 영적인 진보와 진전도 맛보기 어려워요. 조금은 인간적인 역사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어요. 그냥 사람들이 모여도 재미는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상은 전진해 가기 어려워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싸우다가 지치고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서 신앙이 답보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신앙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떠나 오랜 시간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 보면 죄와 싸우지 않는 삶이 있는 거예요.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 백성 됨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악들과 잘 싸워서 이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