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길라잡이>
노아가 생명이 있는 온갖 것들을 방주에 태우고 문을 닫자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 40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자유인으로 광야에서 보낸 정화의 시간 40년.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보낸 40일.
나이 사십 불혹을 넘은 지도 오래고 노안도 있지만, 미혹하는 세상의 온갖 유혹은 더 선명하게 보인다.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화와 준비가 필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시간은 온전히 그 정화와 준비만을 위하여 쓰이지 못한다. 다른 일에 허비되는 시간의 비중이 훨씬 더 크다. 문을 닫아걸고 수도자처럼 살아 생각이 더 성숙해진다 하더라도 그만큼 그 그림자 또한 길게 늘어날 것이다.
사순 시기의 첫 주일을 보내며 이미 사순절의 며칠이 지나버렸음을 안타까워하다가, 40일이라는 정수를 채우지 못할 바에야 그 노력도 의미도 내려놓자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어차피 상처받을 사랑을 왜 하나? 어차피 다시 자랄 잡초인데 왜 뽑나? 어차피 나의 선함이 세상의 악을 이기지 못하는데 어쩌나?
공생활의 시작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만 채우고 그분을 떠났고, 심지어 그분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도 떠났다. 그리고 임금은 가시관을 쓴 죄인의 꼴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한 모습으로 생을 끝냈다. 성경을 덮으면 그 시절 일들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과거가 되어 끝난 것 같지만, 사실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 끝을 이어가고 있다.
십자가 처형으로 끝나는 하느님 나라의 이야기가 ‘나’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숫자를 채우지 않아도, 매번 넘어가는 유혹을 달고 살아도, 내 스승의 메시지는 오늘날까지 ‘나’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첫댓글 하늘나라의 완성은 이미 와 있다고 하시지만 우리에게 완성은 아니니 끝까지 가야하는 현재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완벽함을 종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후회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다시 또 한 번 시도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다짐이요 근본으로 되돌아가려는 간절함의 의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