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의 동쪽 물줄기를 모아서 밀양강의 상류를 이루는 동창천(東倉川)은 비단 폭 같이 아름다워서 비단내, 금천(錦川)으로 불리었다.
금천을 끼고 있는 금천면 신지리에는 선암서원과 운강고택. 운남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만화정 등 밀양박씨 집안의 고택들이 즐비하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선조 때인 1577년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와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졌다.
1868년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1878년 박하담의 후손들이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쳤는데 그 건물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도 '선암서당'의 현판이 붙어 있다.
소요당(逍遙堂) 편액의 글씨가 낯익어 살펴보니 역시 미수 허목의 글씨다. 근래에 새로 만든 것 같은 현판은 화려하게 꾸몄다.
배롱나무에 꽃 피었을 때 저 문가에 앉아 푸른 금천을 바라보고 싶다.
장판각
선암서원 장판각에는 보물 제917호인 배자예부운략 판목(排字禮部韻略 板木)과 문집의 판목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배자예부운략'은 시나 운문을 지을 적에 운(韻)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초사전이라고 한다. 주로 과거에 응시한 선비들이 참고하기 쉽게 만들어졌으며, 제목에 과거를 주관하던 부서인 예부(禮部)의 이름을 붙였다.
장판각에 보관되었던 것은 '배자예부운략'을 인쇄할 수 있는 판목으로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복각한 만력판 12매와, 숙종 5년(1679) 박동부에 의해 다시 복각된 강희판 150매를 합해 162매인데 현존하는 수량은 152매이다.
지난 2005년부터 안동에 소재하는 한국국학진흥원 선암서원 판각실로 옮겼다.
운강고택(雲岡古宅)
조선 세종 때 소고 박건(嘯皐 朴乾)이 청도 수야에 입향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중추적인 활동을 한 이래 밀양박씨 소고공파는 청도의 중심 성씨로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다.
박건의 장남인 박하담(朴河淡, 1479~1560)이 중종 때인 1520년경 청도 금천에 낙향하여 서당(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터에, 후손인 성경당(誠敬堂) 박정주(朴廷周,1789~1850)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을 건축한 것이 이 고택의 시작이다.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1814~1875)이 고택을 크게 중건하였는데 이후 그의 호를 따서 고택을 운강고택이라 불렀다.
운강고택은 크게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구분된다. 큰사랑채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2개의 큰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옆에는 운강의 아들과 손자가 지은 운남고택, 명중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daum지도 캡처>
건물 배치평면도 - 돌베개「답사여행의 길잡이 팔공산 자락」편 복사
안채 마루에 앉아. 운강고택에 대한 해설은 청도문화원 박윤제 원장께서 직접 해주셨다. 구수한 입담을 곁들여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을 들려주셨다.
안채 안방과 대청 사진 :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안채 뒤뜰. 매화가 피기 시작했다.
만화정(萬和亭)
청도답사의 마무리는 운강고택의 별서 정자인 만화정이다.
금천을 오른쪽에 낀 벼랑 가에 1856년 운강이 지은 정자와 부속 건물들이 작은 동산을 등지고 있다.
누마루에 올라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여름날의 시름쯤은 모두 사라질 것 같다.
금천(동창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생기면서 만화정의 풍취는 많이 망가졌다.
만화정에서 마무리는 학이시습님께서~~ ^^
보리 고개
- 이봄은 슬픈 계절 -
박훈산
아지랭이는 손에 감돌 듯
저 언덕을 타 넘어 왔는데
볼수록
나의 얼굴은 추하여라.
버들피리 불면서
새싹을 주워 보려던
푸른 나의 희망은
이미 멀어진 어린 날
봄은
보리 고개
숨가쁜 계절
꽃은 제 멋대로 피어라.
가난한 마음 골짝에
스며든 앓는 가슴아
나는 지금
어머니를 기다린다.
선암셔원 옆 공원에 시비가 서 있다. 박훈산의 <보리 고개> 시인도 시도 생소한데 시가 처연하다.
이 화사한 봄날이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처연한 슬픈 계절이 이었던 때였다는 것이 참......
만화정을 끝으로 1박 2일 답사를 마무리하고 작별 후, 전날 참여치 못했던 답사지를 홀로 돌아보았다.
옛 청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화양읍에는 청도읍성과 객사인 도주관(청도의 옛 이름이 道州였다. 향교 그리고 석빙고가 한 동네에 모여있다.
청도 석빙고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석빙고가 경북에만 6곳이 남아있다. 안동을 제외하면 청도, 현풍, 창녕, 영산, 경주 모두 가까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빙고 위를 덮었던 봉토는 모두 유실됐고 홍예보 사이를 덮었던 판석들도 대부분 사라져 원형을 많이 잃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전체 석빙고의 골격과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다른 석빙고들은 봉토가 덮여있고 대부분 내부에도 들어가 볼 수 없는데 말이다.
석빙고 앞 작은 비석에는 석빙고 축조와 관련된 사항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숙종 39년(1713) 2월 11일에 시작하여 5월 5일에 마쳤다고 한다. 공사에 참여한 직종별 인원. 자재와 물품 수량, 관계자 이름과 직책 등이 적혀있다.
석빙고 옆에는 청도읍성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이다. 단면을 잘라 놓으니 성벽 내부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청도읍성 둘레가 약 1.9km 정도의 읍성으로 성내에 동헌, 객사와 그밖에 관청 관련 검불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근래에 새로 복원을 하고 있다.
어디에나 있는 수령들의 선정비가 이곳에도 즐비하다.
복원된 성문에는 옹성도 둘렀다.
도주관(道州館)
현종 11년(1670)경 건립되었으며, 청도의 옛 이름인 道州의 이름을 붙였다.
다른 지역의 객사들처럼 중앙의 정당(政堂)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두어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고, 좌우 익사(翼舍)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좌익사가 철거되어 반쪽 날개만 있었는데 최근 좌익사를 복원하였다.
도주관 앞에도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봉기동 삼층석탑
8세기 중엽은 통일신라 석탑의 완성기이다. 7세기 후반 육중한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첫머리로 시작하여, 나원리 오층석탑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을 거치면서 몸매를 다듬더니, 751년에 창건된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완벽한 몸매의 완성을 이루었다.
석가탑과 비슷한 8세기 중엽에 세워진 술정리 동 삼층석탑(창녕), 갈항사지 삼층석탑(758년 김천) 그리고 봉기동 삼층석탑(청도)에서는 완성기 통일신라 석탑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만남은 즐거워~~
올헤 첫 답사. 운문사 아래 숙소에서 아직은 좀 쌀쌀했지만, 밖에서 즐거운 밤을~~ ^^
답사 다녀와서 kbs '다큐3일'에 청도 한재 미나리 편이 나왔다. 식사 때마다 맛있게 먹었던 미나리라 반가웠다,
사실 청도에 미나리가 유명하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언양 미나리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
첫댓글 청도 석빙고 속에 빠진 추임새님 그. 림. 자.~ *^^*
ㅋㅋ 그러네요, 내가 나를 찍다니~~ ㅎㅎ
같은 경문관 기수인 박윤제 회장님을 여기서 보네 이집트 애들 보니 재작년이구먼
오~ 문화원장님이 아는 분이시네요~~ ㅎㅎ
근데 "재작년"은 무슨? 지난달 답사인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