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에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 쓴 「East of Eden」이라는 소설이 있다. 성경의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주제로 당시의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소설보다는 1955년에 만들어진 '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인기 있었던 제임스 딘(James Dean)이라는 배우가 칼(Cal)이라는 이름으로 가인의 역할을 맡으며 악을 대변한 반항적인 모습과, 아버지에게 소외된 그의 증오와 갈등을 현대인의 오뇌로 승화시켜 잘 소화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짙은 인상을 준 작품이다.
가인이라는 인물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구약에서 창세기 4장에만 국한되어 나오는 인물이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자기의 친형제를 죽인 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보여 주는 '인간의 죄악된 삶의 모습의 표상'이라는 딱지를 단 채, 우리의 기억 속에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자식 속에서 '악'을 대변한 자손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이고 인물이지만 창세기 4장을 다시 한번 보면서 우리들에게 도전의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가인 스토리가 나오는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1절, 서술(가인의 탄생) (2) 2~5절, 서술(가인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 (3) 6~7절, 대화(여호와와 가인의 대화) (4) 8절, (대화) 서술(가인이 아벨을 죽임) (5) 9~15a절, 대화(여호와와 가인의 대화) (6) 15b~16절, 서술(가인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 (7) 17절, 서술(가인의 후손의 탄생)
위의 구조를 보면 1, 7번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 대칭을 이루고 있고, 2, 6번과 3, 5번이 또한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번만이 대칭 구조를 깸으로 홀로 서서 전체 구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가인 스토리의 중심 장면은 바로 그가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부분이다.
1. 가인의 탄생(창 4:1)
본문의 시작은 창세기 3장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다. 또한 4장 1절은 3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3:15)에 대한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보여 주면서 가인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2. 가인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4:2~5)
가인의 탄생에 뒤이어 아벨이 탄생하고 각자 직업을 얻었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다. 시간이 지나 각자 직업대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 특별한 강조점 없이 배경 설명으로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설명을 해 나가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4절 후반부터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4b~5)라고 문제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여기에서 갖는 의문은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뚜렷이 발견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웬함(Wenham)이라는 학자가 정리한 것을 참고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은 농사하는 자보다는 양 치는 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3:17에 보면 땅에서 일하는 것이 인간이 종신토록 해야 하는 일로 규정지어 있으므로 직업 자체에 선호도가 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2)동물을 제사하는 것이 식물 제사보다 가치가 있다는 제안이다. 물론 레위기에 보면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어 있으나,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도 엄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논지로 삼을 수는 없다. 또한 3~4절에 나오는 '제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민하'와 동일한 단어로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인 제물'로 번역되었으나, 좁은 의미에서 이 단어는 '소제'를 나타냄으로 가인이 소제를 드렸다고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3)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점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본문이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4)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는 분명히 아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창세기 4장의 본문을 예배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5)창세기 4장 본문의 의도를 위의 요소들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올바른 예배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드린 예물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었느냐보다는 어떠한 질의 것이었느냐가 그들의 내적인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간의 차이이기는 하나 가인의 경우 그는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의 경우는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림으로 '첫'이라는 단어가 더해짐으로 차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은 것에 대한 가인의 반응을 보여 줌으로 가인의 마음 자세가 의롭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여호와께 심히 분노했으며" 결국 아우를 죽임으로 "자신의 아우에게도 심히 분노했음"을 알 수 있다.
3. 여호와와 가인의 대화(4:6~7)
5절에 나타난 반응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대화의 문을 여신다. 그를 질책하시며 경고를 주신다.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인이 선을 행하면 어찌 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러나 그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공격하기 위해 문 앞에 웅크린 무서운 짐승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가인을 정복하려 든다는 경고를 주시며, 가인이 오히려 죄의 욕망을 극복하고 죄를 다스려야 함을 가르쳐 주신다.
4. 가인이 아벨을 죽임(8)
하나님의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지 8절은 너무나 간결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가인이 자신의 죄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행동에 옮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살인 장면, 그리고 낙원을 떠난 인간들의 죄악된 삶의 모습이라는 장황한 기대와는 대조적으로 살인 행위 자체는 너무나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무엇을 고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저자는 급히 가인의 행동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되어 있다.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은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행해진 "계획된 살인"임을 증명하며(참고; 신 22:25~27), 이것은 무죄한 피를 흘린 경우이므로 율법에 의하면 당연히 사형 죄에 해당된다.
5. 여호와와 가인의 대화(9~15a절)
이 부분은 여러모로 창세기 3장과 비슷하다.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은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질문으로 시작하신다(3:9). 여기에서도 가인에게 질문으로 시작하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아담의 답은 그런 대로 정직한 것이었는데(3:10), 가인의 답변은 그야말로 전면 부정을 하고 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과장된 부정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의 유죄를 더 드러내고 있다.
구조상으로 보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장면이 중심이지만(8절), 너무 짧기 때문에 실제로 본문의 무게중심은 9~15절에 많이 쏠려 있다. 여호와께서는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으로 가인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사건은 정점에 이른다. 3장에서는 뱀과 땅만이 저주를 받았는데(3:14, 17), 여기에서는 가인이 저주를 받으므로 그의 죄의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직업과 죄와 심판이 다 '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땅'에서 농사하는 자였고, '땅'의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땅'에 아우의 피를 흐르게 했고,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했으며, 그 결과 '땅'에서 저주를 받고,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13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가능한데, 하나는 개역한글판 번역대로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이다. 가인이 하나님이 주시는 판결에 대한 가혹함을 불평하는 어조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내 죄악이 용서 받기에는 너무 중하다."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적어도 가인이 자신의 죄에 대해 인정하고 벌을 받으려는 자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아보니"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죄벌'(punishment)과 '죄악'(iniquity) 두 가지로 다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 성경 역본들은 전자를 따르고 있으나, 칠십인역과 같은 고대 역본들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15절에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해 주시는 것으로 보아 후자를 따르는 것이 더 본문에 적합하다. 또한 가인이 땅을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지 않고 놋 땅에 거했다는 자체가(16절) 후자의 해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13절에 관해서는 한국 성경 번역을 따르지 않고 가인이 자신의 죄의 중함을 인정하는 쪽으로 보고자 한다.
14절에서는 가인 자신이 하나님의 벌을 달게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 자신을 만나는 자들이 자기를 죽이려 들 것이라는 것을 고한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벨과 연결된 후손들이 이미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복수하려 들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가인의 우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보복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칠 배')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다.
6. 가인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15b~16절)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표'라는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바른 '피'라든가(출 12:13), 라합의 '붉은 줄'(수 2:18)에 관계되어 쓰였던 단어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표'를 주셨는가에 대한 끝없는 추측들이 제시되어 왔는데(예: 이마의 표, 머리 스타일, 문신, 이마의 뿔, 개 등), 이제까지 제시된 설명 중에서 가장 본문에 적합한 것은 17절과 연결시켜 그가 쌓은 성을 '도피성'의 개념으로 보는 견해이다.
도피성은 살인한 자가 판결을 받기까지 보수자의 손에서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피할 수 있는 성이다(민 35:11~12). 가인에게 '표'를 준 까닭도 보수자의 손에서 죽음을 면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따라오는 구절이 가인이 에덴 동편의 놋 땅에 거하며 거기에서 성을 쌓고 자손을 낳고 살았다는 것이다(16~17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보호책의 '표'는 바로 이 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이 후에 모세오경에 나오는 도피성의 모체라고 볼 수 있다(참고; 민 35:9~34; 신 19:1~13). 비록 동생을 살해한 가인이지만 그의 죄에 대한 인정과 회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에덴의 동편에 위치한 이 가인의 도시에도 문명이 꽃필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볼 수 있다(4:18~24).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가인같이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요한일서 3:12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요한일서 3:9~12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자녀들을, 의를 행치 않는 자와 사랑치 않는 자라고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의와 사랑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에게 속한 자녀의 대표로 뽑힌 사람이 가인이다. 그가 아벨을 죽인 까닭은 아벨이 의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많은 경우에 원인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죄의식, 열등의식, 자격지심, 의롭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분노 등의 발로 때문에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심리학 용어로는 '투사'(projection)라는 단어를 쓴다. 자기 마음에 미움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미워할 뿐 아니라 상대방도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쉬운 우리말로는 '제 눈의 안경'(?)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선입관과 편견을 가지고 남을 대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아벨은 의로웠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요한은 여기에 덧붙여 세상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나, 그가 꾸짖고 있는 것은 믿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움을 지적하고 있다. 요한의 결론은 단호하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는 이 말씀을 각자 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 삶의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남들 때문이거나 다른 믿는 형제 자매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기인할 수가 있음을 살펴보며 우리 자신이 먼저 의로운지를 항상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하는 이슈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도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요 4:23)는 답을 쉽게 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1:4에 따르면 우선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는 '믿음'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세기 4장 본문에서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며 "죄를 다스려야 함"을 강조하신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삶의 열매"(마 7:20 참고)로 그 사람의 마음의 태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예배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와 직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우리의 예배를 열납하신다. 결국 "믿음으로"라는 말도 우리의 삶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 아벨은 "믿음"만 있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있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행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삶은 가면 갈수록 올바른 삶의 모습을 요구하며, 그 삶은 우리의 마음의 자세와 믿음의 겉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신다. 요한계시록 6:9~10에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신원하여 주신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과 동시에 위로함을 준다. 점점 전도가 어려워지는,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가장 값있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사는 삶"(도전)이며,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은혜가 있음(위로)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는 가장 멋진 삶을 살도록 하자. 복음을 방해하는 어떤 일에도 시간을 낭비하거나, 정력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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