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9월의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中宗)이 즉위하였다.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시달리던 중종(中宗)은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즉위 10년(1515년)에 조광조(趙光祖)를 요직에 등용하고 고속 승진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감각이 부족한 조광조는 왕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리학의 이상(理想)과 명분을 실현하도록 왕을 압박하여 왕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중종(中宗) 14년(1519년) 10월, 조광조는 117명에 달하는 반정공신 중에서 부적격자를 제외하라고 요구하여 결국 76명의 훈작을 박탈하고 하사했던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였다. 이를 위훈삭제(僞勳削除)라 한다.
중종(中宗)은 반정공신들에 대한 공격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14년(1519년) 11월, 훈구 대신들에게 밀명을 내려 조광조 세력을 대거 체포하였다. 조광조(趙光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사형당했고 많은 사람이 유배 또는 파직되었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중종의 뜻에 적극 따랐고 좌의정 안당(安瑭)은 중종을 간곡히 만류하다가 파직당했다.
안당(安瑭)은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도입한 대학자 안향(安珦)의 8대 손(孫)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안당(安瑭)의 부친 안돈후(安敦厚)에게는 정실 부인 박씨와 비첩(婢妾) 중금(仲今)이 있었다. 오늘날 학계의 통설에 의하면 안돈후는 55세인 1475년에 상처(喪妻)했는데 이미 늙어서 재혼하지 않고 친형 안중후(安重厚) 집의 여종 중금(仲今)을 첩(妾)으로 들였다고 한다. 둘 사이에서 딸 감정(甘丁)이 태어났고 감정(甘丁)은 자라서 평민 송린(宋璘)과 혼인하여 1496년에 아들 송사련(宋祀連)을 낳았다고 한다. 중금(仲今)이 안씨(安氏) 집안의 노비였으므로 조선의 국법에 따라 감정(甘丁)과 송사련 역시 안씨(安氏) 집안의 노비였다. 첩의 자식을 서얼(庶孼)이라 했는데 양인(良人) 첩의 자식은 서(庶), 천인(賤人) 첩의 자식은 얼(孼)이라고 했다.
안돈후는 정실 부인 소생으로 세 아들을 두었는데 3남이 안당(安瑭)이다. 안당(安瑭)은 얼자(孼子)인 송사련에게 글을 가르쳤고 송사련은 잡과(雜科)인 음양과(陰陽科) 시험에 합격하여 관상감(觀象監) 종5품 판관에 올랐다고 한다. 조선의 과거제도에서 서얼(庶孼)은 기술직을 선발하는 잡과(雜科)에만 응시할 수 있었다.
안당의 아들 삼형제는 중종(中宗) 14년(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곧 모친상을 당하여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렀다. 안당의 큰아들 안처겸(安處謙)은 부친 안당이 기묘사화 때 파직당한 것에 울분을 품고 있었다. 중종 16년(1521년) 10월, 안처겸은 가까운 벗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기묘사화 때 숙청을 주관한 남곤과 심정은 간신이므로 관직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토로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은 안처겸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고 안처겸 모친의 장례식에 왔던 조문객 명단과 장례 작업에 동원했던 인부들의 명단을 역모 가담자 명단이라고 제출하였다.
대대적인 추국에서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여러 사람이 역모를 시인했고 자백을 거부하다 여러 사람이 맞아 죽었다. 안처겸과 그의 동생 안처근(安處謹)과 부친 안당을 비롯하여 십여 명이 사형당하고 백여 명이 유배되었다. 안당의 집안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였고 순흥 안씨 문중의 가까운 혈족들도 다수 희생되었다. 다만 안당의 차남 안처함(安處諴)은 형 안처겸의 불평을 듣고 부친에게 고했음이 인정되어 사형을 면하고 노비 신분으로 강등되어 유배 갔다가 석방되었다. 송사련은 일등공신이 되어 천인(賤人) 신분에서 벗어났으며 안당 집안의 재산과 노비를 차지하고 5품계를 승진하여 정3품 절충장군에 올랐다. 이 사건을 신사사화(辛巳士禍)라 한다.
그 후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권세를 장악했는데 중종 22년(1527년)에 남곤(南袞)이 병사하고, 심정(沈貞)은 외척 김안로(金安老)와의 알력으로 중종 26년(1531년)에 실각하여 사형당했다. 하지만 송사련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은 종실에 시집갔고 아들 5형제도 모두 명문 집안에 장가들었다.
송사련의 4남 송익필(宋翼弼, 1534 ~ 1599)이 학문에 뛰어나서 명종(明宗) 14년(1559년) 26세에 소과(小科)에 급제하였다. 그런데 천첩(賤妾)의 자손인 송익필에게 과거를 허용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조정 내에서 제기되어 합격이 취소되고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었다. 송익필은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坡州)로 내려가 학문 연마에 힘쓰며 서당을 열었다.
이듬해인 1560년 가을 대사헌을 지낸 광산 김씨 김계휘가 13세 된 아들 김장생(金長生)을 맡기면서 많은 제자들이 들어왔다. 송익필(1534년생)은 성혼(成渾, 1535년생) , 심의겸(沈義謙, 1535년생) , 이율곡(李栗谷, 1536년생) , 정철(鄭澈, 1536년생)과 각별하게 지냈는데 이 모임이 서인(西人)의 모태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붕당(朋黨)은 선조(宣祖) 8년(1575년)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사실상 그 이전에 파주에서 서인(西人)이 먼저 태동하였고 그 중심은 송익필이었다. 서인(西人)은 남곤, 심정 등 중종반정을 주도한 훈구파의 노선이었고 동인(東人)은 조광조의 맥을 잇는 사림파의 노선이었다.
명종(明宗, 재위 1545년 ~ 1567년)이 즉위한 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처형된 사림(士林)들의 신원(伸冤)이 이루어졌고 명종(明宗) 13년(1558년)에는 이미 고인이 된 남곤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명종(明宗) 21년(1566년) 안처함의 아들 안윤(安玧)이 조부 안당의 신원(伸冤)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역모의 누명이 벗겨지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1521년의 신사사화(辛巳士禍)는 송사련의 무고와 조작으로 인정되어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고쳐 불렀다. 훗날 편찬된 선조실록은 조광조를 비호하였던 안당을 제거하고자 남곤과 심정이 송사련을 사주했다고 기록하였다.
선조(宣祖) 18년(1585년) 안처겸(安處謙)의 아들 안로(安璐)의 처 윤씨(尹氏)가 송사련의 후손 70명이 안씨 집안의 노비임을 확인해 달라고 장예원(掌隸院)에 소송을 제기했다. 사유는 다음과 같다. 송사련의 할머니 중금(仲今)은 노비 신분으로 안돈후의 첩이 되기 전에 이미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 감정(甘丁)을 낳았다. 감정(甘丁)은 안돈후의 핏줄이 아니고 감정의 아들 송사련도 안돈후의 핏줄이 아니다. 중금이 안씨 집안의 노비였으니 감정과 송사련도 안씨 집안의 노비였는데 면천(免賤)된 사실이 없다. 송사련은 주인을 역모로 고변해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키고 그 공으로 면천(免賤)되었는데 신사무옥(辛巳誣獄)은 이미 송사련의 조작으로 밝혀졌으니 송사련의 면천은 무효이다. 따라서 송사련의 후손 70명은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還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씨 측은 송사련이 신사무옥(辛巳誣獄) 이전에 면천(免賤)되었음을 입증하지 못하자 신사무옥으로 양반이 된지 60년이 넘었으므로 소송은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여러 법령을 토대로 치열한 법정 싸움 끝에 선조(宣祖) 19년(1586년) 7월 15일의 판결에서 안씨가 승소했다. 송사련은 주인을 모함한 반노(叛奴)이므로 송사련의 후손 70명을 안씨 집안의 노비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은 동인(東人) 이발(李潑)이었다. 일설에는 이발(李潑)이 서인(西人)의 핵심 인사 송익필을 제거하기 위해 송사련의 면천 기록을 인멸하고 안씨 일가에게 노비 소송을 제기하도록 사주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판결이 나자 송익필 등 송씨 일족은 모조리 도망 갔고 선조(宣祖)는 체포령을 내렸다. 안씨 일가는 송사련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추노꾼을 고용하여 도망간 송씨 일족을 추적하였다.
파주(坡州)에서 도주한 송익필은 멀리 산골에 은신하여 상황을 역전시킬 비책을 강구했다. 3년 후인 1589년 이른바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이 터졌는데 정여립(鄭汝立)은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서인(西人)의 고변으로 시작된 정여립(鄭汝立) 사건으로 동인(東人)은 천여 명이 사형이나 유배를 당하였다. 특히 송씨 일족을 노비로 환천(還賤) 시킨 이발(李潑)은 본인과 82세 노모와 10세 아들까지 고문 받다 죽고 형제를 포함한 일족이 모두 처형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송씨 일족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신분을 회복하였다. 이 사건의 추국관은 송익필의 막역한 친구 정철(鄭澈)이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알려진 이 사건은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역모사건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물증이 없어서 사건의 진실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송익필이 기획하고 조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