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체는 모든 곳에 두루 하여 모든 작용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작용이 일정하지 않을 뿐이요,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는 사람으로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 생사를 건너려 하거든, 진심의 본체와 묘한 작용이 있는 곳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진심직설(眞心直說)】, 김달진 역주>
발밑을 보라
간화선의 체계를 수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어록인 『대혜보각선사 종문무고(大慧普覺禪師宗門武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송나라 때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가 제자들과 함께 밤길을 걷고 있다가 갑자기 등불을 확 불어 꺼버렸다. 그리고 물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삼불(三佛)로 알려진 세 명의 제자 중 불감혜근(佛鑑慧懃)은 “채색 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라고 말했다. 이어 불안청원(佛眼淸遠)이 “쇠 뱀이 옛 길을 가로 지르네”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불과원오(佛果圓悟)가 “발밑을 보라”고 했다. 깨달음을 위해 납자들이 모여 수행하는 선방에 걸려 있는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이렇게 하여 또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밤길에는 당연히 발이 딛고 있는 땅을 보고 걸어가야 한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 또한 그렇다. 내가 가는 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한 발짝씩 나아간다. 실제로 칠흑 같은 어둠보다 더 어둡다. 내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거의 무방비 상태로 걷는다. 경계와 경계의 연속임에도 방비하지 않아 무수한 업장이 쌓여만 간다. 자업자득임에도 스스로 한탄할 뿐이다. 다리 밑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마음을 말한다. 나아가 구름처럼 떠다니며 삶을 거친 바다로 내모는 이 마음의 근본인 자성 또는 불성을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전자인 마음에 끌려 다니고, 깨달은 자는 이 자심의 근원을 바라보며 삶을 초월해 유유자적하다. 마음만이라도 지켜본다면 마음의 근원으로 직입(直入)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불일보조국사 지눌(佛日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은 그 지점을 명확히 알고 우리 범인들을 바로 안내하고 있다. 수많은 선어록보다 『진심직설』 한 권만 읽어도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하다.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언급한다면 이 진심(眞心)에 해당할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제불조사들이 깨달은 내용과 가르침이 오직 진심이다. 그 내용은 불성이자 자성인 진심의 바탕, 찾아가는 행로와 완성, 그리고 진심의 공덕에 대한 간명하고도 명확한 가르침이다. 전체는 서문과 15장으로 이뤄져 있다. 삶이 바쁜 이들을 위해 여기에 또한 핵심을 싣는다.
①‘진심의 바른 믿음’에서는 『화엄경』에서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 일체의 선근을 길러낸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삼는다. 유위의 인과를 믿는 교의 문에 비교하여 일체 유위의 인과를 믿지 않고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조사의 문을 설한다. ②‘진심의 다른 이름’에서는 진심에 대해 “허망을 떠난 것이 참이요, 신령하게 아는 것이 마음”이다. 이어 경론과 선(禪)에서 말하는 진심을 열거한다. ③‘진심의 묘한 본체’에서 진심은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가진 부처의 성이요, 또 모든 세계가 발생한 근원”이다. ④‘진심의 묘한 작용’에서는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영원한데,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오묘한 작용이 나타난다”고 한다. 일상에서 행동하고 베푸는 것, 동서로 가는 것, 밥 먹고 옷 입는 것,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 놀리는 것, 좌우를 돌아보는 것 등이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이다. ⑤‘진심의 본체와 작용의 같음과 다름’에서는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고 한다. 이를 물과 물결에 비유하여 움직이지 않음과 움직임에 차이가 있으나 물결밖에 물이 없고 물밖에 물결이 따로 없어 젖는 성질에 의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⑥‘진심이 미혹 속에 있는 경우’에서는 이러한 진심의 본체와 작용이 사람마다 다 갖춰져 있는데 성인과 범부가 왜 다른가에 대해 대답한다. 이에 대해 “범부는 망령된 마음으로 사물이 참이라고 그릇 인정함으로써 깨끗한 제 성품을 잃어버리고 물(物)의 막힌 바가 된다”고 한다. 진심은 번뇌에 싸여 있을지라도 결코 그것에 물들지 않는다. ⑦‘진심을 가리는 망념을 쉼’에서는 어떻게 하면 망념을 벗어나 성인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상대를 짓는 마음과 대상을 함께 잊으면 된다. “무심의 법으로써 망념을 다스리면 된다”고 하며, “마음 자체가 없다고 무심이라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에 물(物)이 없음”이라고 한다. 무심은 망심이 없는 것이며, 진심의 묘한 작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설하는 무심 공부의 유형 10가지를 밝히고 있다.
⑧‘진심의 네 가지 위의’는 앉아서 익히는 것을 포함한 행주좌와(行住坐臥) 사의(四儀)에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앉아서 하는 것이 좋다. ⑨‘진심이 있는 곳’에서는 “진심의 묘한 작용은 대상을 따라 감응되는 대로 따라서 나타남이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다”고 한다.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 ⑩‘진심은 생사를 벗어남’에서는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을 진실로 안다. 따라서 “생사의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의 없음을 체득함만 못하고 생사의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의 없음에 계합함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의 없음을 활용함만 못한 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⑪‘진심을 드러내는 근본공부와 보조공부’는 무심으로 망념을 쉬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여러 가지 선을 익히는 것으로 보조를 삼는다. 선행도 인과에 집착하지 않는 무심의 행이어야 한다. ⑫‘진심의 공덕’에서는 “유심으로 인(因)을 닦음은 유위의 과보를 얻고 무심으로 인을 삼으면 성품의 공덕을 나타낸다”고 한다. 따라서 무심의 공덕이 유심의 그것보다 크다. 모든 공덕은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⑬‘진심의 성숙과 무애를 시험함’에서는 경계를 만나면 생각을 잃을 수 있으므로 소를 기를 때처럼 잘 다루어 이끄는 데로 따를지라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듯 공력을 드려야 한다. 진심을 시험할 때는 평소 미워했거나 사랑했던 대상이 면전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 익지 못한 것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도의 마음이 익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밭가의 흰 소가 곡식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다. ⑭‘진심의 아는 바 없이 앎’에서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탐욕과 분노와 우치의 삼독(三毒)을 일으키면 그것은 망심이다. 성인과 범부, 더럽고 깨끗함, 단멸과 영원, 이치와 일, 생과 사, 동과 정, 가고 옴, 아름답고 추함, 선과 악, 원인과 결과 등의 갖가지 차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평상의 진심이라고 한다. ⑮‘진심이 가는 곳’에서는 “온 대지가 사문의 한 짝 바른 눈이며, 온 대지가 하나의 절이라, 이것이 이치를 깨달은 사람의 안심입명처”다. 또한 “시방세계는 오직 한 진심이라 온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시현문(示現門, 중생 제도를 위해 석가가 모습을 나타낸 것) 가운데서 마음대로 가서 태어나더라도 장애가 없다”고 한다. 생사에 자유 자재한다.
보조국사의 여러 법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문을 한글로 풀이한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마음이 온갖 변화를 부려 삶의 모든 조건들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현대문명은 명백한 한계에 처하게 되었다. 과연 무엇을 바뤄야 이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백약의 해법은 마음을 제외하고는 약효가 없을 것이다. 『진심직설』이 모든 학교의 교과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