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점프
이삭빛
우물물 속에 갇힌 별이라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닿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둠의 바닥을 쓸어내리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삶은 때로 너를 주저앉히고 도약이라는 이름의
긴 침묵을 선물로 건네기도 한다.
발바닥에 닿는 흙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그것은 너를 누르던 중력의 무게가 아니라
네 등 뒤에서 피어오르는 투명한 날개의 무게다.
가끔은 한 계단씩 오르는 법을 잊어도 좋다.
꽃이 피어날 때 제 순서를 따지며 피더냐.
번개가 어둠을 가를 때 어디로 갈지 망설이더냐.
자신을 넘어서는 눈부신 순간은
반드시 시린 벼랑 끝에서만 일어나는 법이다.
보이지 않는 길을 믿고 허공에 발을 내디뎌라.
길은 네가 발을 내딛는 그 순간 발밑에서 태어난다.
어제의 나를 눈물로 보내주지 않고는
결코 내일의 나로 부활할 수 없다.
나를 버리고 나를 얻는 일, 그것은 눈부신 소멸이다.
지루한 제자리걸음이 너를 지치게 하더라도
그것은 비상을 위해 온 우주가 숨을 멈춘 시간이다.
두려워 말고 너를 가둔 껍질을 깨뜨려라.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매던 너는
이미 그토록 꿈꾸던 그곳에 도착해 있다.
[시평] 고독한 응축 끝에 피어난 존재의 수직 이착륙
— 이삭빛의 <퀀텀점프>를 읽고
시평 윤정 시인
1. 임계점의 고독과 에너지의 신성한 응축
물리학적 개념인 ‘퀀텀점프(Quantum Jump)’는 이삭빛 시인의 언어를 통과하며 존재론적 부활의 서사로 치환된다. 시의 도입부에서 인간은 ‘깊은 우물에 갇힌 별’로 형상화된다. 이는 빛나는 본질을 품었으나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현대인의 고독한 초상이다. 그러나 바닥의 어둠을 만지는 그 비천한 시간은 단순한 정체가 아니다. 도약을 위해 온 우주가 숨을 죽이고 에너지를 안으로 갈무리하는 거룩한 임계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나의 고독은 깊고 깊어서, 그 안에서 신마저 숨을 쉰다”고 했다. 이 명언처럼, 우리를 누르는 중력의 무게가 날개의 무게로 변모하는 순간, 비상은 이미 시작된다.
2. 인과를 초월한 직관의 도약과 창조적 비유
이삭빛의 도약은 점진적인 인과율을 거부한다. 시인은 이를 두 가지 강렬한 비유로 포착해낸다. 첫째는 순서를 따지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다. 생명은 논리적 단계를 밟아 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열망이 폭발하는 찰나에 온몸을 던져 피어난다. 둘째는 망설임 없이 어둠을 가르는 번개다. 번개는 점을 이어 선을 만들지 않고, 찰나에 공간의 본질을 전복시킨다. 이러한 비유는 자아를 넘어서는 순간이 안온한 일상이 아니라 ‘직관의 벼랑’ 위에서 일어남을 선언한다. 보이지 않는 허공에 발을 내딛는 그 무모한 믿음만이 존재하지 않던 길을 발밑에 창조하는 기적을 낳는다.
3. 소멸을 통한 부활과 ‘이미 도착한’ 목적지의 역설
이 시의 백미는 과거와의 단절을 ‘눈부신 소멸’로 정의한 데 있다. 어제의 관습과 낡은 자아라는 껍질을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내일의 나로 부활할 수 없음을 통찰한다. 시인은 지루한 제자리걸음조차 비상을 위해 온 우주가 숨을 멈춘 경이로운 순간이라며 독자를 위로한다. 도약은 미래의 어느 물리적 지점으로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다.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겠다는 결단 그 자체에 이미 목적지가 내재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자기 자신의 참된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삭빛 시인이 건네는 퀀텀점프는 절벽을 하늘로 가는 문으로 바꾸는 인식의 대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