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순신은 자살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1592년 임진일기부터 1598년 무술일기까지 7년간의 전쟁을 기록한 이순신의 일기이다. 1598년 무술일기는 그 해 42일간의 기록으로 11월 17일에 끝나 있으며...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사망한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석연찮은 기록들이 많이 있다.
"싸움에 임하여 스스로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 죽었다." - 이민서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이성윤(1570~1620) 맹주서(1622~ ? ) 이민서(1633~1688) 이 여(1645~1718) 이이명(1658~1722) 김성칠(1913~1951) 이병기(1891~1968) 이들은 모두 이순신의 죽음을 자살이거나 그 소문을 기록한 사람들이다. '전사를 가장한 자살'의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는 '전사'라고 되어 있고,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分)은, <이충무공행록>에서 '지나가는 탄환에 맞아 숨졌다'고 전하고 있다. "공로가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싸움에 임해 자기 몸을 버렸으니 공의 죽음은 본시부터 작정한 것이다." - <신구차> 이순신이 사망하고 197년이 지난 정조(1752~1800)때 출간된 <이충무공전서>는 '죽음에서 빠져 나온 뒤 죽음을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2. 선조와 서인 세력들의 주장!~ '이순신은 죽어야 마땅한 인물!~' 1597년. 이순신은 서인들의 주장에 의해 한산도에서 체포되었으며 사형 직전까지 갔다. 당시 조정 여론은 이순신을 '죽어야 마땅한 인물'로 규정했다. - <선조실록>
그러나 그런 참담한 상황에서 백의종군 한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다. "군량이나 무기 등은 보잘 것 없었다." - <행록>
사실 조선에서 이순신의 목숨은 '적이 아닌 조선에 의해' 더 위태로웠다! 그리고 조선에 의해 조선수군통제사의 목숨이 위태로운 중심에는 '선조(1567~1608)'가 있었다!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지 오래였다.
1597년 명랑해전에 대한 선조의 태도를 보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이 전투에 대해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친 게 당연하다고 한다.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선조실록> 6개월후 1598년 4월 15일. 비변사에서 다시 이순신에 포상을 건의한다. "이순신은 수군이 다 망가진 후에도 이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포상을 내리는 문제는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려있습니다."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준다는 것은 좀 지나친 듯하다. 이를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 <선조실록> "선조는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했습니다. 거의 인정치 않는 분위기였는데 당시 상황을 지켜본 명의 격려사 양호라는 사람이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여 이는 꼭 상을 줘야 한다고 청하자 정3품에서 종2품 가선대군 품계까지 올려주지만,
실제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전에 이미 정2품을 받았던 것을 고려하면 명이 자꾸 권하니까 마지못해 형식만 취한 품계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선조의 태도는 이순신에게 매우 서운하게 받아드려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그렇다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원균(元均, 1540~1597)에 대해서는 선조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하늘이 한 일"이라고 편든다. 선조는 왜 원균과 이순신에게 이리 다른 태도를 취했을까? 그것은 두려움때문이었다. 선조는 직계가 아닌 방계로 오른 조선 최초의 임금이었다.
권력을 쥔 누군가가 정통성 문제를 제기하면 곧 바로 왕위가 위태로워 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순신의 연승은 왕권을 위협하는 큰 성과였다.
* 조선 11대 중종 (1506~1544) - * 조선 12대 인종 (1544~1545) ㅣ * 조선 13대 명종 (1545~1567) ㅣ 덕흥 대원군 -- 조선 14대 선조 (1567~1608)
<선조 - 조선 첫 방계 출신의 왕으로, 정통성 취약하다는 콤프렉스 가짐>
실제 1596년 전라도 의병 총수였던 김덕령(1567~1596)을 난을 일으키려 했다고 체포하여 20일간 가혹한 고문을 하다 장살한 예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홍계남에 대해서도 역적 모함이 씌워졌다.
전쟁으로 왕권은 추락했고, 게다가 도성을 버리고 명에 의존하려 했던 국왕 선조와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집권 세력 서인은, 의병장들마저 역적으로 몰아붙여 제거해야 할 정도로 그들의 정치적 기반과 역량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 이순신이었다. '조정을 속이고 있다'(欺罔朝廷) '임금을 무시고 있다.'(無君之罪)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必誅不赦) - <선조실록, 1597,3,13> 실제 이순신은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투옥을 당하고 두 번의 백의종군을 해야 했다.
"이순신을 재등용하지만 이순신의 위치가 올라갈수록 선조는 불안했고 선조에게는 이순신이 항상 신경쓰이는 인물이었습니다.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간 국왕과 위기속에서서 나라를 구하는 성웅 이순신,
이순신은 전쟁에 승패에 상관없이 이미 제거되어야 하는 인물로 선조에게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조정 대신들도 이순신을 없앨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체포' '고문' '사형'이란 말로 이순신을 공격한다. - <선조실록> 1597년 정유일기(丁由日記)에는 고통스런 삶에 대한 이순신의 회의가 곳곳에 묻어나 있다.
특히 어머니를 잃고 난 후 절망은 깊다. "1597. 4. 16.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1597. 4. 19.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1597. 5. 5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 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7년째, 1958. 2. 19 감역 현진에게 보낸 편지에는 '수염과 머리가 희어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5년전 그의 일기에는 "어머니가 계시므로 아침에 흰머리털 몇오라기를 뽑았을 뿐이다"고 했었다. 그만큼 전쟁은 인간 이순신을 힘겹게 했던 것이다.
3. 명랑해전후 다시 전열 정비 - 목포 고하도에서 완도 고금도로!~
명랑해전후 이순신은 수군의 회복을 위해 어의도, 법성포, 고금도를 거쳐, 전남 목포 고하도에 진을 친다. "(1597년) 10월 29일 목포에 이르렀다가 보하도(고하도)에 옮겨 정박하니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매우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의 유허에 마련된 '모충각'에는 '서울의 선조와 고하도 수군을 위해 양식을 마련하고 군사 재정비를 하기 위해 자리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1월 6일. 맑다. 일찍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서 종일 거닐며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새로 지은 집에 지붕을 이었고 군량 창고도 세웠다." 이순신은 새로 지은 군량 창고를 10여 일만에 가득 채운다. 때는 추수철도 한참 지난 음력 11월이었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안동 충효당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에 의하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군량을 마련했는데 대책은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발급해서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가장 큰문제가 군량과의 싸움인데 겨울을 맞으면서 고하도의 군량문제 해결에 고심을 했을 것이며, 당시 서남해는 피난선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는데 피난선의 통제, 안전을 보장해주면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통행첩 발급했던 것입니다." - 조원래 교수(순천대학 사학과) "피난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 일 동안에 군량 1만여 섬을 얻었다." - <징비록> "(1597년) 11월 20일. 임준영이 와서 완도를 정탐해보니 적의 배가 없다고 전했다."
이순신은 속도가 빠르고 관통력이 좋아 임란에 주요 무기로 사용한 애기화살 편전(片箭) 제작에 힘쓰고 판옥선을 수리, 축조하며 대대적으로 군사도 모집했다. 그리하여 명랑해전후 13척이던 판옥선을 50척으로 늘이고 수군 8천 명을 확보했다. "11월 7일. 맑다." "11월 18일.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이 무렵 <난중일기>는 표면적으론 평온하다. 그러나 한달 전 이순신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10월 14일. 말을 타고 가다 떨어졌다.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깨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날 저녁 고향집에 안부를 알아보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통곡(慟哭)'!... 명랑해전에서 패한 왜군은 이순신의 고향 아산쪽으로 진격했다. "왜적들이 여염집을 분탕질한다는 말을 듣고 (이순신 막내 아들 이면(李면) 달려 나가 싸우다가 복병의 칼에 찔려 길에서 죽은 것이다." - <행록> 가장 아끼던 막내 아들 면이 아비를 앞서간 것이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6개월 사이 이어진 비보. 이순신은 그 해 초기 어머니를 잃었다. 아들이 백의종군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만나러 가던 길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러나 장수로서 이순신은 슬픔을 드러낼 수 없었다.
"10월 16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이순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죽음마저 내색하지 않으며 조선을 위해 수군을 재건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108일 머무르다 좀더 나은 곳을 찾아 2월 18일 전남 완도의 고금도로 옮긴다. "주변에 여러 섬들이 있어 함대를 숨길만한 전략적인 장소였습니다. 서해가 아닌 남해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의미였습니다." - 이민웅 교수(해군사관학교) 무술일기는 이때부터 9개월간(5월 1일~9월 14일) 기록이 없다. 충남 아산 현충사 유물관에 <이순신서간첩>을 살펴보면 <난중일기>와 사뭇 다른 이순신의 부드러운 감수성이 드러나 있다.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편지는 오래전에 보낸 것이지만 그리운 마음은 더욱 새롭습니다. 언제나 월악산의 구름과 대숲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 2월 19일 형 감역(監役) 현진에게 보낸 편지 임란전 평화로운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순신은 고금도에 새로운 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그간 손실된 군사력, 병기, 군량까지 완비했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충무사에서는 해마다 4월 28일 이순신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고금도는 이순신의 마지막 통제영이라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4. 명나라 수군의 지원을 오히려 걱정하며... 그리고 1598년 6월. 명나라 진린(陳璘)이 이끄는 최초 수군 지원군 5천 명이 지원되어 선조의 극진한 전송을 받으며 고금도로 향하였다. 진린은 조선 장수를 때리고 욕하기 주저치 않는 '포악한' 인물로,
어이없게도 명의 지원군을 조선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하는 모순된 현실이 전개되고 만다. "(선조는) 명나라 도독 진린을 전별하면서 두 차례 다례와 주례를 베풀었다." - <선조실록> 이순신의 성격을 잘 아는 유성룡의 우려는 컸다.
"진린과 이순신이 화합치 못해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할 것이다." - <징비록> 선조 역시 따로 이순신에게 전교를 내렸다.
"후하게 대접하여 도독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하라." - <행록> 예상은 옳았다. 고금도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진린은 이순신과 마주한 술상을 엎는다. 이유는 1598년 7월 <절이도전투(折爾島, 현재 전남 거금도)> 결과 때문이었다. "문제는 명나라 수군이 전공을 전혀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조선 수군이 전부 싸워 이기는 것을 지켜본 진린은 싸우지 않은 자신의 부하 장수를 참수하려는 몸짓을 취하게 되고 이에 이순신은 말리면서 조선군의 승리는 모두 대인의 공이라며 수급을 줍니다." - 이민웅 교수 (해군사관학교) "본국에 있을 때부터 장군의 이름을 수없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허명이 아니었소." - <행록(진린이 이순신에게)> 절이도 승리로 이순신은 고흥반도까지 장악했고 계속 동진하여 여수 순천만에서 남해 광양만을 확보하여 전라도 수역 전부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또 다시 문제가 불거진다. 진린의 명군이 마을의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민가를 허물고 자신의 짐도 꾸리게 한다. 진린이 의아해 이유를 묻자 이순신은 댓구한다. "귀국 군사들이 오자마자 약탈에만 전념하여 백성들이 도저히 견디지 못해 모두 달아나고 있소. 나는 대장의 몸으로 혼자 남을 수 없기 때문에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 하오." 조선 수군의 버팀목없이 명군의 안전은 보장되지 못했다. 다급해진 진린은 이순신을 붙잡고 간절히 애걸하였다.
'간걸'(懇乞) - <행록> 이순신 : "귀국 군사들은 우리들을 속국의 신하로만 알고 전혀 꺼림이 없소. 내가 그들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서로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진린 : "그렇게 하지요" - <행록> 이순신은 명군의 통제권까지 가진다. 훗날 진린은 명 황제께 이순신의 공을 보고하여 명 황제는 이순신에게 은 도금이 된 180센치 길이의 참도(斬刀) 두자루와 황제가 보낸 도장이 표기된 도독인, 군대 명령 전달할 때 사용하는 홍소령(紅小令紀)와 남소령기(藍小令紀), 180센치의 귀도(鬼刀)와 구리로 만든 곡나팔(曲喇叭)과 '대장(大將)'이라고 쓰인 호두령패(虎頭令牌) 등 여덟까지 선물을 보내온다. 진린은 심지어 이순신에게 명으로 같이 가서 살자고 수없이 종용한다
"공은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오 만일 중국으로 들어가 벼슬한다면 당연히 천하의 명장이 될 텐데 왜 여기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내려 하오." - <시장(諡狀)> 이는 모두 이순신의 리더싶이었다. 그렇게 포악한 진린도 이순신을 따르고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이 모든 일을 이순신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을 앞서 가는 일도 없게 했다고 한다. 그때 희소식이 전해온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의 죽음이었다.
그의 유언은 조선으로 비밀리에 전해졌는데 그것은 '철군명령서'였다.
사천 선진리왜성엔 왜군 장수 시마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중순 철군을 계획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조선을 따돌린 채 명과 강화를 시도하여 안전한 후퇴로를 조건으로 순천왜성(예교성)을 넘겨주겠다는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비밀리에 모의하여 소서행장과 강화했다." - <선조실록>
전쟁이 종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명은 더 이상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다. 명 제독 유정은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이다.
'사로병진책'이란 순천왜성과 사천왜성, 울산왜성에 있는 왜군을 명군이 전주, 합천, 경주을 내려오며 압박하고 이순신의 수군이 해로를 차단하는 임란 최초 수륙합동작전이었다.
9월 20일 이순신은 요도에 도착하여 도독부를 설치하고 곧 바로 출격하여 명군과 더불어 순천왜성을 공격하였으나, 전투가 그 달을 넘기면서 명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10월 6일.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10월 4일. 적들은 허둥진둥 달아났다."
"10월 7일 육군은 다시 정비해 전진하려고 한다."
"10월 9일. 육군이 이미 철수했으므로 배를 거느리고 해안의 정자에 이르렀다."
승리가 목전이었지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도발적이었고 야심찼던 사로병진책은 명나라의 전의 상실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명군이 싸우려 하지 않자 선조는 직접 남하할 생각을 밝힌다.
"내가 몸소 남쪽으로 내려가야 중국 장수가 이를 듣고 마음쓰기를 반드시 달리 할 것이다. 목숨이 끊기지 않았는데 어찌 뒤에 물러나 있겠는가." - <선조실록>
그러나 세상은 선조의 말을 믿지 않았다.
"7년 동안 행한 모든 일이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계책뿐이었는데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하교는 믿어지지 않는다." - <선조실록>
선조의 행동은 예측대로 말만 앞세운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순신이 스스로 나서야 했다.
4. "나는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할 수는 없소" -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1598년 11월 8일. 명의 진린과 작전을 계획하고 이순신은 곧 바로 출항하여 고니시를 치기 위해 순천왜성 앞바다 장도에 이르렀고 왜선 10여 척이 마주 나왔으나 조명연합군의 공격에 후퇴했다. 이순신은 바닷길을 막았다.
그러나 예상 못한 일이 발생한다. 고니시가 진린에게 뇌물을 바쳐 바닷길을 열어달라 부탁한 것이다. "11월 14일 도독이 왜선을 맞이하게 하였다.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 돼지 두 마리와 술 2통을 도독에게 바쳤다."
진린이 왜선을 드나들게 하는 사이 왜적은 이순신의 포위를 뚫고 유유히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이순신은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순천왜성에 고립되어 있었다. 왜구들은 고성과 사천, 남해 등지에서 연합 함대를 결성하여 '고니시 구출 작전'을 계획했다. 노량해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순신 -"대장된 사람은 화친을 말할 수 없소.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소."
진린 - "이미 통제사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제 두번 다시 말하기는 어렵다."
왜장 - "조선 수군은 마땅히 명나라 수군과 다른 곳에 진을 칠 것이지 왜 같은 곳에 진을 치고 있는가?"
이순신- " 우리 땅에서 우리 뜻대로 할 일이지 너희 놈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소. 나는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할 수는 없소." - <11월 16일. 행록>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는 나라를 지키는 일인 동시에 스스로에게 칼을 겨누는 자리였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핍박, 조선 군사를 무시하는 명나라 군사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이순신의 삶은 극도로 고달픈 것이었다.
진린도, 왜군도, 조선도 알지 못했다. 이순신은 이 때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이순신에게는 필사의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11월 16일. 왜선 세 척이 말 한 필과 창칼 등을 가져와 도독에게 바쳤다."
"11월 17일. 어제 왜선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달아났다."
이것이 이순신의 마지막 일기다. 일기속에는 이순신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다.
11월 18일. 온갖 회유과 획책에 아랑곳 않고 이순신은 노량해협으로 출정한다.
그리고 11월 19일. 노량해전 마지막 전투가 이어진다.
전날 이순신은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나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 - <선묘중흥지>
"이순신의 의지적 전략에 의해서 무술년 11월 18일 저녁 공진, 즉 사천쪽으로 대군으로 밀려온 시마지군을 맞아침으로써 섬멸전을 펼칩니다. 이순신의 의지, 7년 전쟁의 종결, 노량해전입니다." - 조원래 교수 (순천대 사학과)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던 전투였다. 이순신은 관음포구로 떠난다. 그날 저녁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또한 한이 없겠나이다." - <행록> (此讐若除 死즉無憾)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나무 재갈을 물렸다. 왜선 500여 척이 노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숨죽여 기다린다. 노량해전의 시작이었다.
명 선발대는 왜군의 진입로를 차단했고 이순신의 함대는 중앙을 돌파해 화공전술을 구사했다. 왜선이 불타오랐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적선 수백 척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 <상촌집(象村集) - 신흠(1566~1628)>
적군의 배와 아군의 배가 근접하여 적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왜군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초기 전투 과정에서 밀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잘못해서 포구안을 해로로 오판하고 들어가게 됩니다. 강진과 관음포 사이의 육지 '가청(假靑)이었습니다." - 이민웅 교수 왜군은 절망했다.
"왜적의 배 100척을 포획하고 200척을 불살랐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 < 선조실록>
그리고 1598년 11월 19일 아침. 이순신의 싸움은 계속 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진다.
그의 마지막은 건조했다. 회한도 슬픔도 없이 오직 남긴 것은 의지뿐이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 <징비록>
11월 19일 정오 무렵 전쟁은 끝났다. 이순신은 충남 아산 이충무공묘에 안치되었다.
오해와 역모로 가득한 조선에서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써내려갔다. 그것은 하나하나 이순신이 후세에 전하려 했던 엄혹한 사실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쓰지 못했던 일기는 '몸을 죽여 나라를 살렸다(身亡國活)'는 고백 아닐까!
이순신 전사후 조선 땅은 물론이고 명나라까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11월 21일 이순신의 죽음을 전해들은 선조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
이순신은 인조 21년에 '충무공' 시호를 받고 정조 17년에 영의정에 추존된다.
<난중일기>는 인간 이순신의 뜨거운 독백이다.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 했던 이순신. <난중일기>를 통해 조선과 그 백성을 위했던 이순신을 느낄 수 있었다.
- <한국사전을 보고> (성웅 이순신께 깊고 깊은 존경을 바칩니다.) 출처 : 조선왕릉연구원 글쓴이 : 권정희 원글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