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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노래를 부르자
슬픈 노래 부르자
씨알 여러분, 1977년이 갑니다. 이 더럽고, 끔찍하고, 구역질 나고 가슴에서 불길 치솟는 한 해가 갑니다. 슬픈 노래를 부릅시다. 77년을 보내면서 이사야서 1 장을 음미해 봅시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 하신다.
내가 자식을 기르고 키웠는데
그놈들이 나를 배반했구나.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내 씨알은 철이 없구나.
아, 악독한 민족 불의를 짊어진 백성,
악한 놈의 종자, 썩어진 것들의 새끼.
주님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업신여기고,
그를 온전히 등져 버렸구나.
아직도 덜 맞았다고
엇나가기만 하느냐?
머리는 상처 투성이고
속은 온통 병이 들었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하고 멍들고 맞아 터졌는데도,
짜내고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 발라 부드럽게도 못하는구나.
너희 땅은 쑥밭이 됐고,
너희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으며,
애써 농사지은 것을 남이 약탈해가도
보고만 있어야 하니
아, 허물어진 소돔처럼
쓸쓸한 터가 돼 버렸구나.
오직 수도 시온만이 남아
포도밭의 상직막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외로이 지키는 성 같이 서 있구나.
망해라!
여러분, 그것은 삼천년 전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보고 한 말이라 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디 그런 데가 있느냐 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뵈는 것을 보는 것이 밝은 것 아닙니다. 뵈지 않는 것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눈만이 눈이 아닙니다. 눈 아닌 눈이 있어야 정말 볼수 있습니다. 좋다 좋다하는 사람이 반드시 고마운 사람이 아닙니다. 내 속에 든 병을 말해 주는 사람이 내 은인입니다. 몸의 병을 아는 것만이 의사 아닙니다. 마음의 병, 시대의 병을 뚫어보는 것이 정말 내 은인이요 나를 건져 주는 사람입니다.
눈을 감으십시오. 그러면 신문은 왼통 거짓말입니다. 라디오, 텔레비는 말짱 대낮의 귀신입니다. 죽는 놈은 언제나 저 죽는 줄 모르다가 죽는 법이고, 망하는 나라는 언제나 망하는 줄 모르다 망하는 법입니다. 모르는 그것이, 속눈을 못 뜬 그것이 바로 망하는 일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곧추 세워가지고 보고 들으십시오. 보이고 들리는 이대로 이렇고는, 망하지 않는 법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망한다는 말 한다고 그 사람보고 미쳤다 하고, 미워서 욕하고 때리다가 죽여 버린 민족은 다 예외 없이 망했습니다.
무엇이 그런 것이 있느냐고 돌이켜 질문합니까? 그런 데는 대답 아니 합니다. 예언자들도 대답 아니 했고 예수도 대답 아니 했습니다. 그런 물음은 알고자 하는 물음이 아니고, 제 속에서 나오는 빛과 소리를 누르기 위해 하는 한층 더한 악이기 때문에, 그런 개인 단체는 스스로 제 고집과 악에서 스스로 망하게 내버려 두는 법입니다. 그러면 도리어 혹시 깨달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하나님이 다 같이 사랑으로 차별 없이 넣어준 양심과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크게 외쳐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망한다!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아니하고, 하늘에서 온 표적을 구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악하다 한 것은 사회적 부정의를 말씀하신 것이고, 음란이라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성실치 못한 태도를 말씀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거면 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인정 아니하면 천만 마디 설명을 해도 도리어 그들의 악을 더해줄 뿐이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하시는 일을, 딴 생각 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듣는다면, 자기 자신이 곧 하늘에서 온 표적인 것이 환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왜 모르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지금 오셔도 꼭 같은 말씀 하실 것입니다. 왜 큰일 날 징조를 모르느냐고 말입니다. 물을 것 없이 이대로가, 경제 발전이 기적적으로 되고, 인권에 대한 데모가 자꾸 일어나고, 뿌리가 거의 다 뽑혔다 하는 때에 더 큰 일이 일어나고, 근로자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이 경제의 상징인 합성수지에 다린 불같이, 끄려고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번져만 나가고, 안양천이 넘치고, 이리의 대폭발이 있고, 원양 어선이 자꾸 파선을 당하고, 거의 날마다 버스 사고가 일어나고, 박동선 사건, 문선명 통일교, 이북의 마약 밀수, 이남의 남의 나라 국회의원 매수 등등…… 이러다가는 큰일난다는 역사의 경고입니다. 방정맞은 소리가 좋아서 하리만큼 속이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아니 보려고 눈을 감고 아니 들으려고 귀를 가리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크게 들리고 더 분명히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할 뿐입니다.
망할 짓을 하면 “망해라!” 해야 합니다. 망하게 된 나라 보고 망해라 하는 사람이 있던 나라는 면했습니다. 요나의 예언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 하지 못하는 시대는 망했습니다.
씨알에도 실망이다
이런 생각에 붓을 대지도 집에 꽂지도 못하고 뜰과 방안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이 섣달 중순이 다 되어 오는 날 뜻밖에 편지 한 장이 떨어졌습니다. 본래 내 이름으로 온 편지는 내가 보지만 씨알의 소리사로 온 편지는 사무실로 보내는데, 그날은 우연히 사무실로 오는 편지의 뒷면을 보니 아주 잘 아는 진실한 친구의 이름이 씌어 있었습니다. 웬일일까? 내게 직접 할법한데 하고 뜯었더니, 그 안에는 앞으로는 잡지를 보내지 말라는 거절의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몰라서 그랬지 벌써 두 달 전부터 거절했는데도 계속 보내기 때문에 하는 편지 였습니다. 나는 자연 마음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인즉 자기는 이 나라 씨알에도 세계의 씨알에도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망한다” “정말 속알머리 없는 민족이다.” “이런 어리석고 악독하고 썩은 국민이 어디 있느냐”하는 나에게 이것은 정말 심상한 말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씨알도 절망이라는 말에는 항변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말고 하나님께 매달리고만 있잖느냐? 나는 거기는 생각이 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린다는 말은 말하기는 쉽고 참으로 하기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철저히 매달리기 위해 일체의 생각과 말과 활동을 끊어버리기만 한다면 그에서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면 반드시 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순 신앙 순복음주의는 매양 말· 생각에 그치지 나는 이날까지 정말 그런 혼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억지로, 강제로, 힘써서는 못하는 자리입니다. 되지도 않을 뿐더러 된다해도 그것은 도리어 잘못을 겹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생명은 억지로 키우는 재주는 없습니다. 못 키울 뿐 아니 라 말라 죽어 버립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절대의 하느님에 사뭇 들어간다면 거기는 육도, 영도, 역사도, 사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역사적 사회 속의 한 사람으로 몸을 가지고 지각을 가지고 영의 씨를 가지고 삽니다. 여기 살면서 순전한 영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망상입니다. 주관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좋아한다는 맹랑한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 인간의 찌꺼기들 속에서 같이 울고 웃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으로 나타나신 것은 이 때문이요, 우리가 그를 절대자 자신을 보는 듯 믿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해 일생을 하나님께만 바치기를 증거한다고 그 젊은 학생을 보고 세상 지식 다 소용이 없고 다만 성경만이면 된다 해서 한 사람의 일생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부흥사들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물론 당장 바쳐 버리면 좋습니다. 그러나 국화 한 송이가 피려면 적어도 여섯 달이 필요하고 나중가서야 꽃망울이 나옵니다. 사람의 혼은 더욱 그렇습니다. 의미를 말한다면 일순간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만, 실지 혼이 그 만큼 자라려면, 지금까지 안 것만으로도, 천만년 이상의 진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노자가 不以人助天 사람으로써 하늘을 도울 생각 말라 한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면, 겸손하고 인간답게 참으며 기다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절망적인 것이 인간이지만 거기 절망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내려갈수록 짐작이 간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더 할 것입니다. 나에게 원수나 되는 양 나를 끌고 진창 속에 뒹굴려는 이 몸을 내버리지 못하고 불철저하나 내버림 없이 올라가기를 힘쓸 것입니다. 절망적인 것이 나지만, 이 절망적인 것을 내버리고는 삶도 믿음도 올라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을 하셨다가 인간의 연약한 것을 생각하셔서 그 심판하려 하셨던 것을 뉘우치셨다는 것은 이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뉘우침이 있을 리 없습니다. 뉘우치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자 하는 마음이 한 걸음 한 걸음 하느님을 알아간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의 자리입니다. 유도 무도 아닌, 생도 사도 아닌, 선도 악도 아닌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것을 제 분에 따라 때에 따라 실현해 가는 것이 사람이요, 역사요,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것으로는 이 이상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은총의 하느님이시라면 이 절망적인 것을 절망 아니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씨알이란 다른 것 아니고 인간 중 바닥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차별 아니 하십니다. 사람은 다 같이 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욕심 때문에 제 근본 바탕인 하나님의 모습을 팔아먹고 상처냅니다. 씨알은 약하고 못생겨 욕심 부릴 기회가 적으므로 바탕을 팔아먹을 기회가 적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씨알을 믿는 것은 씨알이 잘나서가 아니라 못났기 때문입니다. 못났기 때문에 절망적이지만, 또 못났기 때문에 희망적입니다. 역사 있은 이래 모든 어진이들이 다 이 씨알을 상대하고 그편에 서 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지금까지로는, 세 가지 사실에 도달했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대로 예수께서 지혜 있고 잘난 자들을 상대 않으시고 세리, 갈보, 목자 잃은 양 같이 헤매이는, 오늘 호산나를 부르다가도 내일은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요!”하는 씨알들, 누구를 다 그만두고, 칼 뽑아들고 장담하다가, 입에 침도 채 아니 말라서 “나는 예수 몰라요”했던 베드로에 절망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약점 속에 반석 같은 가능성을 뚫어보아 주시고 그것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끄물이는 등잔도 불어버리지 않는 심정으로 키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십여년 전 마르틴 부버의 책에서 읽은 것입니다. 그의〈하나님의 일식〉제1장에 있는 두 사람과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날 아침 부버가 원고의 교정을 하려하자 옆에 있는 늙은 철학자가 그것을 한번 읽어 들려달라 했습니다. 그래 읽어 주었더니 다 듣고 나서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고 또 하고 아주 어려움 없이 하셔요? 당신이 하나님이라 하시는 이는 인간이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경을 뛰어넘는 분인데, 그렇게 말씀하면 인간적으로 하는 관념에 내려가고 말지 않을까요?……나는 그 지극히 높으신 이를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을 들으면 어떤 때는 거의 모독 같이 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했습니다. 거기 대해 부버는 자기 대답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인간의 말 중에 이 처럼 무거운 짐을 지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더러워지고 이렇게 상처를 입는 말은 없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버리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들은 자기네의 인생고의 짐을 이 위에 지워 땅바닥에 엎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짐을 지고 티끌 속에 뒹굴고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인종들아 종교적 파쟁으로 이 말을 조박조박으로 찢어버렸습니다. 그때문에 서로들 죽이고 죽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에는 그들의 손톱 자리가 났고 그 피가 묻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것을 묘사해 내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어디서 구합니까? 내가 만일 철학들의 가장 깊은 속 보물 고간에서 가장 순수하고 광채 반짝이는 관념을 얻어가지고 나온다면 나는 그것으로 다만 자유자재하는 사색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그이〉의 임해 계심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자손들이 무서운 삶 죽음을 가지고 이날껏 찬송을 했다 욕을 했다 한 것은〈그이〉를 대해 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만화를 그리고는 그 밑에〈하나님〉이라 써놓았습니다. 서로서로 죽이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미친 것과 잘못이 다 티끌로 사라지고, 괴괴한 어둠 속에서〈그이〉와 정면으로 서서 벌써〈그이, 그이〉할 수는 없어지고, 모두가 한 말로〈너〉하고 한숨을 쉬거나,〈너〉하고 부르짖은 다음, 거기 덧붙혀〈하나님〉했을 때, 그거야말로 정말〈하나님〉, 그들이 부르는,〈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 인간의 아들들의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비쳐주는 것은〈그이〉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하나님〉이라는 말은 호소의 말, 하나의 이름이 된 말, 모든 시대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혀로 바치는 말 아니겠습니까? 불의와 사악을 행하면서도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툭하면 빌리는 것이 이 〈하나님〉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을 금지하는 사람을 우리가 존경을 할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누가 제의한대로 그릇 사용된 말을 살려내기 위해서〈궁극의 자리〉에 대하여는 잠깐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살려지지 않습니다. 우리는〈하나님〉이라는 말을 정화할 수도 없고 완전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더러워지고 상처를 입었어도, 우리는 큰 환란의 날에 그것을 땅에서 쳐들어 일으켜 세울 수는 있습니다.”
세째는 장자의 지북유(知北遊)편에 있는 말입니다.
동곽자(東郭子)가 보고 묻기를 “도(道)가 어디 있습니까?”했다.
장자 대답하기를 “없는 데 없지”
동곽자; “어디라고 딱집어 말씀을 하셔야지요.”
장자; “도르래, 개비에 있지.”
“왜 그렇게 내려갑니까?”
“가라지, 돌피에 있지."
“왜 그리 더 내려갑니까?”
“기와장에 있다”
“왜 점점 더 그리 심하십니까?”
“오줌 똥에 있다”
동곽자가 아무 소리도 아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장자는 말했다.
“왜 당신의 묻는 것이 그렇게 속알이 없어? 제사를 차지하는 위의 관리 정확(正獲)이 돼지 사들이는 주임 감시(監市)보고 돼지 살찌고 아니찐 것을 어떻게 아느냐 물었을 때 감시가 대답한 말 듣지 못했나? 내려갈수록 짐작이 간다(毎下愈况)는 것이다. 어디라고 꼭 따집으려 하지 마라. 무엇에서 도망하려 마라. 지극한 도도 그런 것이다.”
돼지 살찐 것을 알려면 엉덩이나 등심이나 살 많이 붙는 그런 데를 보지 말고, 발쭉을 가서 밟아 보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원체 살 아니 찌는 곳이니 거기가 살이 상당히 붙었으면 다른데는 말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씨알은 나라라는 돼지의 발쭉입니다. 나라의 잘되고 못된 것이 씨알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씨알을 내세우는 것은 씨알이 재주 있고 살림 규모 있게 하고 학식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나라의 물질과 정신의 건강의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씨알이 절망적이란 말은 곧 이 나라, 이 인류가 절망적이란 말입니다. 씨알은 부버의 말을 빌면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신구약을 통해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는 고아·과부·눌린 자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한 없이 타락되고 상처났지만 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있는 곳은 얌전한 맏아들 보다 헤매이는 탕자입니다. 바로 헤매인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 버리시는 이유입니다. 매하유황(毎下愈況)이라,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더럽히고, 어리석고 둔한 것이 씨알이겠지만, 하나님이, 다시말해서 미래의 역사가, 씨알에게 있지 않다면 나는 하나님 아니 믿겠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노릇 못하는 병신 자식이야말로 그 부모의 사랑의 가장 힘 있는 표현이듯이, 오천년 악독한 정치에 짜먹 히우고 짓밟히면서도 멍청인듯 살아가며, 온갖 힘든 노동은 다하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보수도 찾지 못하면서, 그저 단하나 소망이 이 나라에 나서 이 나라에서 죽어 살아지는 힘과 생각으로, 죽어서는 살과 뼈가 거름되어 나라와 하나님께 봉사하는 씨알이 이〈한〉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입니다. 나는 씨알은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절망적일수록 나는 나의 의무 사명을 느낍니다. 의무·사명을 느끼는 한 나는 말을 할 것입니다. 내가 능히 침묵으로 말할만한 정신의 정도에 이르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없는 자격 을 있는 척 할 수는 없습니다. 벙어리일수록 지껄이는 것입니다. 변명이 아니라 나의 슬픈 고백입니다. 씨알이〈너, 하나님아〉하고 외치게 되는 날까지 나는 지랄하듯 나가는 대로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헤르몬산 꼭대기에 절대의 지경을 보시고도 “내려가자” 하시면서 산을 내려와 당황하는 제자들을 보고 책망을 하신 다음, 벙어리 귀신들린 병신한테 오셨던 것 같이, 그님께서 오시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절망적이란 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소리를 그칠 수는 없습니다.
씨알들, 나와 한가지 됐거나 못됐거나 걱정 말고, 다만 꾸며서는 말고, 있는 대로 주고받아 봅시다.
씨알의소리 1977년 11,12월호 69호 (금지된 씨알의소리 생각사)
저작집30; 9-173
전집20; 8-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