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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 8기 남도 답사기행
2009. 4. 24. 오늘은 CAP 8기가 남도로 답사여행을 떠나는 날. 다른 대학의 최고 경영자 내지 최고 지도자 과정의 국내 여행이 주로 골프로 채워지는 것에 비해 한국종합예술대학(한예종)의 최고 경영자 과정의 국내여행은 역시 한예종의 과정답게 문화유적 답사여행이다. 아침 8시 우리 원우들을 태운 버스 2대가 예술의 전당을 떠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번 답사여행에 우리를 문화유적의 세계로 이끌어 줄 이는 한예종 건축과의 김봉렬 교수. 나하고는 고교 동기이기도 한 김교수는 문화유적의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건축미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적을 둘러싼 역사와 철학의 세계를 종횡으로 달리면서 우리를, 우리가 몰랐던 문화유적의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준다. 그것도 설명을 듣는 우리가 졸지 않고 한눈팔지 않게 유머와 해학을 섞어가며 구수한 이야기로 유적의 세계를 풀어나간다.
1. 화엄사
첫 번째 찾아간 곳은 544년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는 구례 화엄사. 오후 1시경 차에서 내려 화엄사로 오르는데, 일주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건물은 '남악사(南岳祠)' 일주문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나, 이름으로 보나 화엄사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건물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남악사는 지리산 산신제를 지내던 곳으로 원래 요 밑의 온당리 당동에 있다가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헐어버린 것을 1969년에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부터 동,서,남,북,중의 전국 5악에 사당을 짓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지리산이 남악에 해당하던 곳. 그럼 5악의 중심인 중악은 어디인가? 신라 시대에는 팔공산이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계룡산. 그러고보니 3년 전에 나눔문화 답사를 갈 때에도 김교수를 모시고 계룡산 신원사에 있는 중악단에서 5악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 않았는가? 김교수의 얘기로는 계룡산 중악단에는 남자 산신령을 모시지만 이곳에는 여자 산신령을 모신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곳 머리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의 이름이 늙은 할미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란 뜻의 노고단(老姑壇)이 아니던가? 원래 老姑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였고,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의 산신은 무당격의 원조인 마고성모였다고 한다.
명찰(名刹)이 들어선 곳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 보기에도 뭔가 정신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기운이 흐르는 곳. 불교도 결국 외래종교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런 곳에 절이 들어서기 전에 이런 기운이 흐르는 곳을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갔겠는가? 당연히 이런 곳에는 산신령 등의 신을 모시었을 것이고 이곳 또한 이곳에 화엄사가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을 지키던 토속신앙인들의 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계룡사 신원사의 중악단이나 마곡사나 구룡사의 국사단 등도 다 마찬가지. 불교는 이런 기운 좋은 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기존의 무속신앙인들을 내쫒거나 동화시켰지.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지을 때 기존의 터를 잡고 있던 잡승들을 물리치고 절을 지었다는 얘기가 기존 무속신앙인들을 쫒아냈다는 얘기일 것이고, 기존의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신각이 바로 이러한 산신령 신앙을 불교가 적극적으로 껴안은 것이리라. 이곳 지리산의 여신 늙은 할미(老姑)도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환생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불교가 기존 전래신앙을 흡수하기 위하여 갖다 붙인 것이 아니겠는가?
일주문으로 들어서는데 김교수가 일주문 현판의 '智異山 華嚴寺'란 큰 글씨 왼편에 쓰인 작은 글씨 '皇明 崇禎9年.....義昌君 珖書'를 가리킨다. 숭정이라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인데, 선조의 아들 의창군이 이곳 현판에 글씨를 쓰면서 중국의 연호를 썼다. 조선의 양반들은 점점 중화사상에 물들어 명나라가 망해서도 청나라의 연호를 쓰기를 거부하고 명나라 연호를 그대로 썼다. '中華'를 그대로 계승한 것은 오랑캐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라면서 쓸 데 없는 '소중화'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거지. 이것이 그런 소중화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우리가 독자적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이겠으나 이미 망해가던 나라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들 주위 열강들이 코빵구나 꼈겠는가?
그런데, 의창군이 당시 양반들이 천대하던 절 현판을 써주었으니 의창군과 이 곳 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얘기렸다? 의창군은 이 현판뿐만 아니라 이곳 대웅전의 현판도 썼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가 천대받던 시절이라 툭하면 관리나 유생들이 절을 자기들 놀이터로 사용하거나 절을 침탈하기도 하였다는데 이렇게 일주문에서부터 왕자가 쓴 현판을 걸어두면 함부로 못하였을 것.
일주문을 들어서 금강문을 향해 걷는데, 길은 약간 휘어져 있다. 여기만 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 보제루로 가는 동안 길은 조금씩 휘어져 들어간다. 김교수 얘기로는 절이 들어가는 입구의 골짜기는 왼쪽이고 뒷산은 오른편에 놓여 있는데, 절의 중심공간은 산 밑에 자리 잡기에 이에 맞추어 길은 일주문에서부터 보제루까지 조금씩 오른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렇게 길을 휘게 하고 또 길을 그대로 평평하게 포장하지 않고 중간 중간에 단을 쌓아 그냥 직선으로 들어가는 길보다는 깊이감이 있고 길게 느껴지는 것이라는데, 설명을 들으며 다시 길을 보니 정말 그러한 느낌. 김교수는 또한 이러한 길의 배열은 조선시대에 특히 발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불교가 탄압받는 조선시대에서는 절을 찾는 이에게 감추어둔 보물을 보여주듯이 약간씩 감춰두고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고. 그래야 절을 찾는 사람들이 입구에서 그냥 돌아가지 않고 하나씩 드러나는 감추인 보배를 따라 절의 심장부까지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탄압받는 시절엔 이렇게 하여 하나라도 걸리면 잡아야 했다나? ㅎㅎ 이런 유머 감각에 김교수의 유적답사는 인기가 있는 것이지.
금강문으로 들어서니 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化現)하였다는 보현동자가 코끼리를 타고 있고, 문수동자가 사자를 타고 있다. 그런데, 코끼리의 코가 왜 이리 짧고 생긴 것도 꼭 멧돼지처럼 생겼지? 사자도 해태와 비슷하고... 고려 때에는 교역이 활발하여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배를 타고 고려에 왔기에 실제 코끼리와 사자도 수입하였다는데, 조선은 지가 무슨 소중화(小中華)라고 오직 중국만 쳐다보느라 교역이 쇠퇴하여, 조선 시대에 이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만든 이는 실제 코끼리와 사자는 보지 못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다보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코끼리와 사자가 나온 것. 설명을 들으며 쓴웃음이 나온다.
보통 산사(山寺)를 찾으면 대웅전 맞은편의 누각 밑으로 하여 - 이른바 누하진입(樓下進入) 방식 - 산사의 중심영역으로 올라서던데, 화엄사의 보제루는 밑이 막혀있다. 할 수 없이 돌아가야 하는데 계단이 누각 오른편으로 치우쳐 있어 계단을 오르면 자연히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돌아 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또한 일주문에서부터 계속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동선(動線)의 연장이리라. 그런데, 이것도 다 치밀한 계산하에 나온 설계란다. 이렇게 보제루를 돌아 올라가면 마당을 'ㄱ'자로 둘러싼 축대 위로 멀리 왼쪽에 각황전, 가까이 오른쪽에 대웅전이 보이는데 실제 각황전이 대웅전보다 큰 누각이지만 이 위치에서 보면 두 누각이 대등하게 보이고 마당에 있는 동탑과 서탑도 실제로는 비대칭적으로 놓여있지만 이곳에서 보면 동탑은 대웅전의 중앙에, 서탑은 각황전의 중앙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 그야말로 절묘한 시각적 배치. 역시 이런 것은 건축을 전공한 교수님의 입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겠다.
우린 각황전으로 올라간다. 화엄사는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창건 당시에는 화엄종의 절로서, 670년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화엄10찰의 하나로 중창하며 장육전(지금의 각황전)을 세웠다. 그리고, 장육전을 세웠을 때는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않고 모두 청석(靑石)벽으로 만들어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다고 한다. 김교수 얘기로는 화엄경이 스님들도 이해하기 어려워 이렇게 화엄경이 새겨진 벽을 한 바퀴 돌면 화엄경을 1번 읽은 것으로 쳐주었다나? 지금도 이때 만들어진 화엄경 돌조각들이 보관되어 있다는군. 이 얘기를 들으니 북한산 도선사와 네팔에서 많이 보았던 윤장대(輪藏臺)가 생각이 난다, 네팔에 가니 사람들은 안에 불경이 들어 있어 신실한 마음으로 손잡이를 돌리면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는 윤장대를 사뭇 경건한 마음으로 돌리고 있었지.
보통 절에는 주불(主佛)을 모시고 있는 전각은 하나이다. 이곳은 원래 화엄종의 절이었으니 바로 이 장육전이 주전(主殿)이 된다. 그런데, 장육전에서 축대가 꺾이며 오른쪽 축대 위로 대웅전이 또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바로 화엄사의 종파가 바뀌었다는 것. 화엄사는 후원 세력이던 후백제의 견훤이 몰락하면서 교세가 약해졌는데, 고려 왕실에서는 943년 화엄사에 일대 중창 불사를 벌인다. 화엄사가 화엄종의 절로서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런 중창 불사를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뭔가 화엄사의 주된 신앙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김교수는 선종 계열인 천태종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화엄사에선 가람 배치상 장육전의 자리가 뒤에 주산(主山)이 있어 가장 중심적인 자리인바, 이렇게 주된 종파가 바뀌었으면 장육전을 헐거나 리모델링을 하여 그 자리에 대웅전을 지었을 테인데, 우리 조상들은 타파(打破)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화합의 방식을 택하였다. 바로 오른쪽에 축대를 새로 세우고 그 위에 대웅전을 새로 짓고, 탑도 하나 더 세운 것. 이런 선조들의 지혜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소중한 정신유산인데, 조국 근대화다 뭐니 하면서 한창 개발 열기가 불었을 때 우리들은 무식하게 우리 옛것을 깔아뭉갠 것은 아닌지...
국보 67호인 각황전에는 화엄사 사적기에 나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화엄사를 다시 지어야 하는데, 다른 전각은 그럭저럭 되었는데, 문제는 제일 건축비가 많이 드는 각황전이라. 당시 나라나 백성이나 더욱 피폐해진 삶이었는데 천대받던 절을 다시 짓기 위해 시주가 얼마나 모이겠는가? 그래서 화엄사에선 모금을 하기 위하여 화주승을 뽑기로 하였는데, 스님들이 서로 안 하려고 하여 투표를 하였다나? 그리하여 밀가루가 담긴 대야에 증표를 하나 넣고 대야에서 이를 꺼낼 때 손에 밀가루를 묻히지 않는 사람을 화주승으로 뽑기로 하였다고... 아니? 밀가루를 묻히지 않고 증표를 꺼낼 수 있나? 결국 이는 서로 안 하겠다는 것이겠지. 그리하여 스님들이 증표를 꺼내는데 당연히 다들 밀가루를 묻혔을 것. 그래서 '할 수 없다' 하며 투표를 마치려고 하는데, 한 스님이 한 사람이 빠졌다고 하니, 바로 이가 당시 불목하니로 절에 막 들어온 계파선사였다고. 어쨌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투표하기로 하였으니 계파에게도 투표하도록 하였는데, 바로 계파가 당첨된 것.
그리하여 계파가 내일이면 길을 떠나야하는데, 그날 밤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내일 길을 떠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면 된다고 하였다나? 그래서 계파선사가 다음날 길을 떠났는데 하필이면 처음 만난 사람이 절에 와서 빌어먹던 정신이 약간 나간 거지 노파. 계파선사는 낙심이 이만천만이 아니었으나, 할 수 있나? 꿈에서 보인 대로 이 노파에게 얘기를 하니 노파가 갑자기 절벽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다고. '그럼, 그렇지.'하며 계파는 길을 떠나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모금하는데 당연히 모금은 되지 않아 절에는 돌아가지 못하고... 하여 계파는 죽기 전에 서울 구경이나 하자며 한양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한 골목에서 소녀 하나가 갑자기 자기 품으로 뛰어 들어오더라나? 바로 이 소녀가 숙종의 딸. 비천한 승녀가 출입이 금지된 도성에 들어온 것만 해도 사형감인데 게다가 공주의 옥체(玉體)까지 만졌으니 이는 당연히 사형감.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숙종이 이상하다 하여 계파선사와 공주를 불렀는데, 그 자리에서 공주가 태어나서 한번도 펴지 않던 손바닥을 펼치는데, 손바닥에는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단다. 그 다음은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듯이, 왕실의 도움으로 장육전을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 그래서 다시 지은 장육전을 황제를 깨우쳤다고 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단다. 그래서인가? 각황전 현판도 숙종 때 형조참판 이진휴가 쓴 것이라고... 그런데, 웃기는 것은 숙종에게는 실제 공주가 없었다네?
김교수는 화엄사의 중심 영역을 떠나 한 오솔길을 따라 우리를 9층암(九層庵)으로 인도한다. 9층암? 암자가 9층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닐 테고, 이 암자 앞에 9층탑이 있었다는 것. 그런데, 9층암 앞에 있는 것은 9층탑이 아니라 3층탑이다. 원래는 9층탑이었을 텐데,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겨우 얼기설기 3층으로밖에 복원을 하지 못하였는데, 보기에도 엉성하게 탑이 서 있다. 9층암 옆에는 모과나무가 빨간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는데, 이곳이 유명한 것은 산 모과나무보다는 죽은 모과나무. 무슨 소리인고 하니 9층암 앞에 있는 요사채 기둥을 모과나무로 하였는데,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잘 다듬은 것이 아니라 밑둥과 윗둥을 잘라내고 껍질만 벗긴 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몸통을 그대로 기둥으로 드러내도록 하는데서 자연과 조화되는 우리네만의 자연스러움을 극도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을 어디서 또 보았지? 남양주 묘적사와 안성 칠장사에서도 이런 자연스러운 기둥을 보았는데, 그 울퉁불퉁의 튀어남은 이곳 모과나무 기둥이 훨씬 더 하다.
김교수는 또 옆의 천불보전의 처마 한 곳을 가리키며 무엇을 조각하였겠냐고 묻는다. 토끼와 거북이였다. 아하! 귀토설화(龜兎說話)를 이곳 처마 밑에 조각하여두었구나. 그럼, 저 거북이는 지금 용왕님께 토끼의 간을 드리기 위해 토끼를 꼬셔서 용왕으로 가고 있는 중이겠구나. 왜 이런 토끼와 거북이를 불전(佛殿)에다 조각을 해놓았을까? 거북이가 가고 있는 용궁이 불국토(佛國土)라서? 화엄사에 얽힌 이야기는 이외에도 너무너무 많다. 이 많은 이야기를 이 글에다 남길 수는 없는 것이나, 아쉬웠던 것 하나만 얘기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각황전 뒤쪽으로 조금만 언덕을 올라가면 국보 35호인 4사자3층석탑이 있는데, 김교수가 이곳은 안내하지 않아 보지를 못하였다. 위 석탑 가운데에는 4사자가 호위하는 가운데 한 스님이 머리에 탑을 이고 합장을 하며 서 있고, 그 앞의 석등에선 또 한 스님이 무릎을 꿇고 차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서 있는 승상(僧像)은 이 절을 창건한 연기대사의 어머니이고, 무릎 꿇은 승상은 바로 연기조사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곳을 효대(孝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멋진 이야기가 있는 곳이면 올라와보던가, 아니면 귀띔을 해주어 발 빠른 사람들에게 갔다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김교수가 쓴 '화엄사'라는 책을 보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는 김교수에게 항의를 좀 했지.
2. 운조루
다음에 우리가 들른 곳은 조선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경상도 양반 유이주가 구례 토지면 오미리에 왔다가 이곳이 우리나라 3대 길지(吉地)인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의 명당자리인 것을 알고는 1776년 이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였다는 운조루. 금환락지형의 지세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것처럼 산세가 둥글게 이곳을 안고 있어 재물이 빠져나갈 데가 없는 명당이란다. 운조루(雲鳥樓)라는 이름은 유이주가 도연명의 귀거래사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문구중 각 첫머리 글자를 취해 지은 이름. 운조루 앞에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는데, 배산임수(背山臨水)로 하기엔 섬진강이 멀어서 인공적으로 연못을 만들었다 하고, 또 연못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대문 좌우로 하인들이 기거하는 행랑채가 길게 도열하고 있고, 맞은편으로 이곳 바깥주인들이 거처하는 사랑채. 큰 사랑채에는 아버지, 작은 사랑채에는 당연히 아들이 거처하겠지. 운조루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할머니 사랑채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들이 일하면서 먼 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엌 위에 전망창을 두었다고 하니, 이집의 후손들이 운조루에는 여성 존중의 정신이 깃들어있다고 자랑할 만하겠다. 안채는 당연히 바깥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할 터. 안채에서도 며느리방은 시어머니방보다 더 숨어있다. 김교수는 마루에 올라서면 바깥 전망이 보이는 것이 깊숙한 안채에서도 이런 공간의 배려가 되어 있다고. 물론 마루에 올라설 수 없는 하인들을 위한 전망은 없지만...
안채에서 또 문을 통해 돌아 들어가니 대문에서 제일 먼 곳에 사당이 있다. 우리네 양반들은 이렇게 집안에 사당을 짓고 4대의 선조를 사당에 모시며 아침, 저녁으로 또 외출을 나갔다 돌아와서는 사당에 들러 문안인사를 하였다. 김교수가 왜 4대까지 모시는지 설명을 한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혼백(魂魄)중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데, 혼백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 집으로 돌아온단다. 이렇게 혼백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 기간이 120년이라 1대를 30년으로 하여 4대를 모시는 것. 그리하여 4대가 지나면 이제 확실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신주를 태워버린단다. 바로 주희의 주자가례에 나오는 내용.
그런데, 이 집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은 행랑채에 둔 쌀 2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독. 둥그런 쌀독 마개가 있는 곳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다. 가난한 이웃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이곳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마개를 돌려 쌀을 빼가라고 행랑채에 쌀독을 갖다놓고 '他人能解'라고 써놓은 것. 이를 삐다닥하게 보면 외지인이 이곳에 와서 이렇게 떵떵거리고 살려면 이곳 토박이들의 눈치도 봐야하니까 이렇게 쌀독을 갖다놓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만큼 참된 부자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였다고 해야겠지. 이 쌀독이 결코 남의 눈치 때문에 갖다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유이주의 후손이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겠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대문으로 나오려는데 옆에 이집의 가도(家圖)가 붙어있다. 물론 복사본인데, 김교수 얘기로는 원본은 김교수가 대학원 때 이곳에 답사 온지 보름 만에 도둑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종손이 실망하여 이사가 지금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집일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한옥도 살아있는 생명체라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한다고 그 점을 아쉬워한다.
3. 연곡사
운조루에서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세계를 엿보고는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 연곡사로 향한다. 버스가 1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피아골로 들어서는데 버스가 한참을 이리저리 피아골을 돌아들어가야 연곡사가 나타난다. 피아골만 해도 이렇게 깊으니 지리산 자락이 얼마나 넓은지 알겠다. 지금 보이는 저 피아골 깊숙한 산속에는 지금도 발견되지 않는 어느 이름 없는 빨치산의 유해가 잠들고 있지 않을까?
연곡사(鷰谷寺)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법당 자리에 있던 연못에서 소용돌이가 일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연곡사라는 절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절 뒤의 부도(浮屠)를 보기 위함이다. 연곡사는 구한말 의병들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기에 절 건축 자체는 답사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 그러나, 소설의 이야기꺼리는 하나 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 보면 최참판댁 안주인인 윤씨부인이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백일기도하러 갔다가 연곡사 주지인 우관 스님의 동생으로 동학의 장수인 김개주에게 겁탈당하고 사생아 김환을 낳았었지.
이런 아픔이 있는 절이라 김교수는 곧장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나, 나는 얼른 동백나무 그늘 아래에 조용히 서있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부터 본다. 고광순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분연히 일어선 이래 영호남을 오가며 10년을 암약하던 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광순 의병장은 고종의 밀지를 받아 다시 일어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형세가 불리해지면서 이곳 연곡사에 들어와 유격전을 펼치던 중, 1907년 음력 9. 11. 일본군경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그런 고광순이었기에 당연히 사람들은 이곳에 순절비를 세웠을 것이고, 담양군에서는 기념관까지 건립한다고 한다. 그런데, 순절비를 보니 고광순의 그 기개는 315년 전의 선조의 기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바로 고광순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 3부자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산길을 돌면서 조선 효종 원년(16는0)에 세워진 서부도부터 고려 초기의 북부도, 통일신라 시대의 동부도로 훑어나갔다. 김교수는 동부도부터 보려고 하였으나, 오래간만에 오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 서부도부터 보게 되었다고 한다. 시대를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니 처음 본 북부도가 제일 정교하고 작품이 뛰어날 것 같은데 거꾸로다. 이를테면 동부도는 부도 지붕의 기와선까지도 하나하나 세밀하게 새겼는데, 북부도는 기와선이 굵직하고, 서부도는 아예 기와선이 없다. 통일신라 시대에 불교문화가 찬란히 피어나면서 부도도 제일 정교하며 화려하고, 오히려 시대를 갈수록 그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이, 문외한인 우리가 보기에도 그 차이를 한 눈에 알 수 있겠다. 그러므로 언뜻 보면 서부도의 작품성이 제일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유홍준 교수는 오히려 북부도는 동부도를 모방한 작품임에 반하여, 서부도는 동부도를 본뜨면서도 이를 익살스럽게 변화시켰다며 이는 모방이 아닌 변주(變奏)이며 계승이라면서 서부도를 북부도보다 더 높이 쳐주고 있다.
동부도 옆에 있는 동부도비는 탑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귀부 위에 바로 이수를 얹었다. 그런데, 보통 귀부는 머리는 용, 몸은 거북, 발은 사자, 꼬리는 소꼬리로 되어 있는데, 동부도비의 거북 등껍질에는 날개가 더 달려있다. 등껍질에 날개가 달려있는 부도비는 처음 보는 것 같다. 탑비는 어디로 갔을까? 김교수는 탑비는 글씨가 잘 써지는 대리석을 사용하는지라 재질이 약하여 제일 먼저 무너지기도 하고, 또 대리석이라 사람들이 이를 빼가서 벼루로 사용하거나 베게 등에 사용하기에 제일 먼저 없어진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니 예전에 중국 항주에서 뇌봉탑을 보았을 때, 뇌봉탑에 금벽돌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벽돌을 빼가는 바람에 1924년 탑이 무너졌었다는 얘기가 생각나네. 문화재 보존보다는 제 욕심이 앞서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욕심이란...
이제 오늘의 답사일정을 모두 마치고, 우리는 오늘밤 잠자리를 찾아 광양 필레모 호텔로 이동. 저녁을 먹은 후 각자의 소개시간. 사실 CAP 강의가 시작된 지 1달이 다 되어 가는데, 수업 끝나면 집에 가기 바빠 이렇게 서로의 소개 시간을 갖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소개하면서 보니 정00, 조00 원우, 김00, 조00 원우가 부부지간이라고 한다. 부부가 같이 입학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그리고, 남편이 또는 아내가 먼저 CAP 과정을 다녀 이번에 배우자가 CAP 과정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CAP 과정만의 특색이 아닐까? 소개 시간이 끝났으면 친교의 시간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호텔에선 10시에 식당문을 닫아야 한다고... 그러나, 이제 막 서로 알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그칠 순 없어 고교선배인 홍00 원우가 자기가 쏜다고 노래방 가잔다. 상당수의 원우들이 비가 부슬거림에도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친교의 시간을 가지면서 오늘 하루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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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바람의 전설을 캐는 사람같이... 글 내용 중, '고광순의 그 기개는 315년 전의 선조의 기개에서부터 비롯되었다.'에서 선조를 '조상'으로 바꾸는 게 어떨지요? 선조는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나라보다 개인의 권력에 집착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선조로 오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아~~ 그렇게도 오해될 수 있겠네요. 나도 선조 임금의 쫄쫄함은 아주 싫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