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초의 반란 / 조영안
나와 친구들은 그녀의 집 뒤안에서 함께 산다. 몇 병은 바깥에도 있지만 작은 친구들은 거의 안에 있다. 그리고 입구 제일 큰 통에는 100가지 이상의 친구들이 한곳에 살고 있다. 보일러실 겸 창고인데 제법 공간이 넓다. 반대편에도 작은 문이 있어 공기가 잘 통해서 우리가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집주인인 그녀가 고맙게도 4단 칸막이를 3면에다 만들어 줬다. 작은 병은 위, 큰 병은 아래에 진열했다. 그리고 항아리 몇 개는 바닥에 놓았다. 주인은 날마다 눈 맞춤해 주면서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았다. 이름표도 달아 주고 '발효가 잘되어라'고 말도 걸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관심이 멀어졌다.
그렇게 부지런히 우리를 보살피던 그녀가 왜 우리를 외면하는지 의문이다. 몸에 좋은 산야초 발효액이 이렇게 많은데 그녀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매실이다. 매실 수확철인 6월이 되면 시끌벅적 소란스러워 우리도 덩달아 잠에서 깬다. 매실을 사과 쪼개듯 잘라서 설탕과 버무려 장아찌를 담는다. 청매실이 단단할 때 담아야 제대로 된 발효액과 나중에 아삭아삭한 식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액기스는 늦매실이라 익어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문 앞쪽에는 큰 항아리가 줄지어 서 있다. 단지마다 진액을 담는다. 주인이 좋아할수록 우리는 한숨을 쉰다. 매실보다 우리가 못 한 걸까? 약성은 더 뛰어난 친구들이 많은데 왜 그녀는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걸까? 그녀가 밉다. 어쩌다 할머니가 뒤안을 기웃거리며 "쯧쯧, 저것들을 다 어찌할꼬?"라며 혀를 찬다.
그녀는 올여름에도 매실 진액을 가지러 왔다. 뒤따라 온 그녀의 남편이 “저건 언제 줄 건데? 저러다 썩겠다."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래될수록 좋은 거여. 기둘려 봐."라고 답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병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들 이름은 다 잊어버렸나 보다. 처음에 그녀가 달아 준 이름표를 여전히 붙이고 있는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 지워졌거나 없어졌다.
사실 우리가 태어난 고향은 다 다르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인제, 전라도 생일도, 경남 밀양 등이다. 그중에서도 밀양 산속에서 온 친구들이 제일 많다. 활동하고 있는 산야초 카페 6만 회원 중 그곳에 사는 회원 한 명과 가깝게 지내서 얻은 것이다. 주위에서 인정하는 자연인이라 방송에서도 여러 번 섭외가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해병대 출신으로 공직에서 퇴직하자, 화가인 부인의 요양차 산속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산골 텃밭을 일구며 혼자 산다.
그 회원이 계절마다 우리 주인을 생각하여 직접 채취한 약초와 열매를 보내 준다. 그녀 역시 백운산 고로쇠가 나오는 이른 봄이 되면 답례를 한다. 그러면 또 얼마 후 다래 수액을 그녀가 보낸 그 병에다 다시 채워서 준다. 다래 수액은 고로쇠보다 더 빨리 변질되기에 바로 얼려서 두고 먹는다. 홀짝홀짝 혼자서 잘 챙겨 먹는 그녀를 보고 부러워하는 주위 사람도 많다.
충청도 금산에서 온 약초도 있다. 사이버상에서 만난 인연이지만 주인과는 제일 가까운 친구가 부친 것이다. 친구는 광주에서 목사로 있다가 건강상 은퇴했다. 고향 금산으로 가서 약초와 인삼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는 1년 내내 인삼이 끊어지지 않는다. 주인이 금산 친구와의 인연을 말하면 주위에서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완도 생일도에서 함께 온 바위솔은 화단 앞에 자리했다.
그런데 우리는 뭐람? 더운 여름날 얼음 동동 띄워서 약성이 짙게 우려낸 발효액을 넣으면 세상 어디에도 없게 맛있다. 몸에도 좋고, 갈증도 해소된다. 그런데 주인은 우릴 잊었는지 요 몇 년간 찾지도 않는다. 그러니 유일하게 주인의 은총을 받는 매실을 우리가 구박할 수밖에. 제주도에서 온 청귤과 대구에서 온 오미자는 이미 4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포장도 뜯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만 있는 나 역시 그 맛이 어떤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다압 매실 농원 사잇길에서 온 질경이도 내 옆에 서 있는 병에 담겼다. 그녀에게 꼭 필요한 약초다. 뒷문 앞 진열장에 있는데 그녀가 꾸준히 먹는 걸 여러 번 봤다. 그런데 어느날 창고로 들어 온 후로는 한 번도 찾지 않는다. 애정이 식은 이유가 뭘까? .
엣날처럼 밝고 신나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그녀가 그립다. 그때는 산으로, 들로, 섬으로, 바다로 산야를 누벼 채취한 재료로 부지런히 병을 늘려갔다. 1박 2일간 체험하던 장성에서의 활약은 더 빛났다. 뚱뚱해진 그녀는 그 많은 인연들과도 멀어졌나 보다.
지난주 일요일 아침, 드디어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긴 호스가 들려 있었다. "잘 있었나? 너희들 목욕시켜 줄게."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목소리인가. 철철 흐르는 호스의 물소리만 들어도 잠이 깨는 것 같았다. 또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그녀의 딸이었다. "엄마, 제가 호스 잡을게요." 딸은 더 신나 했다. 뽀드덕뽀드덕 소리가 나게, 한 병 한 병 정성스럽게 닦았다. 한바탕 청소를 마친 그녀는 "이젠 정리를 좀 해야겠다. 나눔도 하고 우리도 좀 먹고. 참 이름표도 다시 달아야겠어. 꾸지뽕 열매랑 늦가을 파물 가지랑도 발효액으로 담아야겠어." 라고 말했다. 그녀가 다시 기지개를 켜는 걸까?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이 밝은 미소로 가득했다.
첫댓글 이 글을 쓰신 계기로 약초 발효액에 더 신경 쓰시겠네요. 저도 남편이랑 엄마 이야기 쓴 이후에 이전보다 말이라도 더 이쁘게 하고 있어요. 글쓰기가 참 묘하네요. 쬐금 더 착해지는 것 같아요. 하하.
우와, 약초 발효액 전문가시군요. 선생님.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산야초 전문가시네요. 다양한 발효액을 담그시네요. 맛도 궁금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전문가는 아닙니다. 한때 꽂혀서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아니예요. 완전 손을 놓았답니다. 나이가 발목을 잡네요.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