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安道
李安道字逢原, 號蒙齋, 眞寶人。 文純公滉孫。 中宗辛丑生。 明宗辛酉進士, 官直長。 宣祖甲申卒。 享禮安東溪書院。
公生於先生之門, 學詩學禮, 嶷然早成, 一時名流之景仰先生者, 願與之爲交, 惟恐或後。
公天分醇厚, 襟懷樂易, 與人爲同僚, 雖武人小官, 莫不推誠相待, 無簡勿怠倦之色, 咸曰: “眞忠信人。” 先公在義城, 任所遘疾。 公聞之, 星夜馳往, 在途聞變, 竟不勝喪。 翌年卒。 柳根撰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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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墓碣銘 -유근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 문순공文純公께 맏손자가 있으니, 안도安道이다. 만력萬曆 갑신년
(1584)에 생을 마쳐, 예안 건지산搴芝山 선생 유택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공의 부인 권씨가 일찍이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공에게 묘갈명墓碣銘142)을 요청하였
는데, 묘갈명을 짓고는 정공이 세상을 떠났다. 권씨는 나 류근柳根이 선생의 문하에 들어
일찍이 군자와 종유하였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마음을 다하여 “서천공께서 벌써 묘갈명을
지었으나, 이 글은 묘소의 묘지문墓誌文으로 쓰고 싶습니다. 원컨대 공의 한마디 말을 얻어
묘도에 비석을 세워서 세상에 드러내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고사하며 “굳이
저의 말을 얻고자 한다면 청컨대 묘지명을 짓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권씨가 거의 수십 차례 반복하여 “미망인의 한 목숨이 아직 붙어 있을 적에 다만 성취시켜
후사를 세우는 하나의 일과 묘갈을 세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유명幽明 간에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공께서 차마 어찌 사양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병오년(1606)에 권씨가 세상을 떠나서 내가 만사에서 끝까지 저버리지 않으려는 뜻을
대략 언급하였는데, 이제 11년 만에야 비로소 묘갈명을 짓는다.
공의 자는 봉원逢原이고, 호는 몽재蒙齋이다. 공의 아버지 준寯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
로, 바로 퇴도 선생의 맏아들이다. 공의 어머니 금씨琴氏는 고려 태학사 의儀의 후손이자,
훈도訓導 재榟의 딸이다. 가정 신축년(1541) 6월 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선생의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가학을 이어받아 의연히 일찍 성취하였다. 나이
21세가 되던 신유년(1562)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경오년(1570) 겨울 12월에 퇴도 선생께서
운명하시어 신미년(1571) 봄에 장례를 마치자마자, 어머니의 초상을 당하니, 부자父子가 묘소
에 여막을 나란히 차렸다.
상복을 벗으니, 선비들이 퇴도 선생의 손자가 빨리 조정으로 들어가 벼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논의하였다. 갑술년(1574),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풍저창 부봉사豊儲
倉副奉事로 옮겼으며,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에 승진되었다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으로
옮겼는데, 낮은 관직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므로, 그때마다 명성과 칭송이 있었다.
계미년(1583)에 아버지 현감공께서 의성현義城縣에서 병이 들었다. 공이 소식을 듣고 밤낮
을 이어 달려갔으나, 길에서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이 종천終天의 아픔을 겪은
나머지 바로 다음해 8월 7일에 끝내 상을 마치지 못하니, 향년 마흔 넷이다.
공은 천품이 순후하고 심성이 온화하여 학문을 즐기고 선을 좋아하며, 의를 과감히
실천하면서 늘 미치지 못한 듯이 하였다. 공이 비록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으나 하고 싶어 한 것은 위기爲己143)의 학문이었다. 한 때의 명유들로 퇴도 선생을
경모하는 사람들이 모두 더불어 벗이 되기를 원하며 혹시나 남에게 뒤질세라 걱정하였다.
공은 방정하고 또 매우 겸손하여 마치 옷을 감당하지 못하는144) 듯이 하였으나, 만족스러
운 자득145)의 경우는 가릴 수가 없었다. 남과 더불어 동료가 되면 비록 무인武人이나 음관蔭
官이더라도 모두 성실히 서로 대하며 터럭만큼이라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하는 빛이 없으
므로, 모두들 “참으로 충신忠信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효도하고 우애로우며 돈독하고 화목함은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것이 비록 자질이 참으로 남들보다 뛰어남이 있어서이나,
또한 어찌 가정에서 직접 훈도되어 보고 느낀 효과가 아니겠는가?
권씨는 실지 안동의 대성으로, 옥당 교리玉堂校理 달수達手146)의 손녀이자, 부사府使 소紹의
딸이다.
공은 1남을 두었는데, 요절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선생 문하의 여러
공이 대부분 선생의 후사를 빨리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공의 아우 목사 영도詠道147)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권씨가 개연히 말을 하였다. “여러 공께서 일찍이 우리 시아버지께 배웠는데, 어떻게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제가 죽기 전이어서 제사를
받들 수 있습니다. 시동생이 이제 한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이 아이는 장자라서 남의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또 아들을 낳아 데려다 우리의 후사로 삼는다면 어찌 옳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조리가 있어 여러 공이 권씨의 생각을 꺾지 못하였다.
계사년(1593)에 공의 아우가 둘째 아들을 낳아 즉시 후사로 세웠으나, 바로 요절하였다.
을미년(1595)에 또 셋째 아들을 낳으니, 드디어 후사로 세웠다. 권씨가 초상을 당하고부터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곡하다가 혼절하고 깨어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조석으로 부축을
받고 일어났는데도 전을 드리는 음식을 살폈으니, 다만 후사를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사지내고 나서 바로 콩을 삶아 그 물을 마시고, 1년이 지나 비로소 죽을 끓여 그 즙을
마셨는데, 한 톨의 쌀도 입에 넣지 않았다. 겨울에는 한 조각의 솜옷도 입지 않으며, 거적에
서 자고 흙덩이를 베며, 머리도 정리하지 않고 허리띠도 풀지 않은 채, 초상 때와 같이
그대로 한 것이 23년이었다.
이윽고 후사를 세우고 나서, 마침내 세상을 떠나며 공의 묘소 왼쪽에 장사지내라고 유언
하였다. 자고로 수많은 부인이 정렬로써 칭송을 받았으나, 이와 같이 우뚝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만력 갑인년(1614)에 왕명으로 신삼강행실도新三綱行實圖를 엮으면서 권씨를 「열녀편」에
삽입하였다. 병진년(1616) 가을에 유사에게 명하여 정려하였다.
사자嗣子 억嶷은 지금 벌써 성인이 되어, 광주 목사 성안의成安義148)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과 딸을 두었다. 맏아들은 명철命哲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공은 3녀를 두었다. 맏이는 순천 군수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홍여율洪汝栗에게, 둘째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금개琴愷149)에게, 셋째는 생원 박홍경朴弘慶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의
는 4남을 두었다. 유환有煥은 양천 현령陽川縣令이고 유형有炯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이고
유엽有燁·유찬有燦은 모두 요절하였다. 장령은 2녀를 두었다. 맏이는 생원 성이성成以性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어리다. 생원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양천 현령은 2남을 두었다.
별제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한다.
요절하고도 명성이 나니 夭且流聲
누가 장수이고 누가 요절이며 孰長孰短
어디가 무겁고 어디가 가벼운가 何重何輕
사람이 정말 스스로 탐구하여도 人固自求
천리는 실로 알기 어렵네 天實難知
공의 태어남 우연이 아닌데 公生不偶
수명이 어찌 여기까지인가 命胡至斯
과정150)의 가르침 받고 過庭之訓
위기의 학문 닦았네 爲己之學
군자의 좋은 배필 君子好逑
두 아름다움 한데 합쳐졌네 兩美必合
막내아우에게 아들 있어 惟季有子
바로 공의 뒤를 이었네 卽公之後
명하여 밝히노니 銘以昭之
바라건대 길이 전해지소서 庶垂不朽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진원부원군晉
原府院君 류근柳根이 짓다.
墓碣銘
退陶李先生文純公有適孫曰安道。卒於萬曆 甲申。葬于禮安搴芝山先生塋域之東。公配權氏 嘗乞銘于西川君鄭公崑壽。文成。鄭公逝矣。權氏 以根。獲登先生門。嘗從君子遊。屢屢致意曰西川。 固已撰碣銘。欲以此誌于墓。願得公一言碣于隧。 以昭于世。根固辭曰必欲得吾言。請爲誌銘。權氏 反復殆數十曰未兦人一息尚存。但欲成就立後 一事及墓碣。幽明不可㤀。公何忍辭之。丙午權氏 云兦。根於挽辭中。略及終不負之意。今十有一年而始爲之銘。公字逢原號蒙齋。公考寯軍器寺僉正卽先生之胤子也。公妣琴氏。高麗 太學士儀之 後。訓導 榟之女。以嘉靖辛丑六月四日生公。公 生于先生之門。學詩學禮。嶷然夙成。年二十一。中 辛酉生員。庚午冬十二月先生易簀。辛未春。公居 母憂。父子幷廬于墓。服闋。士論以爲先生之孫。不 可不速入官。甲戌授穆淸殿參奉。遷豐儲倉副 奉事。陞尚瑞院副直長。轉司醖署直長。不卑小官。 輒有聲稱癸未歲大人宰義城縣。遘疾。公聞之。星 夜馳徃。在途聞不救。公遭此終天之痛。乃於翌年八月七日竟不勝喪。年四十四。公天分醇厚。襟懷 樂易。嗜學好善。勇於爲義。常若不及。公雖不廢應 擧。其所欲爲者。爲己之學。一時名流之景仰先生 者咸願與之爲友。猶恐或後。公方且謙謙。退然若 不勝衣。至其充然有得則不可掩也。其與人爲同 僚。雖武人蔭官。莫不推誠相待。無一毫簡忽怠倦 之色。咸曰眞忠信人。公之宅心如此故。孝友敦睦。 人所不可及。是雖資質固有過人者。亦豈非家庭 親炙觀感之效哉。權氏實安東大姓。玉堂校理 達 手之孫。府使 紹之女。公生一男早夭。公不幸早世。
先生門下諸公。多以爲先生之後嗣不可不早定。 其意蓋欲以公之弟府使 詠道。主祀。權氏慨然曰 諸公嘗學于吾舅大父先生。奈何。不念繼絶之義 乎。今吾未死之前。可以奉蘋蘩。所天有弟。今有一 男。此則長子。不可爲人後。若又生男。取以爲吾後。 何不可之有。其言有倫序。諸公莫能奪。癸巳。公之 弟生次子。卽立爲後。旋夭折。乙未又生第三子。遂 以爲後。權氏自遭喪。日夜號哭。絶而蘇者數矣。朝 夕扶而起。必視奠具。徒以繼嗣未定之故。旣葬。乃 煮豆呷其水。過朞始煮粟啜其汁。口不入一粒稻米。冬不掛一片緜絮。寢苫枕塊。不理髪不解帶。一 如初喪者。垂二十三年。旣立後。遂不起。令葬于公 墓左。自古婦人之以貞烈稱。何限。未聞若是之卓 爾者。萬曆甲寅命撰新續三綱行實。權氏與 於烈女。丙辰秋命有司旌門。嗣子嶷。今已成人。 娶光州牧使 成安義之女。生男女。男長命哲。餘幼 公生三女長適洪汝栗 順天郡守贈吏曹叅議 次適琴愷 司憲府掌令次適朴弘慶生員叅 議生 四男曰有煥 陽川縣令曰有炯 掌苑署别提曰有 燁曰有燦皆早夭掌令生二女長適成 以性生員
次幼生員生二女皆幼陽川生二男别提生一男 二女皆幼銘曰 壽猶無聞夭且流聲孰長孰短何重何輕人固自 求天實難知公生不偶命胡至斯過庭之訓爲己 之學君子好逑兩美必合惟季有子卽公之後銘 以昭之庶垂不朽 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輔國崇祿大 夫晉原府院君 柳根撰
142) 묘갈명(墓碣銘) : 문집에는 정곤수(鄭崑壽)가 묘지명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류근(柳根)이 지은
묘갈명을 살펴보면, 권씨가 정곤수에게 부탁한 글이 묘갈명이었기에 본 번역에서는 이를 따랐다.
143) 위기(爲己) :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에서
온 말이다.(論語 「憲問」)
144) 옷을 감당하지 못하는 : 공손하고 겸양하는 모습을 말한다. “문자는 그 마음이 겸손하여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고 그 말이 어눌하여 마치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다.[文子 其中退然 如不勝衣 其言吶吶然
如不出諸其口]”에서 온 말이다.(禮記 「檀弓下」)
145) 만족스러운 자득 : 한유(韓愈)의 「상사일에 연 태학에서 거문고 연주 소리를 듣고 지은 시의 서문[上巳日燕
太學聽彈琴詩序]」의 “저물어 물러날 쯤에는 모두 만족스러운 자득이 있는 듯하였다.[及暮而退 皆充然若有
得也]”에서 온 말이다.
급제하여 예조 정랑‧금산 군수‧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망월헌유집이 있다.
여, 예문관 검열·수찬을 역임하였다. 갑자사화 때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계집이 있다.
147) 이영도(詠道, 1559~1637) : 자는 성여(聖輿), 호는 동암(東巖), 본관은 진성이다. 음보(蔭補)로 군자감
참봉을 제수받은 뒤, 충청도 판관‧원주 목사‧호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48) 성안의(成安義, 1561~1629) :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광주 목사·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부용당일고가 있다.
149) 금개(琴愷, 1562~1629) : 자는 언강(彦康), 호는 망월헌(望月軒),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금산 군수‧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망월헌유집이 있다.
150) 과정(過庭) :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