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올드 오크 >> 켄 로치 감독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서태지의 <시대 유감> 중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한참 울먹였던 기억이 난다. 2-3년 전의로 기억하는데, 이 영화는 2016년 작이었다. 당시도 근처에 상영관이 없어 전철을 타고 서울 어딘가에서 보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사는 오산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데, 일요일에 모처럼 전철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보니 지하철도 오랜만에 타보았다. 신도림까지 급행으로 50분이 걸려 도착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이 정도의 거리는 대수롭지 않은 길이겠지만, 오랜만의 장거리 여행은 약간 설레었다. 게을러서도 그렇지만 직장과 집이 있는 오산을 벗어날 기회가 드물다. 오산이 작은 도시라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못 본 곳도 많고 가보지 못한 곳도 많다. 지금은 오산역 앞이 광장으로 꾸며져 있지만 전에는 주차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한 번은 물건을 받을 일이 있어 주차장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차를 가져갔다가 헤맨 이후엔 부득이하게 차를 가져갈 일이 있더라도 가져가지 않는다. 역 앞 광장은 공공장소이고 이 장소가 자동차에 점령되지 않고 공공장소로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공공의 것들이 갈수록 사적인 것들에게 더 이상 침범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강은 부자들의 정원이 되었고, 해운대도 사적인 호수가 되어가고, 경치 좋은 곳들은 온통 카페들이 전망을 사유화 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공공의 가치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수렴되고 있고, 사랑, 자유, 평화 등의 가치도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유화하고 있지 않은가?
켄 로치 감독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직하고 따뜻하다 아름답다고 느낀다. 여기서 정직과 따뜻함과 아름다움은 공공재이다. 감독은 올해 89세로 건강상 이유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듯하다고 하였다. 그는 노동자와 빈민과 가난한 사람,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평생 만들어 왔다고 한다. 나에게는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큰 일을 한 사람들 앞에 ‘위대한’ 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는 모든 것들을 ‘대중화’시키고, ‘개인화’하고 , ‘난쟁이화’ 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런 경향에 저항하기 위해 큰 일을 한 사람들 앞에 ‘위대한’이란 칭호를 붙이고자 하는 객기를 부린다.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영화를 굳이 보려고 먼 길을 간 이유는 무료하거나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영국의 어느 폐광촌이다. 퇴락해가는 폐광촌에 어느 날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온다. 이 지역사람들에게 사전에 동의를 구했거나, 통보를 하지도 않아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모르는 이방의 사람들이 마을에 들이닥친 셈이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냉대하고 배제하고 무시하고 거부 반응을 보인다. 폐허에 폐허를 더한 꼴이다. 이 마을은 광산업이 한창일 때 호황을 누렸으니, 폐광으로 점점 쇠락해 가고 부동산 가격은 형편 없어지고 생계도 막막한 마을이다. 희망이 사라진 마을에 시리아 전쟁 난민까지 들이닥치니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된다. 시리아 난민들은 절망한 사람들에게 배제와 차별을 할 선택을 주었고, 자신의 불행을 전가시킬 구실을 준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누군가를 증오하고 배제하면서 위로를 얻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난민의 유입은 극적인 사건이지만, 생각해보면 늘 삶은 그런 우연이 바깥으로부터 오는 무엇에 저항하며 적응하며 살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광산업의 호황도 폐광도 그들의 결정과 선택이 아니었듯이, 난민의 유입도 어느 날 갑자기 바깥에서 온 사건이었다. 부자들이나 부자 나라는 자기네들이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한다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늘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폐광에는 파업으로 맞섰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생기를 잃은 사람들이 난민의 유입에는 어떤 식으로 대처하고 헤쳐나갈까? 영화는 서로를 배제하고 증오하고 차별하며 삶을 살아가는 대신 용기와 저항 연대의 서사를 그려낸다. 영화는 이제 노골적으로 용기, 연대, 저항 세 글자를 새겨넣은 대형 깃발을 높이 쳐들고 행진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이제 이 노감독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일지 모르는 이 영화에 기술이나 상징이나 은유도 없이 용기, 저항, 연대를 펼쳐 든다. 어쩌면 노장은 평생 용기, 저항, 연대를 외쳐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올드 오크>는 이 마을의 마지막 남은 펍(선술집)이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선술집도 이제는 백수가 된 술꾼들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회도 시의회도 관공서도 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제 모이지 않는다. 비록 소수의 실업자 술꾼들만 모인 장소이지만, 그래도 이곳이 동네의 유일한 공공장소이다. 호황기에는 광부들로 북적였고, 파업시에는 가게에 딸린 큰 방에서 같이 밥을 해먹고 함께 싸운 장소였다. 영화는 패배와 쇠락의 <나의 올드 오크>가 어떻게 연대와 용기와 저항의 장소로 변모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20년 동안 문이 잠겨 있던 사랑방이 다시 문을 연다. 전기도 낡고 배관도 부실하고 먼지만 잔뜩 긴 사랑방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시 밥을 같이 먹는 공공의 장소가 된다. 이들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함께 밥을 먹을 때 더욱 단단해진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회를 지켜라/ 식상한 표현이지만,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사교나 비즈니스가 아니라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은 모든 것에서 공공성을 제거하고 ‘사적소유화’ 하고 있다. 이제 고립된 방에서 혼자 울고 혼자 웃고 혼자 분노하곤 한다. 광장은 공공성을 상실해가고 사람들은 광장 대신 대형 쇼핑몰에서 사적 모험을 즐긴다. 모든 아름다운 가치는 공공성이 제거되고 개인에게 귀속된다. 자칫 공공성을 이야기 했다가는 전체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함께 밥을 먹지 않고 함께 모이지 않으니 용기 대신 고립을 저항 대신 순응을 연대 대신 소유권을, 함께 하지 않으니 단단해지지 않는다. 신영복 선생은 '함께 맞는 비'라고 했다. 용기, 연대, 저항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함께'는 연대 '맞는'는 저항과 용기를 의미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나의 올드 오크/를 공공의 장소로 만들고 공공에 돌려주었듯이, 사회를 ‘사유화로부터 지켜내고, 아름다움을 사적영역에서 공공장소로 돌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켄 로치 영화는 소박하고 따뜻하고 용기, 저항, 연대의 정신에 충만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 흐르는 이 땅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
첫댓글 /이 영화는 패배와 쇠락의 <나의 올드 오크>가 어떻게 연대와 용기와 저항의 장소로 변모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영화 감상문이 지난 독서감상문 못지않게 내용이 풍성합니다.
이렇게 영화 감상을 쓰다니 풍요로운 삶처럼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