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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빙상 경기가 열렸습니다.
우리나라 선수가 스피드 스케이팅
5,000m와 1만m에서 은메달 1개,
금메달 1개를 땄습니다.
이 선수가 누군지 아십니까?
이승훈 선수입니다.
원래 이승훈 선수는 쇼트트랙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2009년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국가대표 탈락이라는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 후 방황이 시작됩니다.
3개월 간 스케이트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교수님의 권유로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꿉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4개월 만에 세계대회에서 5위의 성적을 거둡니다.
그리고 올림픽에 나가서는 금메달까지 땁니다.
그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넘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저에게는 대학 입시가 그랬습니다.
수시 원서를 넣으면서 선생님이
“여기는 네 성적이면 당연히 붙을 거야.”
라고 하셨습니다.
1차 서류 접수를 합격하고
면접만 합격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너무 긴장한 탓에 면접에서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결국 수시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끝나는 줄 알고 펑펑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떨어지지 않았으면 어쩔뻔했나?’ 싶습니다.
수시로 떨어졌기에 정시에서 총신대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여러분들 앞에 있습니다.
여기 인생에 가장 큰 고난 중에 있는
인물이 나옵니다.
자의(自意)가 아닌 타의(他意)로 인해
깊고 컴컴한 감옥에 있는 요셉입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을 제외하곤
요셉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잘 아실 겁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형들은 이런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결국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서
이집트까지 내려옵니다.
당시 이집트는 지금 미국과 견줄 만큼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친위 대장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려 갑니다.
이때 나이가 17세였습니다.
오늘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혹은 2학년이니까 미성년자였습니다.
따뜻한 아버지 품에서 사랑만 받고 자라던 그에게
차가운 현실이 다가왔습니다.
누구도 자기 편이 없었습니다.
실수라도 하면 살이 찌르는 원색적인 비난과
폭력으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은
가정 총무가 됩니다.
보디발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를 총무까지 세운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가정 총무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집안 마님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강간 미수범으로 몰아세웁니다.
결국 요셉은 왕의 죄수가 갇히는
감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요셉이라면 어떠셨겠습니까?
만약 제가 요셉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내가 노예로 팔려 온 것도 억울한 데,
감옥은 웬 말인가. 내 청춘 돌려줘!’
이런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뭐가 있겠습니까?
’억울함‘이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억울한 상황이 오면
당장 원인을 찾기 바쁩니다.
요셉도 충분히 형들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원망했다는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간수장을 통해 요셉을 감옥 관리자로 세우십니다.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요셉은 형통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비록 감옥이라는 장소가 요셉을 묶은 것 같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높은 담장을 뛰어넘습니다.
굳게 잠긴 단단한 감옥 문을 뚫어 버립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은
절대 실패가 아닙니다.
중간에 실패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그게 끝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승승장구합니다.
나가는 전쟁마다 승리를 안고 돌아옵니다.
사울왕은 이런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했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미친 척도 해야 했고,
동굴 속에서 빛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만 의지하는 겸손한 왕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런 다윗이 시편 37편 23-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37:23-24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 걸음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기뻐하신답니다.
설령 중간에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더라도
완전히 엎어진 게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전도폭발 훈련을 가르칠 때였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가면서
발표를 했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두 손을 엇갈려 잡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엇갈려 잡은 손과 같습니다.
한 손은 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제가 비록 손을 놓더라도
이렇게 엇갈려 잡은 손은 저를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생 끝났어. 더 내려갈 데도 없어.’
라고 느끼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 앞부분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10년 가까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갇힌 감옥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들어옵니다.
이들은 왕의 가장 측근에 있던 신하였습니다.
당시엔 왕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음식에 독을 넣는 일이 있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
술이나 떡과 같은 음식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지금 저 멀리 타향에서 온
이방 노예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평소처럼 이들을 섬겼습니다.
그날 따라 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을 꿨는데 해석할 자가 없구나.”
당시 이집트에서는 꿈을 해석하는 해석자와,
그걸 기록해 놓은 해몽서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감옥에 있어서 해몽서를 구할 수도 없었고,
해몽가를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잘 듣고 난후 요셉은 해몽을 해줍니다.
“3일 후에 다시 복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나가게 되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억울하게 여기 잡혀있습니다.”
가만힝 듣고 있던 떡 맡은 관원장도
자신의 꿈을 해몽해달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3일 후에 죽게 되는 꿈입니다.”
3일이 흘렀습니다.
바로 왕의 생일을 맞아서 잔치를 베풀던 왕은
특별 사면과 특별 사형을 명령합니다.
요셉의 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살아서 복직하게 되었고,
떡 맡은 관원장은 나무에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감옥 문을 나서면서 술 맡은 관원장은
호언장담했을 것입니다.
“고맙네 요셉. 조금만 기다리게.
내가 자네를 당장 감옥에서 빼주겠네.
그 정도 힘은 있다네.”
그날 요셉은 이집트에 온 뒤 처음으로
초콜릿처럼 달콤한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는 꿈을 말입니다.
요셉의 인생에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찾아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본문 마지막 절은
엄청난 반전을 보여줍니다.
우리 함께 읽습니다.
창세기 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마치 컴퓨터 Delete 키를 누른 것처럼
감옥에서의 기억은 휴지통에 버려졌습니다.
감옥 안에서 요셉은
매일 문밖만 쳐다보았을 겁니다.
간수가 와서 전달사항이 있다고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흐르고 일 년이 넘어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요셉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요셉은 지난 날의 노예생활보다,
억울한 감옥생활보다,
지금 이 기다림이 더 힘들었을 겁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린 작은 이파리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혹시라도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선교사 훈련원에
들어갔을 때 일입니다.
거기에 있는 큐티 노트에 이런 글이 있더랍니다.
“당신은 지금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감옥에 갇혀있다.
지인들에게 생사를 알릴 길도 없다.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지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길을 갈 것인가?”
이 말을 읽고 선교훈련원을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잊혀짐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떡 맡은 관원장은 죽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잊었습니다.
그렇다고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끝난 걸까요?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난 중에 해석이 안 될 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나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도
결국 나와 굉장히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애굽 생활 전반을 배웠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왕의 신하들을 통해
왕실의 내막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집트 총리로 세우시려는 수업 과정이었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한 걸음씩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심을 믿으십시오.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릴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물고, 산불이 나고,
폭풍우를 통과할 때라고 합니다.
이런 때를 고통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피투성이라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어
또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긴 터널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거목이 되기 위해
깊이 뿌리내려야 할 고통의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겪는 외로움,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망하지 않습니다.
보스턴에 보육원에
앤(Anne)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의 엄마는 아빠로부터
폭언과 폭행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곁을 떠나 동생과 함께
보호소에 맡겨집니다.
보호소에 들어간 동생이
아버지 엄마 사랑을 못 받고 크다가 죽어버립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앤은
정신줄을 놓아버립니다.
정신분열증을 앓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도 멀어버립니다.
앤은 회복불능상태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정신병동 독방에 들어갑니다.
매일 괴성을 지르며 시간만 나면
자해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병원에 요청을 합니다.
“제가 예전에 간호사였는데,
저 앤이라는 아이를 돌보게 해 주십시오.”
이 할머니의 이름은 로라였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매일 과자를 가져와서 옆에 두고 책을 읽어주는데
이 아이는 자해하고 괴성을 지르고
뒤로 드러눕기 바빴습니다.
지처갈 무렵 어느 날 초콜릿을 두고 나갔다 왔는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앤이 먹었던 거였습니다.
용기를 얻은 로라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로라 할머니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매일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넣어주었습니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독방 창살에대고 이야기를 말을 하고
급기야 로라 할머니에게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담할 때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치료가 시작된 것입니다.
점점 앤은 회복되다가 2년 만에 정상 판정을 받고
파킨스 시각장애 학교에 등록합니다.
밝은 웃음도 찾았습니다.
그 학교에서 최우등생으로 졸업합니다.
한 신문사에서 앤의 개안수술을 위한 비용을
마련해 주고 그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 후 앤은 신문사에 나온 광고를 보게 됩니다.
“앞을 못 봅니다.
듣지도 못합니다.
말도 못 합니다.
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앤이 이 광고를 보고 누구를 보았겠습니까?
자기를 보았습니다.
또 다른 자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곳에 가면 힘들거라고 만류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만난 아이가 바로 헬렌 컬러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48년간 함께했던 앤은
바로 ‘설리번 선생님’입니다.
설리번은 상처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버려진 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아버지를 향해
원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앤의 상처를
당신의 뜻을 이루는 사명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낭비 하지,
하나님은 상처를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눈물 흘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울며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매 맞고 찔리고 못 박혔던 상처들을
안 보이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이십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상처받은 우리를 위로하고
공감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이 힘들지? 나도 알아. 이거 봐.
나도 이렇게 아팠단다.
나도 배신당했어.
나도 외로웠어.
나도 버림받았어.
그런데 고통이 끝이 아니야.
죽음 이후엔 반드시 부활이 있어.”
세상에서 잊혀질 거란 두려움이
우리를 꽁꽁 옭아매고 있진 않습니까?
요셉과 함께하셨던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가고 계십니다.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와 아픔의 시간을 통해
더 아픈 자들을 위로하게 하시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실 것입니다.
시편 105편 17-19절(우리말 성경)
그러나 그들 앞에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노예로 팔렸던 요셉이다.
그들은 그의 발을 차꼬로 상하게 했고
목에는 쇠사슬을 채웠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씀이 그를 연단했다.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연단되는 중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그날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면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기억하십니까?
<버려진 게 아니라 뿌려진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의 책 제목입니다.
씨앗의 입장에서 보면 씨는
척박한 땅에 버려진 기분일 겁니다.
하지만
농부의 입장에서 씨앗은
버려진 게 아니라 뿌려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은 오늘도
가장 값어치 있는 삶으로 뿌려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다시 일어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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