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서원 배향인물 (1)
1)기대승(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해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영면(永眠)하였다. 그의 관로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3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했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정철(鄭澈)·이호민(李好閔)·유근(柳根)·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 30여명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되었다.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 1책, ≪왕복서 往復書≫ 3책, ≪이기왕복서≫ 1책, ≪주자문록 朱子文錄≫4책 등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2)박상(朴祥, 1474∼15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소(蘇)이고,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 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아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論劾)하여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또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 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3)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우(祐)이며,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는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에 정통하여 우리나라 예학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다. 향리인 연산에서 주로 학문과 교육으로 많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등 예(禮)에 관한 것이 많고 근사록석의·경서변의·사계선생전서등이 전한다. 1688년(숙종 14)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 돈암서원·공주 충현서원·안성 도기서원 등 10여 곳의 서원에 제향 되어 있다.
5)김집(金集, 1574~1656)
조선중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사계 김장생의 차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 김장생의 문하에서 오직 성리학과 예학의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1610년 참봉이 되었으나 실직(實職)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1613년의 계축화옥에 서숙(庶叔)인 김경손·김평손 등이 연루됨에 따라 더욱 벼슬길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선영이 있는 연산에 내려와서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도덕 정치가 강조되고 산림을 중용하는 정치 기풍이 진작되었다. 이에 따라 김장생을 필두로 하여 산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집 또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출사(出仕)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를 사헌부의 헌관으로 부르고자 하였으나 그가 부친의 편양(便養)을 위하여 한사코 사양하므로 지방관에 제수되었다. 부여는 김집이 지방관으로 출사한 최초의 부임지이다. 그러나 부임한지 4년만에 신병으로 사임하였고 이후 임피 현령에 제수되는 등 여러 관직이 주어졌으나 연로한 부친 간병을 위해 모두 사퇴하였으며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야 지평·집의 등을 수행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집은 향리에서 의병을 모아 천안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인조가 이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상경하여 진위(進慰)하고 돌아왔다. 효종 초에 공조 참의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가 이판에 등용된 것은 산림을 등용하여 북벌을 실현하고자 한 교종의 북벌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김자점 등을 축으로 하는 공서파(功西派)가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재야의 기풍을 가지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청서파(淸西派) 계열의 산당(山黨)과는 정면으로 충돌되었다. 당시 김집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산당의 거두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김육(金堉)과 불화가 일어나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한 사건이 있은 후에는 더욱 정계 진출의 뜻을 잃었다. 이후로는 조용히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특히 예서(禮書)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집 사후 사림(士林)들은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문묘(文廟)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1) 두촌(杜村) 박양무(朴楊茂)
자는 약생(若生), 호는 두촌이다. 고려 공민왕 때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김천(金泉) 도독우(道督郵)를 지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 종유(從遊)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 골짜기로 퇴거하였다. 뜻을 함께한 제현(諸賢)들과 은둔하다가 낙향하여 화양 대성산에 은거하여 성학(聖學)을 강마(講磨) 후인을 양성하였다. 정헌(正軒) 이종상(李鍾祥)의 봉안문에 공의 의열(義烈)은 야은(冶隱) 경곡(耕谷)과 짝이된다고 하였다.
2) 화은(華隱) 박계은(朴繼隱)
호는 화은이다. 세종 때 문학과 덕행으로 나라에서 추중(推重)되고 온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하였으므로 후학으로부터 더욱 존경되었다. 고계(高溪) 이휘영(李彙寧) 당향 조문에 ‘ 경학은 가문을 이었고 문아(文雅)한 풍조는 나라에 떨쳤네. 신안에 고려(古廬)를 정하시니 남쪽의 선비들이 선생의 인격을 표준으로 삼았네’ 라고 하였다.
3) 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
호를 호재라 하였다. 성종 때 순천(順天) 교수(敎授)로 직제학(直提學) 최연(崔淵)과 교유하며 문명을 얻었다. 상향 축문에 ‘학문은 두루 소통하였고 덕행은 돈독하여 이륜(彛倫)을 밝혔네. 국왕이 교수에 임명하니 아름다운 은혜가 후인에 미치네’라고 하였다.
4) 농암(聾巖) 박란(朴鸞)
자는 운경(雲卿) 호는 농암(聾巖)이다. 중종 때 진사를 지내며 향도 사림에 공헌한 업적이 현저하였다. 1541년 신축년에는 향로당(鄕老堂) 현판과 향로당 기문을 쓰고 향규(鄕規) 18조를 지었다. 일찍이 삼족당 (三足堂) 김대유 (金大有) 선생과 경재(警齋) 곽 순(郭珣),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선생과 문유하며 의례(儀禮)를 강론하였다. 만념에는 이서 칠곡인 오수곡(吾守谷)
에 정사를 지어 회양정거(晦養靜居)하며 덕행을 펼쳤다. 고계의 당향 축문에는 ‘ 소학의 공을 떨쳐 대현(大賢)들이 그 덕에 감화되는 구나. 기미를 붙잡고 가슴을 풀어내니 그 은혜가 향숙(鄕塾)에 미치는 구나’ 라고 하였다.
1) 전우
1841(헌종 7) 전북 전주~ 1922.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아버지는 재성(在聖)이다. 14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으며, 21세에는 당시의 거유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로 아산의 임헌회(任憲晦)를 직접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감역·강원도도사,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에는 순흥부사·중추원찬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소(疏)를 올려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갔다. 지금의 부안·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72세에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6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문 성향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였다. 전우는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계승하여 이(理)는 무위(無爲)임을 주장하고 실제상의 작용은 모두 기(氣)가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이의 명덕지시본심(明德只是本心)을 이어받아 심즉기(心卽氣)·명덕시기설(明德是氣說)을 주장했다. 또한 이이의 심위기주(心爲氣主)를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고 성존심비(性尊心卑)·성사심제(性師心弟) 등 새로운 성리학 용어를 많이 제창했다. 그는 특히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했는데, 이는 낙론계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성격은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했던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지만, 처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즉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받기도 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그는 〈추담별집〉에서 국치에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학문을 이루어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했고, 국권을 회복한다고 외세와 손을 잡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夷狄)이 되는 것이라는 논지로 반박했다. 그의 제자로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 등 3,000여 명이다. 계화도 계양사(繼陽祠), 의령 의산사(宜山祠), 고창 용암사(龍巖祠), 정읍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간재집〉·〈간재사고 艮齋私稿〉·〈추담별집〉 등이 있다.
2) 유영선 1893년~1961년
유영선(柳永善)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소학(小學)』을 배웠다. 1904년 12세 때 할아버지를 따라서 고부 영주산 속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1905년 전우가 부안 목중리로 옮겨 갈 때도 함께 따라갔다. 그 해 4월 전우를 초청하여 관례를 치렀는데, 이때 전우가 자를 현곡이라 지어 주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전우를 따라 서해(西海) 고군산 외딴섬 왕등도(旺嶝島)·계화도(繼華島) 등지에서 20여 년간 갖은 고초를 극복하면서 유학에 전념하였다. 1922년 전우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귀향했다. 1924년 백운산 아래 외화동에 현곡정사(玄谷精舍)를 건립하고, 도학을 보전하기 위해 후진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했다.
1930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가례대로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워 지성으로 모셨다. 1958년 이병은(李炳殷)·김훈석 등과 함께 전우의 진영을 용암사(龍巖祠)에 봉안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1961년 선친의 묘 아래 재실을 짓고 경수재(敬修齋)라 이름 하였다. 이 해 4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문인으로 홍종호, 임종수(林鍾秀), 신사범 등이 있다.
신명동
조선 후기 효자로 자는 군실(君實), 호는 성암(誠菴)이고, 본관은 평산으로 1727년(영조 3)에 나주 월전리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에 들어 위독하자 허벅지 살을 베었고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여러 날을 연명하였다. 장례 이후에도 매일 새벽에 큰 재를 넘어 성묘하기를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또한 학행이 뛰어나 칭송이 자자했다.
신지인
조선 후기 효자로, 자는 인수(仁守), 호는 경와(敬窩)이며, 신명동의 아들로 1767년(영조 43)에 나주 월전리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에 하늘에 빌고 대소변을 맛보았으며, 병세가 위급해지자 허벅지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여러 날을 연명하게 했으며 모친이 병에 걸렸을 때도 작지주혈(斫指注血)하여 3일을 연명하게 하였다. 상을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기를 6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다.
신택렬
조선 후기 효자로 자는 덕유(德裕), 호는 연호(煙湖)이며, 1817년(순조 17)에 아산면 오정동에서 출생하였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으로 학문은 체용(體用)을 겸전(兼全)하고 충효에 독실(篤實)하였다. 순조와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봉소산(鳳巢山)에 단을 쌓고 통곡하였으며, 부친이 병이 들었을 때 한겨울에 붕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눈 속에서 붕어가 튀어나왔으며, 모친이 병에 들어 비둘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산비둘기가 부엌에 날아들었다. 1891년(고종 28)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김용수
조선 후기 학자로 자는 대규(大奎),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김해로 1849년(헌종 15)에 신림면 벽송리에서 출생하였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최익현과 교유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흉년이 들자 여러 차례 가난한 사람을 도와 칭송이 자자하였다. 1889년(고종 26)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신한균
조선 후기 효자로 자는 여의(汝儀), 호는 오정(梧汀)이고, 신택렬의 아들로 1852년(철종 3)에 아산면 오정동에서 출생하였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스승에게서 시(詩)와 예(禮)를 이어받아 이름이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으로 등창이 생기자 고름을 입으로 빨고 대소변을 맛보았으며, 전후 상에 6년을 읍혈(泣血)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흥덕현감(興德縣監) 윤석진(尹錫禛)과 함께 의병을 도모하다가 중앙군이 이르자 선악(善惡)을 구분하였고, 1906년(고종 43)에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시서(詩書)를 즐겼다.
김두안
개항기 의사(義士)로 자는 소원(素園), 호는 호은(湖隱)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1851년(철종 2)에 미면(米面) 미룡리(米龍里)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었다.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궁내부참서관(宮內府參書官)에 이르렀다. 1906년에 최익현, 임병찬과 더불어 창의하였고 옥구향교에서 10년간 봉직하였다.
강수흠
조선 후기 효자로 자는 내호(乃豪),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진주로 1858년(철종 9)에 아산면 상갑리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에 걸리자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하였고, 병세가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여러 날을 연명하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애통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곡읍하고 성묘하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다가 이것이 병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동구(洞口)에 비를 세워 찬양하였다.
신현중
개항기 선비로 자는 경일(景一), 호는 율봉(栗峯), 미산(薇山)이고 신한균의 아들로 1877년(고종 14)에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대성문학원(大聖文學院) 강사로 불렀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부친이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3일 동안 연명하게 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의병을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치고 통곡하였다.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덕산(德山)에 단(壇)을 설치하고 복수를 도모하며, 이후 평량갓을 쓰고 상인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냈다. 부흥산(賦興山)에 들어가 기동강당(箕東講堂)을 지어 ‘단기강산한선일월(檀箕江山韓鮮日月)’이라 크게 써서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강당 뒤에 영광단(永光壇)과 서산단(西山壇)을 세우고 봉향하였으며, 기산서원을 건립하여 충효와 거행(擧行)을 추모하였다.
1)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고령인(高靈人) 계조(繼祖)의 셋째 아들로서, 자는 봉부(奉夫)고 호는 낙락당(樂樂堂)이다. 1521년(중종 16년)에 출생하였으며, 덕행이 겸비하여 효도가 뛰어났으며 학문에 밝아 명서을 멀리 떨쳤다. 남명(南冥) 조식선생과 낙천(洛川) 배선생과 동의로서 사귀었으며, 명종 21년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우곡면 사전동에 있으며, 낙천배신이 비명을 짓고 좌당 곽수구(郭壽龜)가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입향 봉안문(入享 奉安文)을 지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배신(裴紳)과 교우하여 도의가 높고 효성과 덕행이 뛰어나며 학문이 넓었다.
2)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
박정번(朴廷璠)[1550~1611]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송암(松庵) 김면(金沔) 진영에서 의병 참모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다. 도진(桃津) 마을 뒤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를 사실상 주도하여 가형(家兄) 박정완(朴廷琓)과 가동(家僮)을 이끌고 승리하였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친척으로 정유재란 때에는 함께 화왕산에 입성하였다. 선조 때 예빈시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난이 끝나자 문연서당(文淵書堂)을 열어 후학들을 육성하였으며, 학암정(鶴巖亭), 부래정(浮來亭)을 지어 경상우도의 여러 의병들과 함께 어울렸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䞭), 여헌(旅軒) 장현광(張顕光) 등과 교우하여 도덕과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김면 등과 창의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사양하였다.
3) 월오(月塢) 윤규(尹奎)
윤규의 휘(諱)[죽은 사람의 이름]는 규(奎)요, 자는 문노(文老)이다. 관향은 파평인으로 고려 시중 문숙공(文粛公) 윤관(尹瓘)의 15세손이다. 조선 선조 때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월오촌에 은거함에 마을 앞에 대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언덕 위에 기암괴석이 심히 아름다워 평생 외루(畏塁)하였다.
매헌(梅軒) 최여설은 양천인 최원호(崔源護)의 아들로 정구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워 여러 차례 요직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고 초야에서 지냈다. 이러한 다섯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양천최씨 오현세적비를 세우고 문연서원에 배향하여 매년 향사하였다.
4) 죽연(竹淵) 박윤(朴潤)
박윤(朴潤)[1517~1572]은 남명(南冥) 조식(曹植), 낙천(洛川) 배신(裵紳) ,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월오(月塢) 윤규(尹奎) 등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극진한 슬픔으로 효성을 보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특히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네 형제가 한집에 살았는데, 사사로이 재물을 쌓지 않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부인들 또한 화목하게 지냈다. 어머니가 병들자 인분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고, 82세에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5)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
최여설(崔汝契, 1551~1611)의 자는 순보(舜輔)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그는 1551년(명종 6년)에 아버지 원(鶴谷, 源)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구(鄭逑)의 문인이었고, 벼슬은 선조 때 장사랑 훈도(將仕郞訓導)에 제수되었다. 부친 최원의 명으로 남명선생에게 수업하게 되었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의 군에 참가하였다. 금산성(錦山城), 대장산성(大壯山城), 초계(草溪) 등지의 전투에 박정번(朴廷璠), 이득춘(李得春)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향사 :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636년(인조 14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문연서원(文淵書院,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에 있던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
신덕린
여말선초의 서화가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이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의 4세손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으며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 친분이 있었다. 조선 개국 당시 광주(光州)에 은거하면서 지냈으며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박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 후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었으며, 수찬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함을 받아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로 인해 동래로 유배되었으며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사형을 당하였다. 3년 뒤 다시 신원되었으며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박은의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냈다.
정사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희고(希古), 호는 월담(月潭)으로, 고령에 거주하였다. 1508년(중종 3) 고령 월기촌(月器村)에서 태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아홉 살 되던 해에 부친의 병이 중해지자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며,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먹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침저녁으로 제찬을 직접 지어 바쳤으며 낮이면 묘 앞에 엎드려 있고 밤이면 영궤 옆에 엎드려 있을 정도로 효성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홍익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병자 삼학사’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화의론(和議論)에 극구 반대하였다. 병자호란으로 가족과 사위가 모두 죽고 모친과 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듬해 평양부서윤이 되었으나 청나라로부터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사후에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花浦集)』·『북행록(北行錄)』·『서정록(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기재(棄齎) 김수옹은 1513년 고령 월기촌에서 출생하여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3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관인과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추종을 한 몸에 받았다. 김수옹은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김굉필과 정여창을 추모하는 삼수정이라는 학당을 짓자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1559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방민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향림정을 건립하였다.
배신(裴紳)
[1520~1573]은 조선 중기 학자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이다. 조선시대 동인에 속했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으로부터 수학하고 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배웠다. 스승인 조식이 죽자 조정의 명령으로 천거되어 『남명선생언행록(南冥先生言行錄)』을 지어 올렸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565년 남부참봉에 제수되고 경기전참봉을 지냈으며 빙고별좌(氷庫別坐)를 거쳐 1572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후에 후학 양성을 위해 서원을 건립했으며 사후에 현풍 도동서원 별사(別詞)에 봉향되었다가 낙산서원(洛山書院)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모셔졌다. 저서로 『낙천집(洛川集)』이 있다.
1) 김종직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 ·효관(孝). 호 점필재(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1) 권맹손(1390-1456)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 중마( 鳩谷) 출신으로, 용문면 대제리로 옮겨 살았다.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시호는 제평(齊平), 본관은 예천, 상(祥)의 아들이다.
19세로 1408년(태종 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27년(세종 9)에 문과 중시(重試)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여 검열을 제수받은 후 영해(寧海) 부사(1428)로 선정을 하였고, 여러 차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다. 시문도 많이 지어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실려있고, 모든 일에 공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432년(세종 14)에 좌부대언으로서, 왕명으로 악장 문학인 문덕곡(文德曲)과 무공곡(武功曲)을 만들었고, 그 이듬해 3월에 다시 왕명으로, 태조의 공덕을 노래한 몽금척(夢金尺)과 태종의 공덕을 노래한 수명명(受明命) 등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뒷날 <용비어천가>의 창제에 기반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 겨울에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서울로 돌아가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 공조 판서, 대제학으로 올라갔고, 1450년(문종 1)에는 이조 판서로서 의창 제도의 모순과 관리들의 부정을 지적하여 이의 개혁을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고, 함길도 관찰가 되어 네 번째로 도지사 생활을 하였다. 권맹손이 함흥에 문소루(聞韶樓)를 지어 낙성하는 날에 <용비어천가>가 발표되어 기쁨을 더하였다.
그 뒤 중추원 부사를 지냈다. 아홉 번이나 과거 시험관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龜尾山)에 묻히었고, 용문면 하금곡리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권맹손이 1439년(세종 21)에 3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서 예천에 오니, 마침 객사(客舍)가 새로 이루어져 낙성식을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3도를 순찰함에 쉬던 곳이 몇이나 되던고, 순박한 내 고향은 옛 이제가 한결같네. 산은 북에서 내려와서 큰 들에 이르렀고, 물은 동으로부터 달려와서 긴 숲을 둘렸네. ...좋은 계절에 낙성하여 이윽고 늙은 나에게 잔치 베푸니 순찰사도 부질없이 흥이 나서 또한 높이 읊었노라."라고 하였다.
2)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황준량(俊良) 1517(중종 12)∼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금오공 (휘)온인(溫仁)의 13세손,검교공 (휘)진(璡)의 10세손, 문정공파(금계공파)의 파조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휘는 준량(俊良)이며 중종 12년(1517년 丁丑) 풍기 서부리에서 태어나다.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으로 학문(學文)을 닦아 중종(中宗) 31년 진사시에 동 32년에 생원시에 합격 동35년 정시문과에 을과 제2인으로급제하였다.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손자로, 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그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에 박사가 되었고,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중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고,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앞서 그에게 청탁을 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하여 신녕현감으로 나갔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죽었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로 극론하여 단양이 20여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여주는 특은(特恩)을 받도록 하였으며,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치(郡治)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하여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우는 한편,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아끼지 않았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욱양서원(郁陽書院)은 현종 3년(1662)에 창건하여 문수공 이황을 봉안하고 숙종 16년(1690년)에 금계 황준량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5년(1868년)3월9일 훼철되었으나 명칭만 바꾸어 욱양단소(郁陽壇所)로 종전과 다름없이 행해오다가 3백여년만인 1983년 계해(癸亥)에 땜을 막아 욱금리(郁錦里)가 수몰되어 욱양단소를 풍기읍 금계리 장선 마을 금양정사 앞으로 이설하였다. 욱금리의 땜 이름을 금계선생의 호를 따서 금계호(錦溪湖)라 이름하였다. 풍기읍 금계동에 가면 금양정사(錦陽精舍)가있다. 이 곳은 금계공께서 독서를 하시던 곳이며 "죽령의 밑 금계의 위에 돌아가고자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 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퇴계 선생은 그 의 제자인 (휘)준량이 돌아 가신 뒤 행장을 직접 쓰며 이 금양정사를 떠 올렸다고 한다.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16권 5책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은 1567년경 스승인 퇴계의 편차(編次)를 거쳐 단양(丹陽)에서 간행되었다.
1) 강천 이예(薑川李芮)
고려 때의 인물로 마음의 바탕이 충효를 갖추었고 학문과 품행이 온전하였다. 서기1351년에 문과에 등과 하였고, 벼슬은 판도판서에 이르렀으며 합천 인으로 호는 강천 시는 문질이다.
2) 달암 이원달(達巖李元達)
강천 이예의 둘째 아들로 호가 달암이다. 고려조 때 문과에 올랐고,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금원산 조담 암석 위에서 순절하였다.
3) 영계 유환(瀯溪劉懽)
거창 인으로 자는 국노요 호는 영계이다. 서기1337년에 태어나 등 문과하고 여말에 대사헌으로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금원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4) 확계 정옥견(蠖溪鄭玉堅)
이조 성종 때의 학자로 자는 부린이고 학계는 선생의 호다. 초계정씨 입안조 생원 정제안의 손으로 서기1450년에 출생하였다.
학문이 깊고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행의가 돈독하여 세인의 추천으로 중직대부 사포서별제에 잠시 임하였다가 간사한 권신의 농간질이 거슬려 이내 낙향하였다.
향리 사마리 학담 위에 능허정을 지어 장수지소로 삼고 학문 탐구에 몰두 백가서에 통달하였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 헌공께서 안음현감으로 재임할 때 이곳 능허정을 찾아와 자연천리를 즐기며 풍영하고 돌아가 이삼자에게 말하기를 내 오늘날 증점과 더불어 뜻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백세에 두 선생의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음을 짐작케 된다.
선생은 만년에 불 고대에 오르고 학담과 능허정에 노닐며 소요하다가 서기1526년 9월24일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통훈대부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사림들이 선생의 행의를 존모하여 금계서원에 봉향하였다.
1) 삼괴당 권시민(三槐堂權時敏)
안동 인으로 자는 달이 호가 삼괴 당이라. 서기1464년에 삼가에서 성균 생원 전옥서봉사를 지낸 금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 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서기1483년에 사마시에 등과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의가 돈독하여 제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또한 서기1498년 무오사화에 괴란이 지나갈 때까지 질서를 견수하였다. 조정에서 세마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은둔하였다.
선생은 목사 초계인 정종아의 여서로 처향인 사마리로 내려와 그곳에 집을 짓고 뜰에 괴목 세 그루를 심어 삼괴당이라 이름 하였다. 임천에서 요산요수하였으며 강금재 정확계 등과 더불어 강마도의 하다가 서기152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기1780년에 사림들이 추증하여 학림서원에 향사하였다.
2)죽헌 조숙(竹軒曺淑) 1504년(연산군 10)-1582년(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선경(善卿)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아버지는 조승로(曺承老)는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냈으며, 문행(文行)으로 천거(薦擧)되어 훈도(訓導)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는 강양이씨 이계보(李季寶)의 딸이다.
어려서 완산(完山) 이연(李蓮)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에게 수학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문하(門下)에 들어가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김인후는 그에게 《소학(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할 것을 일러주었다.
1531년(중종 2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40년(중종 3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후, 저작 박사(著作博士),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전적(典籍) 등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강론(講論)하였다. 이후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내고,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어 향읍을 교도하는데 치적을 남겼다.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 응교(應敎)를 거쳐 흥양(興陽), 영암(靈巖), 광주(光州)의 수령(守令)을 거쳤다. 선조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임천(林泉)에 은퇴하여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퇴계 외에도 노수신(盧守愼), 이윤경(李潤慶), 소세양(蘇世讓), 정유길(鄭惟吉)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3)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박약재 강위용은 진양인으로 1558년에 성균관진사를 하였고 학문이 깊었으며 도덕이 장한 유현이다.
박약재 선생 유허비명 병서
오직 이 안음의 사마리는 즉 옛적 박약재 선생 강공의 처음 터로 한바라 선생의 휘는 위용이요 자는 문망이니 강씨는 진양의 거벌이 되어 진사 동와공 삼은 그 아버지시며 개암선생 익과 죽헌공 진은 그의 숙부와 계부이라 선생이 중종 병신년에 났으되 전광을 배태하여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순순히 이어 어긋남이 없으니 개암선생이 항상 가성이 떨어지지 않았더라. 어버이 명으로써 치공 거업을 겸하고 모든 체대를 갖추어 장성하여 사원에 입사된지라. 나이 23세에 무오의 사마(진사)안에 드시고 거의 현책(나라에 올리는 계책)이 실효되지 않은즉 문득 뜻을 돌리어 세상관작에 뜻을 끊으시고 오직 마음과 몸을 위하는 학문인 중용 대학 근사록 등 서적을 갖추어서 생각하고 되새겨 거듭 토론하여 성리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여 몸과 마음의 사이에 체험하며 또 송나라 어진 이와 우리 동국 선생의 유적에 나아가서 참여 고정하여 마음가짐과 몸의 행함에 요긴함을 구하여 보고 스승의 법도를 나타내었더라. 손으로 기록하고 입으로 외우며 오직 날마다 부지런이하며 힘써 행함을 알며 그 공을 이름을 새기며 일찍 천군전이란 기살ㄹ 지으시어 마음의 묘한 법도를 발휘하니 모두가 깊이 체험하고 묵묵히 근실하여 고인들의 뜻을 얻게 됨이라 임갈천 첨모당 두 현인을 찾아 놀며 또 정역양 성석곡 여러 현인과 도의로 삼을 만한 기록의 자료됨이 많았더라. 그전에 개암공이 남계서원을 창건하던 것을 공이 뒤이어 그 마치지 못하였던 일을 마쳐서 조두의 의례에 성의를 나타내어서 그 현을 높이고 도를 옹위하는 뜻을 이루었다. 사마리에 처음 거함은 석대 아래 학담 위에 재실 짓고 현판을 박약재라 함은 대개 학문은 넓게 하고 예의를 약속함이여 그대의 이름을 불고라 함은 대개 의를 공경하고 덕을 쌓으면 외롭지 않다는 뜻으로 이것을 취함이라 대저 박약의 공부와 경의의 학이 성문의 전해오는 지결이 되어서 선생의 이름과 그 재실과 대 이름이 이에 벗어나지 않은 즉 그 배움의 깊은 점이 진실로 갖춘 바로 생각된다. 선생이 날마다 어진 벗과 오는 제자와 학문을 상고하고 도를 강론하는 것도 여기서 함께하며 벽에 10도를 걸고 8경을 읊음이 수신해서 나가는 뜻이 환하여 스스로 즐거움을 충분하게 얻었더니 아깝다. 천명을 넉넉히 못 빌려 선조 을해에 졸하니 겨우 40이더라. 이때를 당하여 네 아들 면 함 윤 찬이 어리고 여러 조카가 각기 흩어져 있어 남기신 문적을 간수치 못하고 이곳저곳 흩어져 타다가 남은 영사정운이 있으니 『지난날의 전설을 들으면 영계(유영계)가 이 정자를 지었더라 골바람 불어 나무베개 서늘하고 언덕에선 버드나무 못에 들어 푸르구나 춘산에 고운 경치 글로써 잡아보니 밤하늘 밝은 달은 술잔에 가득하다. 오늘의 깊은 정과 즐거운 이 광경을 선현님이 즐겼으니 어찌타 감할쏘냐.』그 나머지는 있을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 고상하신 은표를 고증할 수 없어 말하느니 원통할지라. 그 후에 고을 사람들이 학림원을 세우고 고을의 6현을 모실제 선생도 향사에 강신하시게 함은 가히 덕 있음을 누구나 확신할 수 있고 선생의 의론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세대가 아득히 멀어지고 서원을 나라에서 금항 거둔지 또 오래되어 유풍이 장차 잊으려져도 오직 옛 마을의 석대와 시냇물은 옛 과 같이 그 당시 노시던 발자취를 나타내어 추모케 하고 고을 사람들이 지적하게 되어 후손이 이 대면에 각했으되 오히려 사실의 기록이 없어 그 자취를 표하지 않으면 멀리 오래도록 표시하기 어려움이라 다시 의론하여 그 아래 한 비석을 세워 알리고자 할새 후손이 선생의 조카 도승지 봉람의 지은 행장문을 품고와서 나에게 증하고 말하거늘 내가 선생의 행풍을 일찍 들은지라 능히 사양하지 못하여 이에 감히 지음을 추렸으며 이어 새겨 말하되 선비의 귀함이여 오직 배움에 있도다. 약을 넓히고 의를 공경함이여 이가 적실됨이로다. 선생의 뜻이 이에 있음이여 가르친 바로 가니 자나 깨나 구함이여 이름 이에 있도다. 도가 유유함이여 수레 주축 부러지도다. 뜻은 어찌 길게 함이여 명은 어찌 요사런고 안자의 즐기던 골목이여 오히려 이 땅에 있으니 남기신 자취를 만져 누가 슬퍼않으리오 돌도 넓고 우뚝함이여 같아도 이지러지지 않고 물 많게 쏟아짐이여 흐름도 쉬지 않음이라. 방불하게 나타남이여 선생 뜻과 기질이니 사람에 받춤이 능함이여 들보 쌓아 세우시다. 내가 사연 돌에 새겨 오는 이여 공경할지어다. 무신(1968) 월 일 화산 권용현 삼가지음 연안 이영달 공경히 씀
3) 금천 류세홍(金川柳世泓)
1536~1597
자는 심원이고 호는 금천이다. 판관 희필(希畢)의 아들로 중종31년에 함양 안의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자 문장이 뛰어나 향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끝내 경시(京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벼슬에 대한 희망을 끝고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다.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고을을 함락하자 당시 늙은 나이로 안의현감 곽준(郭逡)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로 더불어 굳게 방어하할 것을 기약하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가 적과 맞서 싸우는데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출전대장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코자 밤중에 적병을 끌여들어 온 성중을 유린하니 도저히 막을 계책이 없었다. 적군이 칼을 들어 공을 치자 장자 강(橿)이 몸으로 덮치다가 드디어 부자가 한 칼 아래 죽고 찾자 하는 이에 앞서 어머니를 등에 업고 성을 나가 피하니 동년 8월 18일로 공의 나이 62세 였다. 동계 정온이 고의 전을 지었다.묘소는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동에 있다.
4) 원암 곽인(猿岩郭訒)
관향이 청주로 그의 호가 원암이다. 서기1563년에 삼가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종숙인 곽회성의 양자로 안음 원학동에 왔다. 천품이 준수하였고, 효성이 남달랐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늙은 양친을 보살피고 봉양하는 그의 효행에 감복함을 금치 못하였다. 특히 양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여러 해를 앓아눕자 주야를 불문하고 그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으며 하늘에 대신하기를 빌었고 상분(변을 맛보아)으로 치료에 정성을 다 하였다. 급기야 상을 당하자 3년간을 피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민(景敏)·경숙(景俶), 호는 원암(猿巖). 문량공(文良公) 곽추(郭樞)의 7세손으로, 15세에 당숙 곽회성(郭懷誠)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부인은 신복기(愼復起)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어질고 순하며 효성스럽고 자애로워 후부모(后父母)를 낳아준 부모처럼 섬겨 임진왜란 중인데도 상례(喪禮)를 충실히 지켰다.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교유하였다.
5) 난곡 우석일(蘭谷禹錫一)
(1612[광해군 4]-1666[현종 7])는 조선 중기의 학자. 아버지는 하동군수(河東郡守)를 지낸 汝楙할아버지이며 어머니는 고령 김씨(高靈金氏) 부장(部長) 하(河)의 딸이다. 조부인 형(형)할아버지에게 <<소학 小學>> 등을 배 운 후 17세 되던 해에 정온(鄭蘊)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50[효종 1]년에 어머니의 병환을 효행으로 낫게 하여 정려(旌閭: 정문을 세워 표창함)가 내려졌다. 일찍이 과거 시험장에 갔다가 동료들이 부귀와 명예에 급급하여 급제에 혈안이 돼 경박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들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전력하였다.
1649[인조 27]년 음공(蔭功)으로 장사랑(將士郞: 종9품 하의 문산계(文散階))에 오르고 영조(英祖) 때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난곡유고 蘭谷遺稿>> 3권 1책이 있다.
1) 김주(金澍)
고려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일선(一善).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김원로(金元老)이며, 형은 백암(白巖) 김제(金濟)이다.
김주(金澍)는 1392년(공양왕 4)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며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망국의 소식을 듣고 명나라로 다시 돌아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정벌하고 고려를 다시 건국해줄 것을 주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망국의 신하된 도리로 고국에 돌아갈 수 없어 명나라에 있을 것을 청하니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여 고려를 사모하며 충절을 지켜 상서록(尙書祿)이 내려졌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1796년(정조 20) 정조가 직접 제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안동의 고죽서원(孤竹書院), 구미의 월암서원(月巖書院), 고창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양주의 송산서원(松山書院), 곡성의 동진사(東津祠), 춘천의 문암서원(文岩書院), 장성의 경현사(景賢祠), 장흥의 도산사(度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에 부조묘(不祧廟)와 제청(祭廳)인 충렬당(忠烈堂)과 신도비·유허비가 있다.
2)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한다.
1528년(중종 23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1534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45년 형 온계 이해가 을사사화로 희생된 뒤, 여러 번 관작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퇴도(退陶)·퇴도만은·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혹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3) 이정형(李廷馨)
1549(명종 4)~ 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동각(東閣). 아버지는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형조좌랑·사간원정언·예조정랑·사헌부장령·홍문관부수찬·대사성·형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扈從), 개성부유수로 특진되었다. 이때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개성이 함락되자 형 정암(廷馣)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격파했다. 장단(長端)·삭녕(朔寧) 등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기호·호남의 길을 행재소(行在所)로 통하게 했는데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장례원판결사로서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 탈환전에 참가하고, 1594년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왔다. 이후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비변사당상·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95년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어 군권을 담당했다.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말년 북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이 밀려나자 병을 핑계로 양주로 퇴거했다.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06년 삼척부사로 부임,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평소 이황(李滉)을 흠모하여 호를 지퇴당(知退堂)이라 지을 정도였던 그는 남인인 이원익·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까이 지내며 학문을 연마했다
4) 조경(趙絅)
1586(선조 19)~ 1669(현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김상헌(金尙憲)·이정구(李廷龜) 등과 교유했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대북정권하에서 과거를 포기, 거창에 물러가 살았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고,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했다. 이무렵 서인계 공신(功臣)이 조정의 여론을 무시하며 정국을 좌우하자,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함께 맞서며 남인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지평으로 있으면서 같이 공부했던 김상헌과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탄핵하여 조야(朝野)의 지원을 받았다. 1630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에 군사를 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자고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거쳐 1643년 왜란 후 재개된 5번째의 일본사행(日本使行)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서 다녀왔다. 이때의 일을 〈동사록 東槎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이어 형조참의·김제군수·전주부윤·대제학 및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예조판서로 재직중,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챈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를 보내어 추궁하고 죄를 주고자 하는 등 위기에 처하자,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책임을 떠맡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후 은퇴했다. 이후 포천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살던 중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허목(許穆)·윤휴(尹鑴)·홍우원(洪宇遠) 등과 함께 서인의 의견을 반박하고 3년설을 적극 주장했다. 이 일 때문에 서인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뒤 행부호군(行副護軍)에 서용되었다. 주자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문사(文史)에도 박학하여 진한(秦漢) 이후의 글을 모두 섭렵했다. 저서로 〈동사록〉·〈용주집〉이 있다. 1676년(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1681년 출향되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항(朴恒 1227~1281)
춘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난 고려시대 인물 박항(朴恒) 선생(1227~1281)은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중시조로 자는 혁지(草之), 초명은 동보(東甫)이며 시호는 문의(文懿)다.
나이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선생은 한림원에 등용된 후 충주목사, 경상·전라 안찰사, 우언정, 국자감 관리, 중추원 승선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중서문하성 평장사(정2품)에 이어 삼중대광(정1품)에 올랐다.
선생은 평소 모든 처사가 공명정대했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했던 인물로 칭찬이 자자했다.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1만명의 군사와 군자금, 군수품을 강요할 때 원나라 황제와 직접 교섭해 출병 출자를 최소화했다. 또 원나라의 감독관으로 온 원수(元帥) 흔도(熊都)와 우승(右丞) 홍다구(洪茶丘)의 행패가 심하자 충렬왕에 진언해 원나라 세조에게 국서를 보내 충렬왕을 좌승상(左丞相)·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에, 金方慶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에 임명하게 해 흔도·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했다.
국내정치에서도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 발탁 등 인사행정제도를 공정하게 개혁했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실천했다.
이처럼 선생은 대내적으로 무인정권기를 거쳐 왕정복고가 이뤄지는 혼란한 시기를 현명하게 대처했으며, 대외적으로 몽고의 침략과 이후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련기를 외교적인 역량으로 극복한 인물로 후대에서는 평하고 있다.
한편 선생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고종 40년(1253년) 몽고군이 춘천 봉의산성까지 침입했을 당시 춘천지역민들은 끝까지 항전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다. 때문에 지역민들의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선생의 부모 또한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춘천으로 급히 와 부모의 시신을 거두려 했지만 찾지못하자 전사한 시신 300여구 모두를 장사지내주었다는 일화는 7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효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있다.
하지만 선생은 안타깝게도 충렬왕 7년(1281년)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문장에도 뛰어난 것으로 전해오나 현전하는 문집은 없으며 시 3수만 남아있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 정몽주의 상소로 선생의 충효와 애국치적이 높이 평가돼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젊은 선비들이 찾아오는 것만도 고마운데
눈길에 술을 들고
싸리문을 들어서는구나
이것은 글자그대로
마음에 이어짐이라
석잔술을 마시고나니
어느덧 취하는구나
춘천은 옛부터 살기좋은 곳이라 하였는데
지신령도 이를 따라
영재들을 모으시니
후배들은 노력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고향선배 박찬성의 뒤를 이어주기 바라네
- 박항 詩 '춘천유생' 中 에서
춘천시 신북읍 윗샘밭을 지나 오음리로 넘어가는 배후령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朴恒선생의 묘소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과 삼악산이 에워싸며 생전의 국·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만큼이나 장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1) 신숭겸(申崇謙)
?~ 927(태조 10). 고려 초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고려사〉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 출신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고 한다. 태봉 말기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 10)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태조는 간신히 피신했다. 태조는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甫)를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120년(예종 15)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도이장가 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2) 신흠(申欽)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 김경직(金敬直)
1567(명종 2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이정(而正), 호는 우정(憂亭). 아버지는 사직(司直) 광계(光啓)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그뒤 전적·은계찰방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실망,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 우두촌(牛頭村)에 은거하며 계축옥사로 그곳에 유배중이던 신흠(申欽)과 교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낭천현감에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사도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1) 김효원(金孝元, 1532-1590).
1575년 12월-1578년 4월까지 삼척부사로 근무.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본관은 선산(善山). 현감 김홍우(金弘遇)의 아들.
조식과 이황에게서 학문을 공부하였고 1565년(명종 20년) 진사 합격을 발판으로 관직에 입문함. 병조좌랑(兵曹佐郞, 정6품), 정언(正言, 사간원 정6품) 지평(持平, 사헌부 정5품)을 역임하였고, 1573년(선조 6년)에 요즘 교수들의 안식년제와 같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 정6품)에 임명되어 일할 때 동인(東人)의 대표로 서인(西人)의 대표 심의겸과 반목하다가 밀려나 삼척부사를 거쳐 영흥부사 재임 중 별세한다.
1576년에 성황사의 오금잠(烏金簪)을 불태우고 성황위패를 만들어 유교식 제(祭)를 단행하였다. 오금잠 소각을 1576년 5월 단오가 지난 직후로 추정하는 이유는 적어도 부사 김효원이 오금잠제를 직접 목격하고 나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1578년에 부친상으로 사직하였다. 향교 동쪽에 경행사(景行祠)를 세웠고 송정으로 이전했다가 1868년 9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된다. 1989년 10월 향토사학자 김진원이 1989년 김효원과 허목 두 부사를 기리기 위해 삼척문화예술회관 뒷산인 남산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2)허목(許穆)
1595(선조 28)~ 1682(숙종 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아버지는 현감 교(喬)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글을 배우고,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년(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만 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만 9개월)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5년(숙종 1)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 편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1)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6)~ 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연안.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며,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부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지냈다.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청풍부사·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양주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64년(현종 5) 집의가 되었다가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書筵官)을 겸했으나 곧 사퇴했다. 응교로 있을 때 언론의 개방을 주장하고, 정여립(鄭汝立)에게 아부했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향사(享祀)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자신의 6대조 이석형(李石亨)이 지은 〈대학연의집략 大學衍義輯略〉을 임금에게 권했다. 당시 교유가 있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며, 호남 지방의 대동법 시행 문제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를 비롯하여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윤지선(尹趾善)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에 〈정관재집〉·〈대학집람 大學集覽〉·〈사례비요 四禮備要〉·〈성현통기 聖賢通紀〉 등이 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이희조(李喜朝)
1655(효종 6)~ 1724(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이희조
이희조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우의정 정구(廷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명한(明漢)이며, 아버지는 부제학 단상(端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김수항(金壽恒)에게 허적(許積)을 탄핵하는 글을 보냈다. 1680년(숙종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전설별검(典設別檢)·의금부도사·공조좌랑·진천현감·서연관·지평·천안군수·장악원정 등을 역임했다. 1707년 장령을 거쳐 해주목사로 있을 때 석담(石潭)에 있는 이이(李珥)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瑤琴亭)을 세웠다. 그뒤 대사헌·이조참판·찬선·좨주(祭酒)를 지냈으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에 유배되고 다시 철산으로 이배(移配)되던 중 정주에서 죽었다.
노론·소론이 나누어지기 전에는 박세채(朴世采)를 따랐으나 윤휴(尹鑴)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윤증(尹拯)에 대하여 배사론(背師論)으로 일관하면서 송시열의 노론을 옹호했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관하여 이이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기발(旣發)에 있어서 성명(性命)과 형기(形氣)의 어떤 면에서 원인하는가에 따라서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어지지만, 마음 가운데에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작용하여 발(發)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중용(中庸)의 중(中)이라는 의미는 정이(程頤)가 '불편불의'(不偏不倚)라 하고 주희(朱熹)가 '무과불급'(無過不及)이라 하여 미발(未發)과 기발(旣發)을 달리 해석한 것 같지만 정이는 미발과 기발을 함께 말하되 미발의 측면에서 말하고 주희는 정자의 말을 보충하여 기발의 중(旣發之中)의 입장에서 해석했다고 했으며 중이란 둘을 겸한 것이라 하여 이(理)로 표현했다. 그는 순경(荀卿)의 성악설(性惡說)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등 이단을 극력 배척했다. 저서로는 〈지촌집〉이 있으며, 편서로는 〈우서절요 尤書節要〉·〈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 등이 있다. 1725년(영조 1) 신원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 평강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 이의건(李義健)
1533(중종 28)∼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 세종의 다섯째아들인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수한(守漢)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직장이 되었으나 친상으로 곧 사직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을 떨쳤고,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은유고》가 있다. 그의 글씨는 광평대군 여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2) 조속 (趙涑)
1595(선조 28)~ 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 아버지는 병조참판 수륜(守倫)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627년(인조 5) 덕산현감을 거쳐 장령·진선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함으로써 청표탁행(淸標卓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기도 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그림에서는 묵매·영모(翎毛)·산수에 능했는데 특히 금강산과 오대산을 비롯한 명승을 두루 다니며 사생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유작들 중에는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간송미술관) 등도 있지만 그보다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까치와 물새를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와 묵매 등에서 격조높은 개성을 발휘했다. 성글고 까칠한 붓질과 야취(野趣) 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화조화풍은 아들인 지운(之耘)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국립중앙박물관)·〈매작도 梅鵲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3) 이후원(李厚源)
1598(선조 31)~ 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 남항거사(南港居士). 아버지는 군수 욱(郁)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지평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극력 반대하고, 청과의 강화과정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극간(極諫)하는 등 척사론(斥邪論)을 펼쳤다.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계획에 앞장섰으며, 1650년(효종 1)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자 그의 죄를 논해 부처(付處)하도록 했다.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推刷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해 강화(江華)를 방비하게 했으며,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 樂學軌範〉을 다시 간행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했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청탁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등 공정한 인사에 힘썼다. 1657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659년 자의대비(慈儀大妃) 복제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 강감찬(姜邯贊, 948년 ~ 1031년)은 고려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강이식의 후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요나라의 침입을 세 번 격퇴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검교태위 문하시랑에 이르렀고, 작위는 천수현개국자작(天水縣開 國子爵)에 봉해졌다. 무관으로 알려졌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장군이었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이다.
강감찬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로 금주에서 고려 제3대 정종 948년 11월 19일에 경기도 금주(현 서울시 금천구 낙성대 근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는 수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고구려 장군 출신 강이식이었다. 성종 때인 983년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 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혼란에 빠진 요나라 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 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 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에 봉해져 식읍 5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2) 서견(徐甄) - 한국 충신(고려 문신.충신.처사)
고려 후기의 문신. 초명은 반(頒),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여와(麗窩) 또는 죽송오(竹松塢).
일찍이 안향(安珦:1243~1306)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369년(공민왕18)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391년 사헌장령(司憲掌令)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하여 정몽주(鄭夢周)․강회백(姜淮伯)․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상소하여 혁명세력인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오사충(吳思忠) 등을 탄핵하다가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김진양․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은둔하였으며, 한 때는 이색(李穡)․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 고려의 절신(節臣)들과 함께 정선(旌善)에 모여 시와 술로 서로를 위로하며 고려를 사모하였다.
선조 때 대사간에 증직되고 충신묘에 봉해졌으며, 충현서원(忠賢書院)․삼현사(三賢祠)에 신주가 모셔지고 또 두문동서원과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일찍이 원천석․범세동(范世東)․탁신(卓愼) 등과 문답하여 ≪동방사문연원록 東方斯文淵源錄≫을 저술하고, ≪화해사전 華海師全≫을 편집하였으며, 현전하는 시문은 고려를 그리워한 한시와 자신을 고죽(孤竹)에 비긴 시조가 각 1수씩 남아 있을 뿐이다.
1369~공민왕18년 문과에 급제
1391~사헌장령(司憲掌令)
3) 이원익([李元翼)
1547(명종 2) 서울~ 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6번제(六番制)와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공헌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치()의 4세손이며,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낸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세에 4학 중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정자·저작 겸 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해감사이던 이이(李珥)의 천거로 1575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그뒤 교리·수찬·지평·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승정원이 탄핵을 받자 자신만이 파면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1593년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한 공으로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와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600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돌아보았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려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왕의 호위를,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의 호위를 맡았으며, 서울로 와서는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사직하여 낙향한 후에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는 안주목사로 있을 때 농민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병졸들의 입번(入番)을 4번에서 6번으로 하여 1년에 2개월씩 근무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색인 : 6번제). 이 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또한 그때까지 누에를 칠 줄 모르던 안주지방에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장려해서 안주에서는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한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으로 있을 때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거두되 중앙에 선혜청을,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防納)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에 한하여 우선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 묘정,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 시흥 충현서원(忠賢書院),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치리(南致利 1543, 중종 38~1580, 선조 13)
자는 의중(義仲)이고 호는 비지(賁趾)이다. 1543년(중종 38) 낙강어은(洛江漁隱) 신신(藎臣)과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의 4남 2년 중 3남으로 태어났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先生)의 고제(高弟)이다. 8세 때 부친(父親)을 여의고 16세 때에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하(門下)에 나아가 학업했으며 21살 때에는 도산(陶山)으로 퇴계(退溪) 선생을 찾아 사사(師事)하여 독실한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서는 「퇴계 문하(門下)의 안자(顔子)」라는 칭호를 받았다. 28세 때 퇴계 선생의 상(喪)을 당하자 동문 제현들에 의해 공이 상례(相禮)로 추대 받아 상례의 절차를 총괄했을 정도로 비중이 있었다. 1578년(선조 11 : 36세)에는 동문(同門)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함께 9인이 유일(遺逸)로 추천을 받기도 했으나 애석하게도 1580년(선조 13) 38세(3월 29일)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53년(효종 4) 안동(安東)의 노림서원(魯林書院)에 향사(享祀)되었고 문집(文集) 2책이 간행되었다. 행장(行狀)은 권우(權宇)가 묘표(墓表)는 류성룡(柳成龍)이 지었고 안동(安東)의 병산서원(屛山書院)과 임천서원(臨川書院)에 공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문집 서문은 미수(眉 ) 허목(許穆)이 중간서문은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지었다. 공의 문집은 아들인 호경(虎慶)에 의해 남긴 글 일부가 수습되어 두원(斗元)에 이르러 처음으로 간행되고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등에 의해 공의 사후 208년 뒤인 1787년(정조 11)에 중간(重刊)되었다.
2) 우복 정경세(1563 - 1633)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3) 계동 전경창(全慶昌)
1532(중종 27)∼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 판서 백영(伯英)의 후손으로, 순(珣)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를 거쳐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성리학의 태두인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한때 가야산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중대함을 강조하며, 일반사신이 겸하여 추진하던 것을 전담사신을 파견할 것을 상소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이 있다.
4) 매암 이숙량(李叔樑)
1519(중종 14)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북 안동 사람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아버지는 호조참판 현보(賢輔)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붓글씨가 뛰어났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후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했으며, 난중에 죽었다. 시조로 〈분천강호가 汾川江湖歌〉 6수가 전하는데, 부자·형제·친척 사이의 도리를 온전하게 하라고 권고한 내용이다. 이현보의 풍류와 이황의 도학을 그 어느 쪽도 충실하게 잇지 못하고 관심을 좁혔다는 평을 받는다.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배향되었다.
5) 한강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경학(經學)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아버지는 사중(思中)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7세 때 〈논어〉·〈대학〉을 배워 뜻을 통했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밑에서 공부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64년 상경하여 과거장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1573년(선조 6) 예빈시참봉에 이어 1578년 사포서주부, 그뒤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했고, 이때 베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동복현감을 거쳐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으로서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군수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뒤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했다. 고향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경학을 비롯해 산수·병진(兵陣)·의약·풍수·역사·천문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영남학풍을 계승했는데, 그의 〈심경발휘 心經發揮〉는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심경〉을 중요시한 이황의 학문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 家禮集覽補註〉·〈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 등도 예학에 관한 저술들이다. 이밖에 역사서로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이 있으며, 〈고금인물지 古今人物志〉·〈고금명신록 古今名臣錄〉 등과 같은 전기류도 있다. 안과 의서인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도 저술했다. 수령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수집하여 7종의 읍지를 간행했는데, 그중 〈함주지 咸州誌〉가 남아 있다.
그밖의 저서로 〈한강집〉·〈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고문회수 古文會粹〉·〈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稧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주 동강서원(東岡書院)·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 제자로는 이후경(李厚慶)·서사원(徐思遠)·황종해(黃宗海)·허목(許穆)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하와 함께 영남 남인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그의 사상 가운데 경세론 분야는 허목 등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1) 주희(朱熹, 1130년 ~ 1200년)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号)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가지가 있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 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정호, 정이등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사후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에 추봉되었다. 주돈이의 학통을 계승한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문인이다.
2)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서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영보(英甫)이다. 그리고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명은 성뢰(聖賚)였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
미복설
2)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 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혹은平義智라고도 불림)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 풍신수길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 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하였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리고 주장하였지만, "(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 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김성주 등의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언 때문에 후일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 · 허성(許筬)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3]
임진왜란의 상이한 보고에 대해 붕당정치의 폐해라는 인식이 많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조 당시에는 아직 붕당이라는 개념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수준이었고 학봉 김성일의 경우 오히려 서인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기 위해 임금 앞에서 직언을 하였다(단종 복위를 위해 단종 사후 100년이 넘은 당시에 최초로 직언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통신사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자세히 쓰고 있지 않으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전 몇개월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두려움이 앞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부사 김성일 만이 만남을 독촉하였고, 최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서는 부사 김성일 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 부사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어전 회의에서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그러한 조짐이 없었사옵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을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도 황윤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사옵니다."라고 한 대 비해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 됩니다."라고 다르게 대답하였다.
김성일은 도요토미에게서 성리학적 학식과 예를 찾으려 했겠지만 그를 간바꾸로 만든 것은 성리학적 학식과 예가 아니라 칼과 천하를 상대하겠다는 담략이었다.
전란 초기1592년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하기로 유명하여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류성룡 등의 천거에 의해 선조의 사형 명령이 철회되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진주성 전투와 전사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군관으로서, 진주 목사와 산에 숨어 있다가 초유사의 명을 받고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초유사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호남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왜군이 반드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침략할 것임을 내다보고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관군과 의병이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했다.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1542년 ~ 1613년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자는 경직(景直)이다. 내관직으로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선온서주부(宣醞署主簿)를 역임했고 외관직으로는 횡성현감(橫城縣監),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다.
1581년(선조 14) 신복이란 자가 친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안동부가 안동현으로 강등되었다.. 유운용, 안몽렬과 함께 상소하여 현으로 격하된 안동을 부로 회복시켰다. 1587년 사은사 배삼익의 수행원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은둔할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진보 문암산의 산수를 사랑하여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며,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세워 퇴계 이황을 제사했다.
산해리
산해리는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마을에 속한 자연부락을 지나는 마을이다. 낙동강의 동쪽원류인 반변천과 소하천인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은 큰 내를 이루었으니 마치 산 속의 바다를 연상하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동산(東山)과 문해(汶海)의 이름을 따서 산해라고 한 것이다.
본래 진보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해동,춘감동,신천동,주파동,삼산동의 일부와 안동군 임동면의 동산리를 합하여 영양군 입암면에 들게 하였다.
최근 이곳 산해리에서 민간 제작용 고려청자가마터가 발견되어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수습발굴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산해리에는 10여개의 자연부락이 속해 있는데, 대개 마을의 지세에 따라 부락의 명칭이 정해졌다.
산해리에 중심이 되는 마을인 문해동(汶海洞),문해(汶海),무내는 반변천과 동산천 두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많아 문해라고 하였다.
문해 서쪽의 긴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 동산태,동산(東山),동산동(東山洞)은 옛날 안동현이 속했을 때, 동산령 너머 마을이라 하여 동산동으로 불리워졌으며, 윗마을을 동산태, 아랫마을을 아랫동산태라고 한다.
문해 북서쪽 둔덕에 위치한 배두들,주파(舟坡),주파동(舟坡洞)은 안동김씨가 약 20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모양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는 가득차면 가라앉는다고 해서 살림이 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동산동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동산,하동산(下東山)이라고 불리워지는 마을은 그 아래로는 문해가 이어지고 있다. 주파와 동산동 그리고 문해를 잇는 세 갈래 길이 있으며 현재는 산해3리이다.
문해동(汶海洞) 서남쪽에 위치한 봉감(鳳鑑,鳳甘),봉감동(鳳鑑洞,鳳甘洞)은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약 500년 전인 1602년 이곳에 서원을 창건하여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으나 그 후 봉감서원(鳳鑑書院)이라 개칭되었다. 지금은 봉감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으며,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이 자리 잡고 있다.
산해마을에는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가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반변천 가에 세운 남경대(攬景臺)와 봉감사(鳳鑑寺) 터에 남아있던 벽돌로 쌓은 봉감모전오층석탑, 그리고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1602년 이곳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창건하여 퇴계를 배향하다가 뒤에 터만 남은 서원터가 남아 있다.
통정 안간(安侃)
자는 유일(有一)이고 호는 봉재(蓬齋)이다. 문성공 안향선생의 후손으로 서기 1493년 경기도 이현 구제음제에서 1494년에 출생하였다. 일찍 벼슬길에 나섰으나 불행히도 중종 을묘사화에 연루되어 안씨일문 8현이 화를 당하였다. 안간은 동생 안준과 포항 장기 현봉산 오야동에 피난하여 가문을 명맥을 유지하였다.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여 을해년 가을에 서재를 건립하여 안간 공과 헌릉참봉 안극종 두분을 위한 단을 설치하여 매년 시제를 봉행하였다.
http://cafe.daum.net/kimthreepa/84Wg/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