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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남은 자”란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구원이 단절될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남겨두신 소수의 의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 또는 거룩한 씨(사 6:13)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계속 진행시키시며, 마침내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남은 자 사상은 기독교사관 및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 구약의 남은 자들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2)
구약에는 이같은 개념이 540회나 사용되었다.
창 6-9장의 홍수 기사는 온 인류의 멸망 때 오직 노아의 가족 8인만이 살아서 후대에 인종을 보전했음을 보여준다.
열왕기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당신 백성 7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셨다(왕상 19:18). 선지서에는 당시 이스라엘-유다의 멸망의 정황과 연관되어 남은 자 사상이 예언으로 선포되었지만, 이는 포로들의 귀환 예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종말의 때에 메시야의 나라가 지상에 임할 때 흩어진 “남은 자”들이 다시 모여 메시야의 나라를 이룬다는 종말론적 예언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이들 남은 자들은 여호와를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역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 신약의 남은 자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4-5)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이같은 남은 자들은 신약에서도 구원론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로 택정된 남은 자들에 관해 말하는데, 동족 이스라엘 인들이 예수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대해,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선택받아 구원의 자리로 이끌려나온 소수의 무리를 준비해두셨음을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택함받은 소수만이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도 이에 관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 22:14)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사상은 요한계시록의 14만4천 명 사상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남은 자”들이 있어 지상에서 교회의 명맥을 이어가며, 마침내 그들을 통해 사단이 쫓겨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완성된다. 이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씨인 예수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아 참 이스라엘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리는 복락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네 백성이 바다 모래보다 많게 되리라”(창 22:17)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신다.
결론적으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 승리의 확실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Zephaniah / צְפַנְיָה의 남은 자 사상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남은 자 사상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있다. 특히 이사야서와 스바냐서에서 남은 자 사상이 전개되는데, 두 성서에서의 남은 자 사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소수의 사람을 남기시는 중요한 주제이다.
남은 자 사상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의 자리에서 내쳐지는 위험한 직면에 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나아가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소수의 사람들을 남기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증표이시다.
'남은자(remnant) 사상'이란 어느 공동체가 죄악으로 인한 멸망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를 말한다.
성경에서 이 램넌트(Remnant)는 단순한 생존자를 넘어, 특별한 의미와 역할을 가진 집단이 '남아있는 자들'이다.
'Remnant'는 재앙이나 파괴적인 사건 후에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라는 의미이다. 의미를 가지는 분야는 바로 종교, 특히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The Remnant)는 엄청난 심판과 환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며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이다. 이들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라, 미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마중물이다.
스바냐는 B.C. 630-625년경,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의 통치(B.C.640-609년) 때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근동의 패권국인 앗수르는 신바벨론 제국(B.C.625-539년)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져 가던 때였다. 이 때에 요시야는 대외적으로는 선왕들이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 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1. 남은 자의 역할
1) 원칙을 지키는 '기준점' 역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본질적인 가치를 부여잡고, 주변의 혼란에 휩쓸리지 않도록 돕는 정신적 닻(Anchor)이 됩니다.
2)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 역할: 실패와 절망 끝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상징하며 재건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3) 진정한 나를 찾는 '정수' 역할: 외부의 기대와 사회적 가면을 벗겨낸 후에도 남아있는 가장 순수한 나의 모습, 즉 진한 자아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결국 램넌트는 남은 것이 아니라, 남겨져야 할 가치가 있는 의미이다.
어원적 핵심: 파괴 후에 '남아 있는 소수' 를 의미하며, 단순 잔재와는 차별됩니다.
2. '남은 자들'의 유산
노아와 그 가족들은 대홍수 속에서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노아의 8식구가 남져지지 아니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습니다. 성경 창세기 7장 13절에 따르면, 노아와 그의 세 아들(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의 아내가 방주에 들어가 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여덟 명이 바로 "노아의 8식구"로, 인류와 육상 생물의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현재 인류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서도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여덟 명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재창조라는 구원의 역사를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바벨탑 사건이후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요셉과 그 형제 가족들은 이집트 기근 속에서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때 남은 자들이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사 10:20–22, 11:11-16, 37장).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주신 말씀인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죄를 지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남은 자를 남겨두시리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그래서 이사야의 첫아들 이름을 스알-야숩(Shear-jashub שְׁאָ֖ר יָשׁ֣וּב).으로 지었는데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The remnant shall return.”이란 뜻입니다.(사 7:3, 8:18) 우리들도 종말에 남은 자가 되어 천년왕국, 새하늘 새땅에 모두 입성하시기를 바랍니다(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믿는 자들을 남겨두셨다는 사실은 마치 엘리야 시대와 같습니다. 당시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바알종교의 선교사 역할을 하여 온 땅을 바알종교로 물들였던 배교적 시대에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은 줄 알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의 사람을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부패한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순결한 백성을 남겨두셨습니다. 오늘날도 배교가 온 교회를 뒤덮고 있지만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은 자를 남기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분의 예정의 섭리로 남은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3. 스바냐(Zephaniah / צְפַנְיָה)서의 남은 자 사상
스바냐서에서 ‘여호와의 날’과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새롭게 형성될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스바냐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한다.
- 말씀
스바냐 1:1-7
1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4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6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7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완전히 실현되는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허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이 덮이고 흑암이 덮인 날이요" (스바냐 1:15)
이 심판은 먼저 유다 백성에게 향합니다. 당시 유다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했지만, 바알 신을 숭배하고,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에게 절하는 등 우상을 섬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스바냐는 이런 위선적인 신앙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심판은 유다뿐만 아니라 블레셋, 모압, 암몬, 앗수르 등 교만한 이방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됩니다.
스바냐서는 심판의 메시지는 회개와 겸손에 대한 촉구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를 구하며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스바냐 2:3)
- 남은 자의 구원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고 공의를 추구하는 **'남은 자'**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스바냐서는 심판의 파도 속에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의 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 나라의 심판을 선포하는 단락에 ‘남은 자’(쉐에리트)라는 단어가 두 번 나타난다. 여기에서 ‘남은 자’는 하나님의 대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방 나라의 땅을 탈취하고 노략하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 하는 단락에 ‘남은 자’가 한 번 더 나타난다. 여기에서 ‘남은 자’는 주변의 환경으로 평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와 함께 거함으로 평안함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된다. 비슷한 시기의 소 예언서와 달리 스바냐서에서 남은 자들은 땅과 보상을 받아 누리는 존재로 묘사되고, 이방나라를 심판하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여호와의 날 이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공동체의 삶의 표본으로 묘사되고 있다.
1) 역사적 배경
스바니야서의 역사적 배경은, 다른 예언자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예언자에게 역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매우 극적인 시대이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아시리아 제국이 다른 나라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면서 팽창해 나아가던 때이다. 유프라테스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아람족 국가들의 붕괴에 이은 기원전 732년의 다마스쿠스 함락, 기원전 722년의 사마리아 함락과 백성의 유배, 기원전 701년의 티로 함락, 티로와 함께 함락된 시돈의 완전한 파괴(기원전 671년), 기원전 663년의 이집트 테베의 약탈,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홍수가 닥친 것보다도 더 험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호언하던 기원전 689년의 바빌론 약탈 등이 일어난 시기이다.
그런데 몇십 년이 지난 뒤에는 상황이 뒤바뀐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멸망시킨다. 이어서 바빌론의 신칼데아인들이 서쪽으로 밀려든다. 그리하여 세 차례나 포위 공격을 당한 예루살렘은 결국 기원전 587년에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치고받는 가운데 일종의 균형을 유지하는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제3의 물결이 또 들이닥친다. 28년 동안(기원전 639-611년) 근동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스키티아족의 침략이다. 흑해 북부 지방에서 내려온 그들은 메디아인들을 밀어내고 소아시아를 빼앗은 다음,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를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집트 임금 프삼메티쿠스의(기원전 664-620년) 간청과 선물을 받고서야 그들은 되돌아간다. 그러나 아시아와 이집트 변방까지 이르는 지역의 주인이 된 스키티아인들은, 자기들이 점령하거나 통과하는 지방을 약탈하고 철저히 파괴시킨 다음, 피정복민들을 제멋대로 자기들의 지배 아래 묶어 놓는다. 이러한 스키티아족의 통치는 기원전 611년경, 필리스티아 땅에 있는 아스클론 약탈과 아스돗의 함락으로 종말을 고한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 2세가 필리스티아의 다른 도시 국가인 가자를 빼앗고 므기또에서 시리아인들을 쳐부순 다음, 메소포타미아의 하란까지 진군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기원전 609/608년).
이 기간 내내, 특히 므나쎄의 오랜 통치를 특징짓는 아시리아 시대에, 예루살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근동의 북서와 남서를 잇는 이른바 팔레스티나 ‘회랑’ 옆에 붙어 있는 예루살렘도, 국제 정치의 음모,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자리 잡은 군소 국가들의 동맹 놀이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다가 유다 임금 아몬이, 아시리아의 멍에를 벗어 던지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이는 일단의 관리들 손에 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친이집트 동향에 곧바로 “나라 백성”이 반혁명을 일으킨다. 그 덕분에 여덟 살밖에 안된 요시야가 왕좌에 오르게 된다(2열왕 21,24; 22,1).
이렇게 요시야 임금이 아직 어릴 때 이루어진 아시리아 지배에 대한 저항의 선상에서, 스바니야의 활동, 그리고 임금의 측근 고관들과 제후들, 또 외국 복장이나 종교 의식을 따르면서 외국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그의 정치적, 종교적 비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구성
예레미야서나 에제키엘서 같은 곳에서 예언은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3부 구조로 정리되어 있다. 곧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민족들에 대한 심판, 복구의 약속이다. 스바니야서 역시 이 구조에 따라서 세 부분으로 정리되는데, 이는 이 책의 편집자들의 작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배열되어 있다.
가. 편집자들이 붙인 머리글(1,1)
나. 유다에 대한 경고와 위협 신탁(1,2-13)
다. 주님의 날(1,14-18)
라. 남은 자들, 겸손한 이들에 대한 권고(2,1-3)
마. 유다의 적인 민족들에(필리스티아, 모압, 암몬, 에티오피아, 아시리아) 대한 심판과 위협(2,4-15)
바. 배척되고 이민족들과 같아지는 예루살렘(3,1-8)
사. 복구의 약속(3,9-20)
3) 주제
묵시 문학적인 ‘하늘’과 주님의 겸손한 이들의 ‘땅’, 이것이 스바니야의 두 지평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핵심적 실재가 있다. 곧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3,5.12.15). 그분 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억눌린 이들을 구원하신다.
- 주님의 날
이것이 스바니야의 예언을 유명하게 만든 주제이다. 이 예언자의 사고에는 중심축을 이루는 두 극이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들이다. 이 두 적대적 힘이 충돌할 때에 “남은 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 “주님의 날”의 주제는 당시의 거대한 정치적 혼란이라는 역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 이 “날”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보복하시는 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날, 이집트 탈출 때처럼 그들을 구원하시는 날,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민족들에게 당신의 무서운 이적들을 다시 행하시는 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스바니야의 지평은 역사의 제한적 틀을 넘어선다. 그가 예언하는 것은 우주적 대이변이다. 그 어떠한 주저도, 그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는 일 없이, 예언자는 이 ‘진노의 날’(라틴 말로, dies irae)과 파멸의 날을 선포한다. 겸손한 이들은 계속하여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역사는 하느님께서 친히 주재하시는 피의 축제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미 아모스, 나훔, 요엘도 이야기한 “주님의 날”은 총체적 전복(顚覆)의 날이 될 것이다. 스바니야는 공포와 파멸 속에,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생명체까지 휩쓸어 가는 일종의 창조의 붕괴가 될 심판을, 그 누구보다도 폭넓게 서술한다(1,2-3.15).
그러면서도 스바니야 예언서에서는 “주님의 날”이 근본적으로 세상과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변형과 개조, 죄악의 시대의 종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남은 자들”이 부르는 기쁨의 노래로 흘러 들어간다(3장).
2) 예루살렘과 민족들을 질타하는 신탁
예루살렘 도성이 불충하고 완고하기 때문에, 그 우두머리들과 판관들, 예언자들과 사제들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가 막힌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심판 아래 놓이고 불행에 빠지리라고 예고한다. 주님께서는 심문하고 단죄하고 벌하실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 관리들, 상인들, 불신자들도 고통을 당할 것이다. 성전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이 도성의 모든 것이 이러한 하느님의 행동반경 안에 들어갈 것이다.
이 민족들 역시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된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스바니야도 사방으로 몸을 돌려, 필리스티아(서쪽), 모압과 암몬(동쪽), 에티오피아(남쪽), 아시리아(북쪽)에 파멸과 멸망을 예고한다.
이 예언서는 시대의 표징들을 읽는 예언자적 독해를 제시한다. 이 독해가 바로 묵시 문학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3) 겸손한 이들
예언자는 한편으로 청천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작은 이들에게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 겸손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일으키는 대이변을 피할 희망이 있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4) 주님의 거룩한 산
하느님께서는 자격을 갖춘 이스라엘 곧 “남은 자들”을 모으시어, 민족들 앞에서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흥겹고 자유롭고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데, 그분 친히 임금으로 이 예루살렘에 거처하실 것이다. 이처럼 스바니야서는 구약 성경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이루면서도, 몇 쪽만 더 넘기면, 희망과 기쁨의 말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춤판을 전망하면서 끝맺음을 볼 수 있다.
4. 저작 시기와 저작권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예언자들은 전기(傳記)가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스바니야의 경우, 자기 시대의 역사를 시사하는 그의 표현은 매우 분명하고, 아울러 정치 세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았음을 전제한다. 이로써 그의 작품 시기를 대략으로나마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요시야 임금이 아직 어릴 때에 그가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스바니야가 기원전 630년쯤에 활동을 개시하였다면, 그가 기원전 612년의 니네베 몰락 소식을 직접 듣고, 게다가 예루살렘에 대한 두 번의 포위(기원전 597년과 기원전 587년), 그리고 이 도성의 함락까지 직접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불행의 예언을 그렇게 많이 한 스바니야가 왜 유배자들에게 귀향과 복구를 약속하는 신탁들을 선포하였는지를 설명해 준다.
스바니야 예언자의 실존 여부나 이 예언서의 경전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문이 제기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나중에 손질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일부 절이나 구절이 그의 친저가 아니라는 비판을 그냥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신중히 고찰해 보아야 한다. 친저성이 불분명하다는 본문들 가운데에서는, 앞뒤로 이어지는 ‘애가 운율’(히브리 말로는, 키나)이 중단되는 2,8-11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구원의 여정- 결론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회복 선포 습 3:9-20
스바냐 3장 9-20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 회복의 하나님(14-20)
하나님은 온 민족의 우상숭배와 교만을 심판하시고 이제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죄악속에서도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노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기쁨의 자리, 회복과 은혜의 자리로 부르시고 함께 찬양하며 즐거워하십니다.
- 돌아오는 백성들(9-13)
하나님은 백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온 세상 민족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곳곳으로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있던 교만과 우상숭배를 제거하시며, 오직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만이 남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속에 평안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남은 자들을 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기쁨, 그리고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죄를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백성들을 기뻐하시며 구원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