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viest burden is that you can never put your own burden down
- dhleepaul
위의 제목은 내가 떠올린 제목이다. 선문선답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래의 글은 일독한다는 의미에서 게재한다.
명제: "수고하고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마11:28
반제: 그러나 주님은 또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마16:24
반론: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마 23:4).”
결론: 그러나 가장 무거운 짐은 '나의 짐을 내가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무거운 짐은 아닐런지요?
이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가가게 됩니다( Coram Deo)-dhleepaul
이하의 글을 작성하신 분: 애비게일 도즈
- 게재 본문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세 살배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특정 장난감 자동차를 달라고 조르는 순간, 친구는 "안 돼, 내가 가지고 놀 거야"라고 대답하죠. 그러면 거절당한 아이는 다른 장난감 자동차를 찾거나 차례를 기다리는 대신, 상처받고 삐쳐서 자리에 앉아버립니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죠. 8살짜리 아이가 아기 인형으로 '집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친구들은 밖에 나가서 술래잡기를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놀지 않고 집 안에서 시무룩하게 있다가 나중에 엄마에게 다른 아이들이 자기만 빼놓고 놀아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립니다.
“자기 연민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로운 아버지이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평가하는 데 있습니다.”
십 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죠. 날씨는 좋고 해변은 개장했는데, 숙제와 집안일은 산더미처럼 쌓이기만 한 15살짜리 아이 말이에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기는커녕, 엉망인 숙제와 불공평한 인생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죠.
어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여성이 어머니에서 순교자로 변하는 순간, 한순간에는 가족을 위해 사랑하고 희생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자신의 모든 노력과 헌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고통받는다고 느껴 상처받고 원망하는 모습 말입니다.
이 뚱하고 친숙한 폭군은 바로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죄
자기 연민이란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 특히 자신의 고난에 대해 자기 연민에 빠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아무도 함께 슬퍼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서 그 손실을 슬퍼하기로 합니다.
자기 연민에 대해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부정적인 특성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지만, 성경에서는 그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신서에 나오는 악덕 목록이나 칠대 죄악에도 자기 연민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기 연민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어쩌면 성경 전체 이야기는 우리를 치명적인 자기 연민의 무기력에서 깨어나게 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비, 곧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라”( 마가복음 1:41 ). 이러한 자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연민의 죄는 하나님이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이신 것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평가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지속적인 도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사랑과 연민을 찾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믿고, 우리의 상황을 그 증거로 삼을 때, 우리는 자기애나 자기 연민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궁핍한 자
성경은 우리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줍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시편에는 그가 처했던 참으로 비참한 상황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배신당하고, 쫓기고, 동굴에 숨어 지내는 등 다윗에게는 자신을 불쌍히 여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오 하나님,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입의 말을 귀 기울여 주소서. 이방인들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났고, 잔인한 자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습니다.” ( 시편 54:2-3 ) 다윗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돌려 말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보게 되면, 자기 연민은 초라한 대용품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방인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도다”( 시편 54:3 ). 이것이야말로 참된 죄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 즉 우리의 계획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었기에 자기 연민이라는 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coram deo’ , 즉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줍니다.
적들이 바짝 에워싸고, 친구들이 등을 돌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했을 때에도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사랑을 느끼며 살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다윗의 먼 후손이신 우리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자기 연민에 빠질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고발당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멸시와 배척, 침 뱉음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모욕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맞받아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34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연민의 문제는 시각의 문제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은 주님을 있는 그대로, 즉 영광스럽고 자비로우시며 주권자이시며 공의로우신 분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로 자신과 자신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크고 작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기보다는, 자기 연민은 우리 마음의 비참함 속에서 훌쩍거리게 만듭니다.
자기 연민은 종종 그 고통을 확산시키며, 다른 유한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리의 상황에만 온전히 집중하도록 교묘하게 강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시련과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이러한 아름다운 창조의 본질을 왜곡하여, 우리의 교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닌 상황에 기반하게 만듭니다.
자기 연민을 치유하는 방법
자기 연민을 치유하려면 먼저 자기 연민이 얼마나 가련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연민이 가련한 이유는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민은 동정심 많은 사람들, 특히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연민은 그저 괴로워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을 얻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치유를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은 주님을 있는 그대로, 즉 영광스럽고, 자비롭고, 주권자이시며, 공의로우신 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시선을 돌려 그분을 통해 우리 아버지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기 연민은 시들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자비와 결정적인 은혜,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의 빛 아래에서 자기 연민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마침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깨달을 때, 자기 연민은 초라한 대용물이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가 됩니다. 만족과 도움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연민과 사랑에 의지할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의 의미를 보여주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이것이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요한일서 4:10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황과 슬픔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 삶의 어떤 상황도 그분의 주권적인 사랑의 체를 통과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믿음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셨으니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시편 16:8 ).
애비게일 도즈 ( @abigaildodds )는 아내이자 다섯 아이의 엄마이며, 베들레헴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그녀는 『생명의 빵: 빵 만들기를 통해 예수님의 모든 만족을 주는 선하심을 음미하기』 의 저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