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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김유신 열전은 후손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백제사랑 추천 0 조회 688 09.12.29 12:54 댓글 2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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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2.29 13:23

    첫댓글 글쎄요. 조금 성급한 결론인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원래 누락된 부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 김유신 열전에 있는 이야기가 백제 쪽 기록에 일부 누락되었다 하여 '그것은 없던 사실을 조작한 것' 이라 말하기는 위험하지요. 예컨대 온달 열전을 보게 되면, 후주가 고구려의 요동을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후주군을 격파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본기에는 아예 등장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온달의 대 후주전 출전을 '사실이 아니다' 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요.

  • 10.01.02 09:29

    옳은 이야기입니다..열전과 본기의 전거자료가 틀리다면 오히려 춘추필법의 기전체 문체로 변형시켜 끼워 맞춤식으로된 본기내용에 더욱 의심을 하는게 옳을듯 합니다..본기와 열전 내용 그리고 각 국가별 사건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라는 법도 없지요..물론 인위적으로 조작을 한다면야 철처하게 교차적 검증으로 끼워 맞춰야 하지만 그냥 각 국가별 사료를 술이부작 원칙이었다면 제각기 틀리는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보아야 하겠지요...그런면에서 미주가효님의 주장에 더욱 공감이 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09.12.29 13:34

    그러니 더더욱 문제가 됩니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도비천성(조천성)을 김유신이 함락한것으로 나오지만, 오히려 김흠운 열전에서는 그 성을 김흠운이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전사한 기록만 나옵니다. 함락했다와 함락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공존해 있는대 어느것이 합당하다 보십니까?

  • 09.12.29 13:52

    앗, 수정하다가 실수로 지워버렸군요. 김흠운 이외에 '취도' 열전에서도 비슷한 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추가하는 중이었는데.... 이런
    요컨대 도비천성/조천성 기사는 '실제 전투' 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겁니다. 김흠운과 김유신 열전의 기사에 의하면 도비천성/조천성은 백제의 성으로 나오는데, 취도 열전에서는 이 성이 신라의 성으로서 백제가 공격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성의 소유가 변동하는 일진일퇴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니 김유신열전의 기록을 '거짓' 이라 단정하는 건 성급하다는 생각입니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성을 '빼앗은' 부분만 기록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 작성자 09.12.29 13:52

    취도열전에 나오는 조천성이 백제에 의해 함락된 내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나오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의 30여성을 함락하였다는 내용과 그 시기가 일치하니. 그 30여성중 하나가 조천성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본기의 내용과 부합되는 내용으로 열전에서만 보이는 다른내용이 아니지요. 또한 김흠운은 빼았긴 30여성중 하나인 조천성을 되찾으려고 쳐들어 갔다가 전사한것이고요. 오히려 본기에 대한 부연설명일 뿐,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 09.12.29 14:03

    30여성 중 하나의 조천성이 백제의 대공세로 함락되던 전투의 이야기가 취도의 것이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출전한 것이 김흠운 사망전투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1. 655년의 조천성 전투는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2. 이 전투가 '단일 전투' 가 아니라 여러 회의 전투이며(최소한 성을 빼앗기는 취도의 전투와 이를 다시 찾기 위한 김흠운의 전투 2번은 존재했겠지요)
    3. 여러 전투 와중에 이 성이 김유신에 의해 탈환된 적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김유신 열전이 '거짓 공적' 을 적었다고 확언하시는 건 상당히 성급한 것이지요

  • 09.12.29 14:07

    열전 자체를 거짓투성이의 못믿을 사료라고 낙인찍어버리는 건 과도한 처사이지만, 역시 확실한 사실성을 담보하는 것 또한 아니지요... 사실 학계 역시 그러한 과장성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보고 있다 봅니다. 어찌 보면 삼국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열전들은 야사의 성격을 띠는 표현들이 적지 않죠... 의직과의 전투 이후 20여개의 성을 단번에 빼앗고, 거의 3만이나 되는 이들을 한큐에 없앤 일화의 표현은 저 역시 여러 부분에서 의심해 보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신라본기에서도 그 내용만이 빠졌다는 점 역시 더더욱 의뭉스럽기도 하구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천성은 30여 성을 공취한 성과물이라 보진 않습니다.

  • 09.12.29 14:02

    허나 그리 보는 제 시각에서도 제목의 표현은 좀 문제가 있군요... 일본서기는 우리나라 역사 시각으로 봤을 때 사료의 사실성을 잘 담보해서 툭하면 우리가 인용합니까? 중국 사서들이 다 사실 그대로만을 표현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7세기 나당전쟁의 표현을 봐도 신라측과 당나라 측은 그 뉘앙스가 어마어마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 이건, ' 한쪽은 100% 사실만을 표현하고, 한쪽은 100% 거짓만을 표현해서 ' 나온 결과였을까요? 고대사의 사료들은 그래서 그 존재만으로도 적지 않은 가치(설령 가치라고 불러주지 못해도 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 09.12.29 14:16

    게다가 김유신 열전의 몇몇 기사는 다른 기록과 결부하여 생각해 볼 때 사료에 '명시적' 으로 나타나지 않은 암묵적 권력관계에 의한 결정을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한 예로 태종 무열왕의 즉위 과정을 볼 때,
    1.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아마도) 화백회의에서 다음 왕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알천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2. 삼국유사에서 '사람(귀족)들이 알천을 수석의 자리에 앉혔지만 실제로는 김유신의 위엄에 굴복했다' 고 하는 점이나,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서 김유신과 알천이 '상의' 하여 춘추를 왕위에 앉히는 부분은
    알천의 양보가 '순수한 자발적 양보' 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 작성자 09.12.29 14:49

    저는 김유신 열전이 사료로써 가치가 전혀 없다는것이 아닙니다. 가치성이 본기보다는 떨어진다는 것이며, 열전은 김유신의 후손이 적어넣은 것이기 때문에 과장되고 찬양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대야성이 함락된 것을 김유신이 쳐들어가 빼았고 품석과 고타소의 유골을 되찾고 조천성 전투에서 김흠운이 사망한걸 김유신이 성을 빼앗아 대신 복수해준다는 점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두 사건 모두 김춘추의 사위가 죽은 사건이죠) 다른건 과장되었어도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김유신의 대야성 및 악성등 20여성 함락과 3만명 참살, 도비천성(조천성) 함락기록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게 제 주장입니다.

  • 10.01.02 09:36

    열전이 본기보다도 가치성이 떨어져요?.왕의 치척 문제라면 그렇게 되지요..왕이 아닌 개인의 업적사료인데 본기보다 열전이 떨어져요?..누가 그런 엉뚱한 말을 하시던가요?..원사료가 구삼국사와 개국공행록 그리고 유신비문일 경우 구삼국사에 비해 비교적 원사료인 개국공행록과 비문이 떨어진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잇나요?..그리고 구삼국사가 저자가 확실한가요? 아니면 1차적 원사료가 맞는지요?..결코 구삼국사에 비해 행록이나 유신비문이 구삼국사에 떨어진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요!

  • 09.12.29 14:47

    김유신열전은 과장이 섞인 기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부식이 참조한 기록이 바로 김유신의 행록입니다.
    흔히들 아는 행장, 행록은 없는 공도 뻥튀긴 경우가 허다하죠..
    (일례로 원균 행장, 이억추 행록 등등이 그렇죠.)
    그 기록을 보고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과장이 심하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래도 추려낸건데..그래도 좀 있다고 봐야죠.
    김유신의 공적은 본기위주로 보고 열전의 기록은 걸러내면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09.12.29 16:56

    이번엔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의 기록의 비교검토가 있었군요.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과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많고,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으며,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끼리도 충돌하는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박제상의 기록이 서로 다르죠. 하나는 장수왕이 순순히 복호를 보내주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복호를 추격하였다고 합니다. 남당유고는 장수왕이 처음에 복호를 순순히 보내주었는데, 제신들이 헐뜯자 추격꾼을 보냈다고 합니다.

  • 09.12.29 17:05

    그렇다면 장수왕이 복호를 순순히 보내주었다는 기록도 맞고, 추격꾼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일면 맞는 것이죠.
    아래에 포상국과 물계자의 이야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죠. 삼국사기에는 포상국과의 전쟁이 내해14년과 17년의 기록인데, 삼국유사에는 17년과 20년의 기록이죠. 그런데 남당유고에는 내해14년, 내해17년, 내해20년에 신라와 포상국간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열전과 본기의 기록비교 검토는 삼국사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니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랍니다.

  • 09.12.29 17:24

    그런데 김유신 열전 어디에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는거죠? 제가 다시 김유신 열전을 봤는데 그런 기록은 안 보이는 군요. 위에 기록은 신라군이 대야성 공격을 하다가 거짓 패배하여 옥문곡까지 적을 유인해서 야전에서 백제군이 패한거니 대야성 함락과는 별개로 봐야할 것 같군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많은 분들이 저 기록을 가지고 엉뚱하게 대야성 함락을 주장하시는 것 같던데 명확히 대야성을 함락시켰다는 다른 기록이 있습니까?

  • 10.01.02 08:32

    그러면 티얼님은 언제 대야성을 신라가 되찾았다고 믿나요?..김유신의 대야성 보복전투이후로는 대야성 전투가 일어난 적이 일체 없었는데 어떻게 661년에 아찬 종정을 대야주 도독으로 임명을 하지요??..

  • 작성자 09.12.29 17:34

    티얼님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했군요. 대야성 함락이 아니라 진례성과 악성 함락으로 수정합니다^^

  • 10.01.01 03:39

    물런 과장된 면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쩌든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구하고, 영광을 안긴 구국의 영웅이니깐요. 후손들이 과장했을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가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람이 백전백승은 할 수 없겠죠. 김유신 장군은 전략가쪽에 무게가 있는 장수일수도 있습니다. 즉 전술에서는 고만고만한 승률이지만 전략에선 100%에 가까운 승률을 가졌을거라고 봅니다. 조조 역시도 전술에서는 그리 좋은 승률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략에선 제가 알기론 적벽대전, 한중공방전 빼곤 패배한적이 없는걸로 압니다.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적인 전투에선 꼭 승리를 거두었죠. 갈리아원정에서 그 갈리아 장수

  • 10.01.01 03:42

    (이름이...)에게 크게 한방을 먹습니다. 그러나 결국 알레시아공방전 승리로 길라아를 평정했고, 폼페이우스와도 디카디움 공방전에선 패했지만 결국엔 승리를 거둡니다. ㅋ 김유신도 이런류의 장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10.01.02 08:36

    오랬만이네요...^^*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구하고, 영광을 안긴 구국의 영웅의 열전 내용이 생각보다 부풀리고 과장되기 보다는 오히려 전공이 삭제되고 누락되어 엉성하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열전 정도의 내용으로 입지적인 영웅으로 될 일인지?..그것도 이상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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