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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는 김유신에 대해 평하기를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게는 그의 패전은 가려 숨기고 조그만 승리를 과장한 과장하였다...... 김유신이 몇번 변변찮은 작은 싸움에서는 이겼었는지 모르지마는 기록과 같이 공이 혁혁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삼국사기에 나타난 그의 기록이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인대요.. 저는 이 과장된 기록에 대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제 삼국사기 내용으로 돌아가 그의 업적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그의 첫번째 업적인 낭비성 싸움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낭비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 중략....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명을 목베어 죽이니, 그 성이 이에 항복하였다.
고구려 본기에는 다음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2년 가을 8월, 신라 장군 김 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적어도 낭비성을 김유신이 빼았은것은 고구려쪽 기록에도 남아있는것을 보니 사실인듯 합니다. 전사한 숫자가 고구려 측에는 기록이 없으니,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넘어가 보고, 의아스러운 점은 고구려측은 김유신의 이름만 기록한 것입니다. 분명 낭비성 함락의 대장군은 김용춘과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상관인대.. 부장인 유신의 이름만 딸랑 기록한 것을 볼때, 또한 김유신이 첫출전
으로 그 당시 고구려인들은 김유신의 이름을 처음접할텐대요? 고구려 멸망 이후 후대의 사관들이 적어 놓을걸까요? 여하튼 다음 기록을 찾아봅시다.
가을 9월에 왕은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백제의 가혜성·성열성·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였다.
이번에는 그의 두번째 전공인 백제 가혜성,성열성,동화성 함락 기록입니다. 그럼 백제본기에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봅시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기록이 있네요. 백제본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김유신의 이름입니다. 아마 백제는 이때부터 김유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것으로 보여지네요.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의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봉인이 급히 알려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상주장군을 제수하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받자 처자도 만나지 않고 즉시 말을 몰아 백제군을 역습하여 패주시키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 기록은 그 전공을 세우자 백제가 복수하고자 다시금 매리포성을 공격하여 김유신이 역습해 무려 2000명의
백제군을 몰살시켰다는 기록입니다. 백제로썬 2000명의 병사가 전사했다는 것은 큰 타격일테죠. 백제본기에
그 기록을 찾아봅시다....
.... 없습니다... 누락일까요? 백제가 먼저 매리포성을 공격하였고 패한 기록인대 매리포성을 공격한 기록도, 패한기록도 없으며 심지어 매리포성에 대한 기록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을 잘못한 실수일까요? 아니면 김유신의 전공이 조작된 것일까요? 다음 그의 전공을 봅시다.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말을 멈추고 자기 집의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 때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르자 백제인들이 우리 군사의 진영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다.
김유신에 대한 유명한 일화입니다. 백제와의 전쟁의 연속으로 집에도 가지 못하고 집근처에 들르자 가족들 얼굴도 보지 않은채 집에 우물물만 먹고 바로 출전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백제본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역시
없습니다. 물론 여기선 백제가 신라와 싸운것도 아니니 없어도 이상할건 크게 없습니다만... 두번에 걸쳐 김유신과 관련된 기록이 백제본기엔 전혀 없습니다... 수상하네요..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침입하여 무산·감물·동잠 등의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마침내 기력이 없어지자 비녕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녕자는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백제측 기록에는 이번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요?
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기록을 통해서만 보면 백제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가니 김유신이 1만군사로 맞섰으나 기력이 다하며 고전을 면치못하였다는 것인대... 김유신이 3배가 넘게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3000군사에 고전을 면치못하여 부하장수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하여 힘겹게 이기게 됩니다. 그런대 이상한 점은 백제 장수 의직입니다. 그는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김유신과 잘 싸우다 3000명 모두를 전사시키고 단신으로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백제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처벌을 내리지 않을수가 없을텐대 의직에 대한 백제의 후속조치는 없었을까요? 김유신의 전공을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유신은 드디어 각 주의 병사를 선발 훈련하여 적진으로 갔다. 대량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역습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일부러 패주하여 옥문곡에 이르렀다. 백제는 그를 얕잡아 보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왔다. 그 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 그리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김유신 기록 사상 엄청난 전공이네요. 김유신은 백제가 빼았은 대야성을 되찾고 악성을 비롯한 12성과 2만명을 전사시키고 9000명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입니다. 2천명도 아닌 2만명입니다. 백제로서는 성왕전사 이후 엄청난 패전인대 그 기록이 있는지 봅시다.
여름 4월, 좌평 의직이....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이들과 두 번 전투하여 크게 이겼다
3000명 모두를 전사시키고 홀몸으로 돌아온 죄인 의직이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금 전쟁에 나섰다가 김유신에게 또다시 졌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대 참 어이없네요. 백제본기에는 2만명이 전사되고 9000명이 사로잡았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백제본기에 누락됬다는 것은 정말 실수라고 보기 어려운 점으로 분명 조작되고 과장되었다고 볼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그냥 백제가 쳐들어갔다가 김유신이 두번이나 싸워서 이겼다는 기록뿐입니다. 그렇다면 신라본기에라도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의직과 싸워 이긴 기록은 분명 있으나, 김유신이 악성을 비롯한 성을 함락하고 2만명의 적을 베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김유신 열전에만 나오는 이 기록을 정말 믿어야 할까요?
유신은 다시 적의 경내에 들어가서 진례 등의 아홉 성을 공격하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백 명을 사로 잡았다.
김유신이 다시금 승세를 몰아서 백제 성 9성을 뺏은 기록입니다. 한두성도 아니라 무려 9개의 성입니다. 하지만 백제측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또다시 누락이네요.
2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유신과 죽지·진춘·천존 등의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삼군을 오도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승패를 서로 주고받아 10일이 지나도록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중략.... 장군 달솔 정중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 은상과 달솔 자견 등 10명과 군사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였다. 이 이외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들이 돌아올 때 길에서 백제의 좌평 정복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하여 왔다.
김유신이 또다시 큰 한건을 해냅니다. 백제 최고급 좌평 장수를 전사시키네요. 의자왕 기록엔 어떻게 나올까요? 또 생략일까요?
9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이를 맞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 백제가 쳐들어간 기록도 맞고 김유신이 맞대응하여 이긴 기록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냥 우리 군이 졌다가 다입니다. 물론 기록이 누락될수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의아한 점은 좌평 정복이 천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는 기록역시 없다는 점인대요.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항복한 정복과 병사 1000명을 그냥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뜻밖의 사건이 백제측 기록엔 전무하니 의아스럽습니다.
가을 9월에 유신은 백제에 진공하여 도비천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자... 이번에 김유신이 다시 백제 도비천성을 공격 함락하였다는 기록나옵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 백제측 기록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백제본기에는 오히려 그 시기 다른기록이 나옵니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오히려 백제본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도비천성 함락내용이 아닌, 신라의 30여성 함락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신라본기에서도 김유신이 도비천성을 함락했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김유신 열전에만 나오는 내용이네요. 그의 거짓 전공이 다시금 판명되는 순간입니다.
종합해 보면 김유신 장군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병사숫자만도 5만이 넘습니다.
백제를 쳐들어갈때 신라가 쥐어짜고 쥐어짠 병력이 5만이었는대 김유신은 이 숫자보다 많은 병사들을 전쟁터에서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을 거둔것입니다. 그런대도 백제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해하며 놀았다는 삼국사기 기록
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건가요???
자, 그러면 의문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 김유신 열전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에서 조차 누락되고 없는 내용이
나와 있는 것일까요? 아이러니 하게도, 이 해답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말미에 나와있습니다.
유신의 현손(玄孫)으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유신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는데, [거기에는] 꾸며 만들어 넣은 말이 자못 많으므로 이를 줄이고 그 중에서 기록할 만한 것을 취하여 전(傳)을 지었다.
김유신 열전은 말 그대로, 그의 후손인 김장청이라는 인물이 쓴 행록을 보고 쓴 것이었으며, 김부식 조차도 꾸며 만들어 넣은 말이 자못 많다라는 말을 통해 볼때, 김유신 열전은 그러한 후손들이 쓴 행록을 취하였다는 것과, 또한 김유신열전에 보이는 그의 전공들이 상당부분 부풀려 졌음을 알수 있으며, 김부식이 보기에도 상당히 과장되고 꾸며진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치, 조선시대때 이성계의 전공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용비어천가가 생각나는군요.
물론, 백제본기에 전쟁에 패한 전사자 숫자같은 기록등이 보이지 않는것은 관산성 전투때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락될수도 있고, 역사는 승자의 편이므로 과장하는것 역시 당연합니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악성을 비롯한 백제 성 함락과 2만명의 적을 참살한 기록이나 도비천성 함락 기록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조차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되며, 사료로써의 가치는 분명 있긴 있으되,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보다는 그 사실성이 상당히 낮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댓글 글쎄요. 조금 성급한 결론인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원래 누락된 부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 김유신 열전에 있는 이야기가 백제 쪽 기록에 일부 누락되었다 하여 '그것은 없던 사실을 조작한 것' 이라 말하기는 위험하지요. 예컨대 온달 열전을 보게 되면, 후주가 고구려의 요동을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후주군을 격파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본기에는 아예 등장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온달의 대 후주전 출전을 '사실이 아니다' 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요.
옳은 이야기입니다..열전과 본기의 전거자료가 틀리다면 오히려 춘추필법의 기전체 문체로 변형시켜 끼워 맞춤식으로된 본기내용에 더욱 의심을 하는게 옳을듯 합니다..본기와 열전 내용 그리고 각 국가별 사건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라는 법도 없지요..물론 인위적으로 조작을 한다면야 철처하게 교차적 검증으로 끼워 맞춰야 하지만 그냥 각 국가별 사료를 술이부작 원칙이었다면 제각기 틀리는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보아야 하겠지요...그런면에서 미주가효님의 주장에 더욱 공감이 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문제가 됩니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도비천성(조천성)을 김유신이 함락한것으로 나오지만, 오히려 김흠운 열전에서는 그 성을 김흠운이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전사한 기록만 나옵니다. 함락했다와 함락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공존해 있는대 어느것이 합당하다 보십니까?
앗, 수정하다가 실수로 지워버렸군요. 김흠운 이외에 '취도' 열전에서도 비슷한 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추가하는 중이었는데.... 이런
요컨대 도비천성/조천성 기사는 '실제 전투' 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보는 것이 합당할 겁니다. 김흠운과 김유신 열전의 기사에 의하면 도비천성/조천성은 백제의 성으로 나오는데, 취도 열전에서는 이 성이 신라의 성으로서 백제가 공격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성의 소유가 변동하는 일진일퇴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니 김유신열전의 기록을 '거짓' 이라 단정하는 건 성급하다는 생각입니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성을 '빼앗은' 부분만 기록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취도열전에 나오는 조천성이 백제에 의해 함락된 내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나오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의 30여성을 함락하였다는 내용과 그 시기가 일치하니. 그 30여성중 하나가 조천성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본기의 내용과 부합되는 내용으로 열전에서만 보이는 다른내용이 아니지요. 또한 김흠운은 빼았긴 30여성중 하나인 조천성을 되찾으려고 쳐들어 갔다가 전사한것이고요. 오히려 본기에 대한 부연설명일 뿐,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30여성 중 하나의 조천성이 백제의 대공세로 함락되던 전투의 이야기가 취도의 것이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출전한 것이 김흠운 사망전투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1. 655년의 조천성 전투는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2. 이 전투가 '단일 전투' 가 아니라 여러 회의 전투이며(최소한 성을 빼앗기는 취도의 전투와 이를 다시 찾기 위한 김흠운의 전투 2번은 존재했겠지요)
3. 여러 전투 와중에 이 성이 김유신에 의해 탈환된 적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김유신 열전이 '거짓 공적' 을 적었다고 확언하시는 건 상당히 성급한 것이지요
열전 자체를 거짓투성이의 못믿을 사료라고 낙인찍어버리는 건 과도한 처사이지만, 역시 확실한 사실성을 담보하는 것 또한 아니지요... 사실 학계 역시 그러한 과장성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보고 있다 봅니다. 어찌 보면 삼국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열전들은 야사의 성격을 띠는 표현들이 적지 않죠... 의직과의 전투 이후 20여개의 성을 단번에 빼앗고, 거의 3만이나 되는 이들을 한큐에 없앤 일화의 표현은 저 역시 여러 부분에서 의심해 보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신라본기에서도 그 내용만이 빠졌다는 점 역시 더더욱 의뭉스럽기도 하구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천성은 30여 성을 공취한 성과물이라 보진 않습니다.
허나 그리 보는 제 시각에서도 제목의 표현은 좀 문제가 있군요... 일본서기는 우리나라 역사 시각으로 봤을 때 사료의 사실성을 잘 담보해서 툭하면 우리가 인용합니까? 중국 사서들이 다 사실 그대로만을 표현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7세기 나당전쟁의 표현을 봐도 신라측과 당나라 측은 그 뉘앙스가 어마어마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 이건, ' 한쪽은 100% 사실만을 표현하고, 한쪽은 100% 거짓만을 표현해서 ' 나온 결과였을까요? 고대사의 사료들은 그래서 그 존재만으로도 적지 않은 가치(설령 가치라고 불러주지 못해도 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김유신 열전의 몇몇 기사는 다른 기록과 결부하여 생각해 볼 때 사료에 '명시적' 으로 나타나지 않은 암묵적 권력관계에 의한 결정을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한 예로 태종 무열왕의 즉위 과정을 볼 때,
1.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아마도) 화백회의에서 다음 왕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알천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2. 삼국유사에서 '사람(귀족)들이 알천을 수석의 자리에 앉혔지만 실제로는 김유신의 위엄에 굴복했다' 고 하는 점이나,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서 김유신과 알천이 '상의' 하여 춘추를 왕위에 앉히는 부분은
알천의 양보가 '순수한 자발적 양보' 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저는 김유신 열전이 사료로써 가치가 전혀 없다는것이 아닙니다. 가치성이 본기보다는 떨어진다는 것이며, 열전은 김유신의 후손이 적어넣은 것이기 때문에 과장되고 찬양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대야성이 함락된 것을 김유신이 쳐들어가 빼았고 품석과 고타소의 유골을 되찾고 조천성 전투에서 김흠운이 사망한걸 김유신이 성을 빼앗아 대신 복수해준다는 점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두 사건 모두 김춘추의 사위가 죽은 사건이죠) 다른건 과장되었어도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김유신의 대야성 및 악성등 20여성 함락과 3만명 참살, 도비천성(조천성) 함락기록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게 제 주장입니다.
열전이 본기보다도 가치성이 떨어져요?.왕의 치척 문제라면 그렇게 되지요..왕이 아닌 개인의 업적사료인데 본기보다 열전이 떨어져요?..누가 그런 엉뚱한 말을 하시던가요?..원사료가 구삼국사와 개국공행록 그리고 유신비문일 경우 구삼국사에 비해 비교적 원사료인 개국공행록과 비문이 떨어진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잇나요?..그리고 구삼국사가 저자가 확실한가요? 아니면 1차적 원사료가 맞는지요?..결코 구삼국사에 비해 행록이나 유신비문이 구삼국사에 떨어진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요!
김유신열전은 과장이 섞인 기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부식이 참조한 기록이 바로 김유신의 행록입니다.
흔히들 아는 행장, 행록은 없는 공도 뻥튀긴 경우가 허다하죠..
(일례로 원균 행장, 이억추 행록 등등이 그렇죠.)
그 기록을 보고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과장이 심하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래도 추려낸건데..그래도 좀 있다고 봐야죠.
김유신의 공적은 본기위주로 보고 열전의 기록은 걸러내면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의 기록의 비교검토가 있었군요.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과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많고,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으며,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끼리도 충돌하는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박제상의 기록이 서로 다르죠. 하나는 장수왕이 순순히 복호를 보내주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복호를 추격하였다고 합니다. 남당유고는 장수왕이 처음에 복호를 순순히 보내주었는데, 제신들이 헐뜯자 추격꾼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장수왕이 복호를 순순히 보내주었다는 기록도 맞고, 추격꾼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일면 맞는 것이죠.
아래에 포상국과 물계자의 이야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죠. 삼국사기에는 포상국과의 전쟁이 내해14년과 17년의 기록인데, 삼국유사에는 17년과 20년의 기록이죠. 그런데 남당유고에는 내해14년, 내해17년, 내해20년에 신라와 포상국간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열전과 본기의 기록비교 검토는 삼국사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니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랍니다.
그런데 김유신 열전 어디에 대야성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는거죠? 제가 다시 김유신 열전을 봤는데 그런 기록은 안 보이는 군요. 위에 기록은 신라군이 대야성 공격을 하다가 거짓 패배하여 옥문곡까지 적을 유인해서 야전에서 백제군이 패한거니 대야성 함락과는 별개로 봐야할 것 같군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많은 분들이 저 기록을 가지고 엉뚱하게 대야성 함락을 주장하시는 것 같던데 명확히 대야성을 함락시켰다는 다른 기록이 있습니까?
그러면 티얼님은 언제 대야성을 신라가 되찾았다고 믿나요?..김유신의 대야성 보복전투이후로는 대야성 전투가 일어난 적이 일체 없었는데 어떻게 661년에 아찬 종정을 대야주 도독으로 임명을 하지요??..
티얼님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했군요. 대야성 함락이 아니라 진례성과 악성 함락으로 수정합니다^^
물런 과장된 면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쩌든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구하고, 영광을 안긴 구국의 영웅이니깐요. 후손들이 과장했을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가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람이 백전백승은 할 수 없겠죠. 김유신 장군은 전략가쪽에 무게가 있는 장수일수도 있습니다. 즉 전술에서는 고만고만한 승률이지만 전략에선 100%에 가까운 승률을 가졌을거라고 봅니다. 조조 역시도 전술에서는 그리 좋은 승률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략에선 제가 알기론 적벽대전, 한중공방전 빼곤 패배한적이 없는걸로 압니다.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적인 전투에선 꼭 승리를 거두었죠. 갈리아원정에서 그 갈리아 장수
(이름이...)에게 크게 한방을 먹습니다. 그러나 결국 알레시아공방전 승리로 길라아를 평정했고, 폼페이우스와도 디카디움 공방전에선 패했지만 결국엔 승리를 거둡니다. ㅋ 김유신도 이런류의 장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랬만이네요...^^*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구하고, 영광을 안긴 구국의 영웅의 열전 내용이 생각보다 부풀리고 과장되기 보다는 오히려 전공이 삭제되고 누락되어 엉성하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열전 정도의 내용으로 입지적인 영웅으로 될 일인지?..그것도 이상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