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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진도견대백과 -사단법인 한국진도견보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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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견에 대한 보고
문화재로서의 진도견을 어떻게 보호 육성할 것인가 ?
최기철<동물학, 서울대 사법대교수>
전설의 진부
개는 인류가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최초의 동물로서 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그 유골이 발견된다.
그와 함께 멧돼지, 노루, 패류 등의 골격이나 패곡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개는 수렵에 사용되었으며, 식용에 제공되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석기시대 유적으로 나오는 개의 유골은 모두가 중형의 개이었으며 현재의 진도견이나 일본의 기주견과 유사하다. 석기시대의 개의 유골로서 만주, 중국, 유구열도, 일본, 한국 등지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같은 형의 것이라는 것도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조 영조시대의 경암 김익주가 그린 매사냥의 그림에서 보는 개가 현재의 진도견과 동형의 것이라는 것도 또한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아 온다면 진도견은 석기시대인이 사육했던 개의 사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진도견은 석기시대의 초기에 들어온 중형이고 조금 크며 입술이 비교적 짧은 개와 신석기시대의 입술이 긴 개와의 혼혈종이라고 생각된다. 진도견은 늑대의 가축화한 품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동아의 내부지역인 인도에서 자칼과 같은 종을 그 지방사람들이 가축화한 것이 다른 유사종과 혼혈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후에 이 개는 중앙아시아로부터 만주에, 만주로부터 한국에 이어서 일본에 건너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계통의 개의 후예가 한국전체에 분포되어서 근세에 와서는 각종 외래종과의 사이에 혼혈이 일어나서 귀는 늘어지고 꼬리도 늘어뜨리게 된 잡종이 많이 생겼지만 진도에서는 대륙과 격리된 채 비교적 순수한 품종이 남아서 오늘에 볼 수 있는 진도견이 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구설에 의하면 진도견은 송남시대의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했을 때에 남긴 것이라고도 하고 이조시대 진도군 지산면에 있었던 국영목장(군마)의 번견용으로 몽고로부터 수입한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전설들의 진부를 밝힐만한 자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기까지
1936년 그 당시 경성제국대학교 예과교수였던 森爲三씨는 시학위원으로 전라남도에 출장하였을 때 진도에는 진도견이라는 명견이 있어서 그 성능이 우수하므로 매년 수백마리씩 육지로 수출된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다음해 즉 1937년 2월 11일에 그는 진도에 가서 그 당시 진도군수였던 안동호씨의 진력에 의하여 군내면, 지산면의 진도견을 조사했었다. 그 결과 그는 한국고유견이 진도에 비교적 순수하게 남아 있어서 그 성능도 대단히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를 의안으로 1937년 보물고적 명승천연기념물 위원회에 제출하여 의안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1938년 5월 3일 진도견을 한국 특유의 축양동물이라는 조항에 의하여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을 하고 동일부로 조선총독부관보 외호를 통하여 이를 공고했었다.
1938-1945년까지의 보호실정
진도견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자 당시 진도군 당국은 진도견보호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로 진도견의 외부로의 반출을 막고 다른 품종과의 혼혈을 방지하는데 노력했었다고 하며 당시 총독부학무국은 이에 대하여 년 3원 정도의 보조를 했었다고 한다.
진도견의 외지반출은 엄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도 매년 적지 않은 수가 잡종이라는 명목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1945-1963년까지의 보호상황
해방후 3-4년간은 천연기념물로서 보존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경과했다. 6.25동란 이전에 중앙에서 보조금을 받아서 보호책을 강구하려는 노력도 당시 군당국(당시 축정계장 곽남순씨의 이야기)에서 있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간 아무런 제약을 받음이 없이 우량 진도견이 다사육지로 반출되었다. 진도견이 상당한 가격으로 팔리게 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6.25후에도 수년간은 사태가 조금도 개선되지 못했다.
교육구청이 독립되고, 교육감이 임명되자 천연기념물 보존사업도 겨우 궤도에 오르게 되어 진도견도 보호대책이 강구되게 되었다. 즉 진도교육청 당국은 1957년도에 문교부로부터 300만원의 예산을 배정받아서 우량종 168두를 구입하여 의신면 칠전부락과 진도면 지도부락민에게 위탁을 하게 된 것이다. 위탁 조건은 부모견을 무상으로 배부하는 대신 유건 2두씩을 반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철저한 뒷처리가 없이 유야무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5.16혁명후 교육구청이 폐지되고 교육과로서 군기구로 들어가게 되자 진도견은 명목만 교육과에서 보존의 책임을 지게 되고 실질적인 보호사업은 군축정계에서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2년도에는 농림부 군예산으로 종견 100두를 구입해서 154세대가 살고 있는 의신면 접도에 격리했다고 한다. 그 후 무상배포의 대가로 받은 약 30두의 유견을 진도면 각부락에 다시 같은 조건으로 배초했다고 한다. 송인섭 군수는 부임 이래 진도견의 보호증식에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여 우선 전도에 총두수 13686두가 있음을 밝혔다.
금년도에는 농림부 보조금 90만원을 얻게되고 축정계장 윤씨를 지난달에 맞이하게 되어 본증식사업에 본격적인 노력을 집중하게 되었다. 먼저 진도견심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심사위원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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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축견들
- 아시아의 원산이면서 1천여년 전부터 전세계에 전파된 것으로 마스티프와 스파니엘 2종이 있다.
한국견의 변천
한국견의 기원을 살펴본다면 필연적으로 한국민족의 기원을 살펴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민족은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주, 몽고등 인과 함께 퉁구스족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 국사의 신화를 인용치 않아도 BC3-4천년에 원주민족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북한에서 발굴되는 것을 미루어 보아 이 원주민은 서기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그 후 전설 보다도 앞서 은나라 시대로부터 차차 동진하여 남하 거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역에서 발굴되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축견은 그 기원인 석기시대부터 그 민족과 성쇠이동을 같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원주민이 어떤 형태의 축견을 길렀든지 서기전 1천여년의 은나라시대부터 동진남하하여 온 민족들이 동반하였던 축견들과 혼혈교합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교통이 용이한 육지에서나 이루어 질 수 있으나 남한의 남단 섬지역까지 몰려 이주하게 된 민족과 축견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못하였다.
이상이 대략 한국견의 역사적 변쳔이라고 할 수 있ㄷ. 그렇다고 보면 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견종을 살펴보면 동북아시아지역의 견종만도 10여종이 된다. 그 모두가 체모에 있어 흑,적,백의 단색 혹은 2색반점문 혹은 혼색이며 귀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삼각반으로 직립 혹은 말려서 등에 붙은 것이 특징이다.
그 종류를 열거해 보면 에스키모견 허스키견 말라뮤트견 바스칼견, 퉁그스견등의 다수이며 이상하게도 북구에 이와 동형의 견종이 있기도 하다.
한국견의 표준
이밖에도 아시아 원산이면서 1천여 년 전부터 전세계에 전파된 2종이 있으니 서장의 마스티프와 스파니엘 종이다. 물론 한국견은 퉁그스견에 속하나 만주에 광대한 영토를 가졌으며, 북방에서 건국한 부여, 고구려, 발해민족과 함께 여러 가지 아시아견들이 남래하였을 것이며, 그 후 수천년 동안 이조시대까지 중국문화가 수입되어 그 정치세력이 파급되자 그들이 기르고 있는 축견까지도 점차적으로 수입하게 되어 한국 원주견과 부단히 혼혈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견의 표준은 일정치 않다. 단지 체구의 대소로 구분하여 대형,소형,중형으로 나누어 대중형견을 북부 육지견에 많고, 남부섬 지방견은 비교적 한국 우너주견의 혈액이 농후하여 중소형견이 보통이다.
축견의 이동상황이 문헌으로 나타난 것은 겨우 근대에 와서 볼 수 있다. 한편 동으로 전파되어 중국, 한국, 만주로 이동하여 한국에서는 삽살개로 되었다.
사라진 삽살개
삽살개도 현재는 전연 볼 수 없으며 그때도 그다지 흔하지는 않았다. 40-50년전에 청삽살개라 하여 흑색장모와 단문(短吻:주둥이가 짧고)거구가 그 원종의 용모를 계승한 것으로 귀한 견종이었다. 한편 서장의 스파니엘종은 북경의 궁중이나 부자집에서 많이 애육되어 오늘날의 페키니즈라는 종류가 영국의 상선과 침략에 의해서 서방면으로 많이 보급되게 되었다. 우리 한국에서도 일찍이 재상가에서 많이 애육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조고서중 애견도로 이 페키니즈를 많이 그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실증할 수 있다.
이것이 요즘 흔히 보는 발발이의 전신이며 일본발발이의 원종이다.
동방으로 진출한 견종으로 만주견중의 대형젼, 한구견 중의 청삽살개 정도로 오히려 부진상태어었으나 서방으로 진출한 견종중에는 헝가리의 코몬돌견 피레네 산중의 피레니견 등이 모두 백색이나 서장 마스티프의 자손이며 특히 코몬돌견은 백색일지언정 한국의 삽살개와 흡사하여 현재 영국의 장모목양견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남구로 진출하였던 자손들은 뒷날 영국에서 타견종들과 혼혈된 것이 적색단모의 현재 마스티프견종이다.
돌로 만든개
또 아시아의 일부에 2-3종의 견종이 왔다. 이것은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의 사막, 고산지대나 광야사막지대의 근동지역의 견종인데, 그 지형과 지역상의 조건으로 그 지방의 축견들은 타지방보다 주로 시각에 의존하는 체구로 되었다. 이상과 같이 일반적인 아시아의 제견종과 세계적으로 진화된 견종의 변천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일본인들이 우수성을 자랑하고 특유의 견종으로 자랑하고 있는 일본견은 사실 한국견을 수입한 것이다. 백제 근고초왕 대에 인왕박사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문자를 가르쳤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 후의 성왕시대에 다수의 엽견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사실은 희소하게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 수출된 한국견으로는 고마이누(고려견)혹은 가라이누(당나라견)라고 칭하여 그 수렵 성능이 좋았으므로 엽견이 성행되었으며 매년 수없이 수출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신사에 석견(돌로 만든 개)를 두고 고마니누라고 신사 앞에 두는 곳이 많은데 이 풍습은 인도의 경전에 우바니살에게는 영부의 번견이라는 구절이 있어 그 사상의 영향도 있지만 한국견의 영특한 성능을 숭앙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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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견 도서(島嶼)견 풍산견
- 일본견이란 백제 성왕대에 한국에서 다수 수출된 축견의 자손이므로 진도견과 흡사한 혈통을 지닌다.
혼혈종이 많아진 이유
소위 한국견은 서기 1천여년전부터 중국대륙으로부터 부단한 문화수입과 함께 수입 혼혈된 것으로부터 더욱 한말에 일본 세력의 침투에 따라 외국견종이 많이 수입되어 급속도로 혼혈되었다.
마치 일본의 명치초에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자 양견들이 수입되어 서구풍습을 무조건으로 모방하는 시대였으므로 일본인들 눈에는 그 때 귀가 내려가고 털이 긴것을 사육하는 것이 특권층이나 문명인으로 생각하였고 또한 그렇게 보였으므로 이번에는 자기들이 한국을 침략하자 도래하는 일본인마다 귀가 내려가고 털이 긴 양견을 데리고 와서 문명인 노릇을 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현재 한국의 혼혈종을 많이 퍼트리는데 큰 작용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밖에 더욱 급속도로 한국 고정견이 없어진 이유로는 정치적인 원인도 있었다. 즉 한국의 경찰권이 일본인에게 위탁되었을 때 야견박멸이라는 명목으로 춘추로 야견들은 모조리 타살하여 일차견종 멸종의 위기를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귀가 서고 털이 짧은 비교적 한국 고유의 형태를 갖춘 축견은 수난기에 봉착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도나 완도, 거제도, 제주도 등 지역은 북방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고 역시 정치적인 영향도 받지 않았으므로 한국 고유종이 남아 있었던 것같다.
한국견의 일본유래
그러면 진도견만이 어찌하여 높이 선전되었으며 천연기념물 53호로까지 제정되어 도외반출까지 금지되고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 이유로는 거제도 등 타도견들은 수렵능력이 높이 평가되어 도외로 수없이 육지로 수출하였기 때문이며 육지의 엽사들은 가을 추수기(엽기)가 되면 거제도로 엽견을 구하고저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수요증대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무질서한 번식이 거듭되어 차차 그 외형 성능이 모두 저하되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일본견이라는 것이 백제 성왕대에 한국에서 다수 수출된 축견의 자손이므로 그 형태가 한국 고유의 혈종이 농후한 진도견과 흡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는 국한된 소도에서 다년간의 혈족혼배가 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 예로서 일본견도 산간오지에 있는 것이 대부분 소형견이다.
그러나 제주도견은 제1거구로서 체고가 1척8촌부터 2척1촌까지이며 모색은 흑색회색으로 진도견의 적색과 백색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체모였다. 이것은 제주도는 이조시대 몽고말을 수입하여 방목하였는데, 그 때 몽고로부터 동시에 수입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점도 있다. 그 이유는 육지견과도 성격, 외모가 다를뿐더러 도서견도 외모가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진도견의 표준규격은 일정치 않지만 대체로 체구가 크지 않고 체모는 적색, 백색이며 비색은 백,적을 막론하고 흑색이다. 코가 적색이거나 눈이 황색인 것은 잡종이다. 귀는 적으며 3각형에 가까워야 하며 귀도 크고 장방형인 것은 역시 잡종이다. 발도 적어야 하며 체고와 체장은 4대 5의 비율이어야 하며 허리는 곧어야 한다. 흉부가 넓어야 하며 귀사이가 넓어야지 좁으면 세퍼드계통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꼬리는 위로 들거나 왼쪽으로 말려야 하며 굵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우나 토끼를 추격할 때 질주할 때 급전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꼬리는 장식물이 아니고 배에서 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방향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진도견은 또한 유치로서 쥐를 잡는다 이와 같이 선천적으로 수렵능력을 가졌으며 강한 기백과 용감한 성격을 가졌지 때문에 쓸데없이 짖어대고 집안을 소란하게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짖어대는 것은 비겁하고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진도견의 사료는 양견과 같이 늘 동물성 지방질이나 육식은 금물이다. 계속 과다한 지방분을 공급하면 심장마비의 원인이 되며 소화기질환을 일으켜 만성구지피양증으로 사망률이 높아진다.
풍산견이란 ?
한국고유의 육지견은 일정 40년동안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으나 산간오지에만은 간혹 그 외모만을 겨우 찾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대략 중형이하의 견으로서 귀가 삼각형이며 귀가 곧게 솟은 것이 특징이며 역시 엽견으로서 충실한 견으로 불과 3기만 훈련을 거치면 훌륭한 엽견으로서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고 소동물 수렵과 조류사냥에 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여 특히 굴사냥을 하는데 특기를 가지고 있다.
육지견중에 함경북도 풍산지방의 고유견인 풍산견을 백두산맥으로 내려와 백수산의 고산지대에서 화전밀들이 사냥에 사용하였다는 우수견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응천강의 원류가 시작되는 이곳 풍산지방에는 남쪽 높은 령이 해안지대를 병풍으로 둘러쌓는 듯한 분지의 중앙지이기도 하다. 체구가 중형이상의 대형견으로서 백색모를 특징으로 검은발톱, 검은코, 흑동자가 눈에 확실하며 북만의 코리드견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풍산견은 장구한 세월동안 이 주민들과 외부의 접촉이 없이 두절된 채 사육되어 일종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은 축견이다. 성능은 용감함은 물론이요, 수색능력과 인내력이 또한 강인하기 때문에 맹수사냥에 적합한 유일의 한국견이다. 일본인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후에 다시 알려졌으나 그 성능을 자세히 관찰한 사실은 없다. 백계 러시안인으로 함북 주을에서 거주했던 야콥스키라는 엽사가 다수의 풍산견을 호랑이와 곰의 사냥에 사용하여 그 우수성을 확인한 바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종승님 글.
진돗개 연재의 첫 번째로 진돗개의 기원설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진돗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1.중국 송나라 표류 견 설 (960-1279)
중국 송나라 시대 , 진도 근처를 지나던 교역선이 풍랑을 만나 침몰 하고 이 배에 실려있던 개가 진도로 헤엄쳐서 건너와 진돗개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 설은 진돗개가 다분히 남방계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진돗개의 혈청검사 결과 남방계의 혈통은 극히 드문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시대에 개를 배에 실고 다니며 교역을 했다는 것도 납득이 어려 울뿐 아니라 한 품종을 이룰 만큼의 숫자라고는 더욱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고 본다.
2.몽고 유입설.
1270-1273년 경 고려 삼별초군 정벌 때 들어왔다는 설이다.
후에 삼별초군은 강화에서 진도, 완도, 남해, 거제, 제주 등 연 해 도서 30여 섬을 지배하는 해상 국가를 건설하여 싸웠는데, 그러나 려몽 연합군의 9개월에 걸친 전재에 전멸 당했다.
몽고군은 이 때 삼별초군 가족은 물론 진도 인까지 모조리 포로로 몽고로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그 후 억울하게 끌려간 진도 현지인이 귀환하게 되었는데, 그때 데리고 온 몽고견이 진돗개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이다.
당시 몽고군은 제주와 진도에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양마 장을 두었는데. 그 경비와 목양견으로 몽고 견을 데리고 온 것이 진돗개의 선조가 되었다고 도 한다.
또는 조선 초기에 지산면에 군마 육성 목장이 설치되었는데, 그 목장의 번견으로 당시 몽고에서 직접 수입해 온 견이 진돗개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황적으로 볼 때 중간 쪽에 많은 공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3.우리나라 고유의 토착견이라는 설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에부터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야생토착 견이 진도라는 섬의 특수한 환경에서 혈통과 야성을 수수하게 유지 되어 온 개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혈청검사를 보거나 그 형태적인 것과 또한 품성적인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 농경문화의 토착견의 이미지와는 거리감을 갖게 한다.
4.구전설
어느 선배가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여귀산에 과거 공부를 하러 입산 하였는데, 이 선비는 입산할 때 흰 암캐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던 중 이 암캐가 발정을 하여 늑대가 암캐 옆에 다가와 어울리는듯 하였고 2달후 흑, 백, 황, 이렇게 새끼를 낳았는데 이들이 진돗개의 조상이라는 말이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5.종합적 견해
오늘날 위의 설들 위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입장을 보이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나라 토착견이 대륙견과 혼배되어 오늘날의 진돗개 가 되었다는 딥장이다.
이상오의 “수렵비화”라는 책에는 서기 53년 경에 이미 알본에서는 백제의 개들이 수럽견으로 많이 팔려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으로 팔려간 한국의 개들은 그 품성이 특출나게 우수해 구마이누 (고려견),가라이누 (한국견)라고 부렸으며, 그들의 신사 앞에 돌상을 제워 숭앙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이 자랑하는 아끼다나 지쥬견 따위의 개들에게는 한국의 토착견의 혈통이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진돗개의 혈청검사 결과 북방견의 피가 대부부 흐르고 있고 남방견의 피도 1%정도는
있다고 하니,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주장할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으로 한반도의 토착견이 몽고견과의 혼배를 통해,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외부견과 혼혈이 되지않고 격리된채 수백년의 역사를 통해 토착 보존된 우리나라의 토종개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진돗개가 세계 135종의 견종 중 유일하게 다른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 건국대 농학박사 한상기교수의 연구 결과 밝혀진 것도, 위와같은 정황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진돗개] 2. 진돗개가 천연기념물이 된 경위.
진돗개의 역사를 보면,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몽고견 유입설의 내역에서부터 일제 식민지 치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진돗개은 인족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우리의 반려견인 것이다.
일본에 의해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그 리고 일본은 우리나라를 거점으로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이때 눈 속에서의 전쟁에는 병사들을 동상에서 보호할 모피가 필요했다. 야생동물의 모피로는 그 수효을 충당할수 없음으로 일본은 부족한 모피를 우리 나라의 개들 에게서 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황국신민화에 (내선일체)골몰하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숨결이 숨어있는 토종개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목적이 되었다.
그들은 동내에 돌아다니는 개들이 광견병의 원인이라 하여, 백정들에게 권한을 주어 우리 개들을 모조리 때려잡게 하였다.
그때 한국견 토벌작전으로 삽사리와 같은 털이 좋은 토종개들은 더욱이 멸종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진도는 일본인들의 정착이 늦어졌고 또한 할당량의 모피를 사냥으로 인한 짐승가죽으로 대처할 수 있어 그 피해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일본인 모리 교수는 일본견과 유사한 개가 진도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진도를 방문하여 조사한 후,1938년 5.3일 조선보물 고적명승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할 받게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물론 일본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를 중시했던 때문이였다.
해방후,
1967년 1월16일 법률 제 1875로 진돗개 특별법이 제정되어 진돗개는 본격적으로 국가적 인 보호을 받게 되었다.
비로소 그 우수성이 우리국민에 의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진돗개 특별법이 계속 적으로 수정되어 오기는 했지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 천연적 이라고 할 수 있었던 그 상태를 완전히 난도질 해버린, 진돗개의 모색을 황, 백, 국한하고 여타의 유색견의 계속적인 도태는 진도견의 근간이 파헤쳐지는 결과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이와같은 결정을 내리던 위원들은 대다수 생물학적 이치에 무지함에서 위와같은 크나큰 오류가 범해진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황, 백 으로만 모색을 못박은 것 때문에,우수한 흑황색 (네눈박이) (재구), 부지땅 맞은 개라고도 했던 (호반견)등.. 자연견종 의미를 갖고 스스로 우수한 형질을 유지하는대 필수적 요소의 제거는, 진돗개의 형질 모두를 걷잡을수 없는 퇴화에 이르게 했다고 본다.
그 한 적라한 예가, 이 걷잡을수 없는 퇴화현상에, 궁여지책으로 백구마을 황구마을을 정하여 같은 모색끼리의 번식을 시도해 보았으나 오히려 더욱 가중되는 퇴화 현상에, 지금은
그 역사적 흔적 으로만 있는 것으로 안다.
또한 효율적인 관리부족은 물론, 우수한 견들은 어떻게든 육지로 반출되어 나가,현지에는 우수한 개체수가 적어지게 되었고, 육지에서는, 진돗개의 인식부족 으로 일제가 자기들 개를 기초한 진돗개의 표상의 표기에 정작 우리 순수 진돗개들은 사실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일반인의 인식부과 맞물린 상인들에 의해, 강아지 때부터 발육이 좋고 대형견인 일본의 아끼다나, 깨끗한 흰색인 기쥬견, 북실북실한 중국의 차우차우견,심지어는 세퍼트나 핏불테리어와도 교잡하여 싸움개 혹은 수렵견이라 하여, 오로지 상술과 자기편의 대로 전락되어 많은 진돗개 들이 잡종화 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제때에는 개토벌과 진돗개의 외곡은 물론 일본개 진도 유입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진도견 대중화의 1970년대의 이후로는 퇴화와 혼혈 잡종화로 인해 순수 진돗개들의 수난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진돗개]3.오늘날의 진돗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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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 자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