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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지침을 주는 글을
복사하여 올립니다.
이 카페에 오시는 모든 분들은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관련된 징조를 깨닫기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징조와 시기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마땅히 준비해야 할 순종의 삶의 영역들을 훼손하거나,
균형을 깨뜨릴 위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음 글은 여러 성도님들께서 꼭 한번 읽어 보실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http://cafe.daum.net/ymmch/576b/4
계시록 함부로 풀지 말라!
조봉상 목사
(Golden Bell Presbyterian Church in L.A.)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19-21)
그 동안 계시록을 함부로 풀다가 이단이 되고 진리에서 벗어나 지옥으로 떨어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잘 믿어 보려 했던 자들이고 재림할 주님을 만나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단이 계시록을 이용해서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그 가운데는 ‘새벽별 종말론’을 주창한 계시록의 권위자 공용복 선생도 있다. 계시록은 하늘의 비밀과 장차 될 일에 대한 미래 계시이기 때문에 반드시 풀어야 할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잘못 풀다간 이단이 되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예언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죽하면 요한이 계시록을 다 기록한 뒤에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고 했겠는가? 계시록을 잘못 풀거나 자기 사상을 집어 넣게되면 저주라는 것을 경고해 주는 말씀이다. ‘비밀’의 책이요,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책이요, 사단의 비밀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축약되어 있는 책이기에 계시록은 잘 풀면 참으로 유익한 책이요, 잘못 풀면 치명적인 독소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전방에 가면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들이 있다. 그 지역에 함부로 뛰어 들어갔다간 지뢰를 밟아 발목을 잃거나 생명을 잃게 된다. 때문에 그 지역을 통과하려면 지뢰 탐지기로 탐지하거나, 일일이 땅 속에 지뢰가 매설되어있는지를 점검하면서 나아가야 안전하다. 계시록도 그와 같다. 계시록에는 잘못 건드리면 이단이 되고 사단에게 넘어갈 치명적인 부분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사단은 계시록을 풀려고 덤벼드는 자들에게 미혹의 영을 넣어 주거나 이상한 환상, 계시를 보게 하거나, 잘못된 생각을 넣어 줌으로 해서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마침내 그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과거 2천년 동안에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계시록을 잘못 풀게 해서 수많은 자들을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게 하지 않았는가? 극단적 재림론에 빠지게 하고, 가정을 파탄나게 할 뿐 아니라, 직장과 학업을 그만두고 집단생활에 들어가게 한다. 이런 열매들은 사단이 주는 열매들이다. 사단이 뒤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일단 미혹이 되어 버리면 그런 것을 판단할 분별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시록을 잘 해석해서 신앙에 유익을 얻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오늘 교회 지도자들의 사명이다. 어떻게 하면 계시록을 통해서 마지막 말세를 준비하고, 주님 앞에 칭찬받으며 설 것인가?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열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열심이 사단이 이끄는데로 가는 열심이면 안된다. 성령께서 이끄는 열심이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계시록을 열되 조심스럽게 열어야 한다. 함부로 계시록을 푸는 일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요, 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요, 사단에게 내 영혼을 내어주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계시록의 해석 방법을 따른다면 계시록의 메시지를 좀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캐 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런 원칙과 방법을 사용하여 계시록을 열고, 주님이 주시는데까지만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이 열어 주시는 것보다 앞서 가면 강도요 절도가 되어 버린다. 부디 계시록을 통해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더욱 영적으로 경성하고, 회개의 바람이 일어나고, 참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 문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해석 하라.
계시록은 묵시문학 쟝르에 속하는 책이고, 예언서인데다 여러 가지 '비밀'과 '영적', ''상직적' 단어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사실적인 단어가 아닌 것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사실적인 단어나 문장까지도 영적, 혹은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해석자들은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 단어나 문장이 일차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일차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상징이나 비유, 혹은 영적인 의미를 캐내려는 시도는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한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가지고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석하라.
요한이 2천년 전 계시록을 기록하던 그 당시에 사용되던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의미를 최대한 알아내서 본문을 해석해 나갈 때 본문을 통해 보다 분명한 의미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1)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1:7) -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그처럼 예수님 재림 때도 그렇게 온다고 했으니까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에 어떤 다른 영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해석을 한다면 본문 이해에 많은 혼동이 올 것이다. 여기 '구름'은 어떤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 구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2)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강”(22:1) - 천국에 실재하는 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여기에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상징이나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3)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21:22) - 천국의 길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는 표현은 천국체험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길은 이 땅에서 사용하는 금보다 훨씬 우수한 품질의 금으로 되어 있다고 해석해 나가면 될 것이다.
(예4)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계 16:21) - 대단히 큰 우박으로 이해하면 된다.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릴 때 내렸던 그런 유의 우박임에 틀림없다. 실재 우박이며, 실재 무게가 한 달란트 나가는 우박이다.
* 주의할 점:
오리겐은 모든 성경에 문자 하나 하나에 일차적 의미 외에 이중 삼중으로 어떤 영적 의미가 있다고 보고 모든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성경을 파고 들어간 결과 성경이 본래 전달하고자 하는 뜻과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 버렸다. 이런 식으로 일차적 의미를 그 이상의 어떤 영적 의미가 있다고 보고 계시록을 접근하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이단으로 흘러 가게 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예)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21:12) - 여기에 모두 ‘12’라는 공통의 숫자가 나온다. 영해나 알레고리 설교를 좋아하는 설교자들은 ‘12’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해석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12’라는 숫자를 사실 그대로 열 두 아들로 이루어진 열 두 지파로 단순하게 이해하면 된다.
2. 계시록 본문의 문장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문법적 지식을 습득하여
본문의 문장과 문맥, 앞뒤 단락의 전개과정, 시제, 태 등을 분석함으로
본문의 정확한 뜻을 파악해 내야 한다.
계시록의 원문이 헬라어인 만큼 헬라어 단어와 문법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있으면 유리하다. 헬라어 원문을 해독할 능력이 없다면 자국어 성경을 정확하게 해독할 문법적 학식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문장을 이해하고 파악해서 정확한 의미를 꺼낼 수 있는 분석력과 이해력은 계시록을 해석해 내는데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과 상호 관계도 알아야 하고, 문맥의 앞과 뒤가 어떻게 연결, 진행되어 나가는지도 알아야 해석이 가능하다. 문장에서 주어와 동사, 목적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단락과 단락 사이에 사용되는 접속사 하나까지 이해할 때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한 단어에 집착해서 그 단어를 깊이 파헤치다보면 문장을 통해서 전달해 주고자 하는 본 뜻을 놓쳐 버릴 수도 있다. 각 문장에서 사용된 그 단어들은 문장 전체의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들이다. 그 당시에 사용되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서 기록하긴 했지만 그 단어가 영적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정보를 제공해 주는데 많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 속에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이해하고, 문장 속에서 단어들을 이해해야 정확한 의미를 캐 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를 보자. 이 표를 이해하려면 문맥을 통해서 이해해야 하고, 앞뒤 단락을 통해 이해해야 하고, 계시록 전체가 주는 메시지를 통해 이 부분을 해석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짐승의 표'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원어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원어적 접근은 앞에서도 밝혔지만 잘못하면 저자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극단적 재림론에 빠진 자들의 '짐승의 표'에 대한 해석을 들어 보면, 그 '표'는 원어적 의미에서 피부에 상처를 내서 받게 하는 표라 해서 피부에 주사를 해서 넣는 ‘베리칩’이 그 표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렇게 해석해 들어가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며 정당한 해석일까? 아니다. '표'의 헬라어 어원을 찾아보면 ' charasso'(카라쏘)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뾰족하도록 ‘날카롭게 하다’ '긁는다‘는 뜻이 있다. 물론 원어의 뜻과 그 어원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원어 분석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원어분석에 너무 집착해서 문장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본 뜻을 놓쳐 버리면 큰 일이다. 단어를 연구해서 그 뜻을 파악해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자가 단어를 선택할 때, 그 단어가 포함한 모든 의미를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의 의미로 그 문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때문에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문장 전체를 통해서, 문맥을 통해서 그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한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할 때, 그 단어와 연관된 당시 사회 관습적인 측면, 문화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 13장에서 '표'라는 것을 기록할 때는 계시록을 받는 성도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표',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어떤 '표'임이 분명하다. 계시록에서 사용된 ‘표’는 로마시대 당시 상업적인 거래를 할 때 찍는 ‘도장’이나 노예의 몸에 찍는‘화인, 낙인’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표”는 헬라어로 “Charagma”(카라그마)이다. 몇 가지 뜻이 있다. “긁힌 자국” ‘부식동판술’ (노예의 몸에 도장을 찍는) “인”, “표”같은 것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도장(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제국의 다양한 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그것을 ‘카라그마’라고 했던 것이다. 상거래를 할 때나 무역 같은 것을 할 때, 그 문서에다 로마황제의 이름과 날짜로 되어 있는 도장으로 인치는 것이었다. 카라그마는 또한 로마시대 사용되던 동전에 황제의 머리를 새겨놓은 것을 뜻하기도 하였다.
또한 카라그마는 또한 낙인의 한 유형이기도 하였다. 로마시대 당시 불순종한 노예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망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주인 소유가 기록된 낙인을 그 노예의 몸에 찍어 표시했다.그렇게 되면 그 노예는 그 몸에 찍힌 도장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며, 어디를 도망가도 잡히게 되어 있다(짐승은 자기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이런 화인을 찍어서 영원히 자기 종을 삼으려 할 것이다).
그 당시에는 또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몸에 문신하는 것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장군의 이름을 자기 몸에 새기는 관습이 있었다. 신에게 몸을 바친 자들은 자기 신에게 충성의 표시로 문신을 하였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표”라고 했을 때는 그 당시 수신자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표 받는 것은 일차적으로 ‘노예몸에 찍는 낙인’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영적 의미로 해석할 때, 짐승이 상징적, 혹은 영적으로 자기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찍는 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베리칩으로 단정하고 모든 해석을 베리칩을 증명하기 위해 본문을 해석한다면 앞에서 경고한 바대로 이것들 외에 무엇을 더할 때,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응하게 될 것이다.
“표”(카라그마)라는 원어적 의미를 분해하고 파헤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신학교에서 성경을 원어로 파헤치고 분해하는 공부를 많이 했던 적이 있다. 원어를 분해하고, 문법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원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아갈 경우가 있다. 심지어 본문을 설교하기 보다는 단어 하나를 붙잡고 그 어원을 분석해서 대지를 나누고 설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모르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사람'이라는 단어를 분해하면 물론 몇가지 개념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파악해 낼 수 없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영적, 생물학적, 인종학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인격체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원어분석을 통한 의미파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 버리면 성경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이른바 ‘자의적 해석’(eisegesis: 성경 해석자가 성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생각을 집어 넣어서 해석해 나가는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표’라는 원어에서 ‘베리칩’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계시록 13장에서 “표”는 베리칩과 같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 상징적인 표이다.
3. 계시록을 해석할 때 전체적인 해석방법 원칙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계시록은 사실적인 표현도 있지만 ‘상징적’인 표현도 많고, ‘비유적’인 표현도 많아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어떤 것은 ‘영적’인 표현도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해석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때가 많다. 어떤 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데도 일정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만약 똑같이 '비유적' 표현인데, 어떤 곳에서는 '실제'로 어떤 곳에서는 '상징'으로 어떤 곳에서는 '영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계시록의 해석이 부정확하게 되어 버린다. 해석의 균형을 잃어 버리면 그런 해석은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구원받아 천국에 올라가는 144000명의 성도들이 받는 '인'을 보자!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14:1)이 쓰여져 있다. 이것은 보이는 가시적인 '인'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상징적인 '인'인가? 이것을 상징적인 '인'으로 해석하려고 결단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에 대해서도 '상징적'인 해석원리를 적용해야 해석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아니면, 짐승의 표를 '실제적'인 것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144000명이 이마에 받는 이름도 실제적인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해석자가 자기 유리한대로,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혹은 어떤 교리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해석 원리를 마음대로 적용한다면 그런 해석은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해석원리의 균형을 잃어 버리고 해설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해 나간다면 거기서 '이단교리'가 생겨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4. 신학적인 지식이 계시록 해석에 기초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적인 지식이 반드시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신학적 선지식은 정확한 성경해석을 방해할 수도 있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신학적 지식의 도움이 없으면 정확한 해석을 해 내기 어려운 부분들도 많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신학을 공부했다고 계시록을 정확하게 해석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계시록을 풀어 나갈 때 훨씬 더 정확하게 계시록의 본문을 해석해 나갈 수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학지식이 없는 평신도가 입신이나 체험, 환상, 영음 기타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계에 부딪쳐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에 부딪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영적 체험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셨고, 일반 지식을 통해서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기에, 신학적 지식은 계시록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반드시 신학적 지식을 갖춘 목회자나 학자들이 푸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5. 계시록을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른 성경과 비교를 통해 해석하도록 한다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성경 저자가 다르고 쓰여진 시기가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각 성경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성경과 비교하고 상호보충함으로써 보다 확실한 해석을 해 나갈 수 있다. 계시록에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계 2:20)이라고 했을 때, 이 내용을 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구약의 이세벨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비교하는 것은 계시록 이해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 전후서 등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상호비교 보충함으로써 계시록 본문의 해석을 더 명확하게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6. 계시록 전체가 주고자 하는 전체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각 장이나 각 단락을 단편적으로 해석해 나갈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계시록 전체를 통해 주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것들이 다른 방향으로 나갈 위험성이 있다. 계시록의 핵심 주제들은 ‘회개’와 ‘임박한 재림’, ‘죄에 대한 심판' '대환란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새하늘과 새땅’과 같은 것이다. 이런 핵심 주제들을 염두에 두고 각 단락과 각 장을 풀어나간다면 본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보다 더 본질적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7. 계시록 안에서 이미 성취된 예언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1세기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교회들이다. 그 교회들에 관한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다. 계시록의 시대적 배경은 로마시대이다. 큰 바벨론은 '로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계시록의 상당부분은 로마 시대에 이루어진 내용들이라 할 수 있다. 계시록 19장에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데, 그것은 로마의 멸망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동시에 큰 바벨론은 마지막 죄로 더럽혀질 세상 나라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세에 나타날 나라들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계시록 19장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으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8. 반복적으로 성취되어지고 있는 예언들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계시록의 내용들 가운데는 일회적으로 일어난 일이나 일어날 일이 있는가 하면, 2천년 기독교 역사에 반복적으로 일어날 일들도 있다. 로마황제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2처년 후인 지금에도 일어날 것으로 예언된 부분들이 있다. 선지서나 예언서들 대부분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당시에 임박하게 일어날 일을 예언하면서도 동시에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형식이다.
'핍박'에 대한 예언들은 1세기 초대교회가 로마정부와 황제들로부터 받을 것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시대마다 성도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고, 지금까지 그 핍박은 반복되어 왔다.
‘발람의 교훈’은 민수기에 일어났던 사건이면서, 동시에 1세기 버가모교회에도 있었던 사건이다. 또한 2천년 교회사에서도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는 교회는 계속 나타났었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우상숭배' 또한 마찬가지다. 짐승에게 경배하는 일이 느부갓네살 왕 시대에도 있었고, 1세기에도 황제숭배로 나타났다. 나찌시대, 일제시대에도 있었다. 지금 북한에서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하고 있으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온갖 핍박을 견디며 자유케 될 날과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상에다 절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로 가고 있는 시점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화해, 타종교와의 강단교류(통합측 인명진 목사는 법륜을 교회 강단에 세웠음)등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앞으로도 짐승에게 경배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어떤 예언들은 2천년 동안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9. 계시록의 예언들 가운데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 천년왕국, 큰 성 바벨론의 함락, 백보좌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들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성취되지 않은 것은 쉽게 구별해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미 성취되어 왔고 지금도 성취되고 있고 앞으로도 성취될 그런 예언들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종말론 해석자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계시록은 거의 대부분 성취되지 않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666표'를 받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계시록 13장을 보면 '두번째 짐승'이 나타나야 하고 그 두번째 짐승이 첫번째 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야만 그때부터 666표가 찍힌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으로만 해석할 때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우상의 출현, 짐승의 출현, 또한 베리칩과 같은 가시적인 짐승의 표의 등장, 이런 것들이 나타나야만 계시록이 이루어져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짐승이 영혼들에게 표를 찍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아직 표찍는 일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보고 거기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짐승은 우상숭배하게 하고 그들에게 표를 찍는 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 그런 정책을 썼다. 겉으로는 평화정책이니 남북대화니 하면서 땅 밑으로는 굴을 파고 들어왔다. 분명히 알아둘 것은 사단은 양면 정책을 쓴다는 것이다. 사단은 항상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겉으로 베리칩을 외치면서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정작 뒤로는 영적으로 666표를 받게 하는 것이다. 콜롬비아 7명의 청년이 지옥에 내려가서 예수님과 함께 666표를 이마에 받은 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왔다. 한 명이라면 의심할 수 있지만7명이 동시에 내려가 보고 온 것이니 믿을만 하질 않는가? 666인은 우상숭배하는 자들에게 사단이 이미 찍어 왔고, 지금도 찍고 있고, 앞으로도 찍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계시록 13장을 이해하면, 독자들은 훨씬 더 믿음으로 잘 준비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사단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되지 않을 줄 알고 땅으로 이미 내려왔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가 우후죽순으로 넘어지고, 종교다원주의로 빠지고, 목회자들의 윤리가 땅바닥까지 실추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계시록 해석자들은 마귀가 아직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70명의 제자들이 나갔을 때, 사단이 번개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예수님이 보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눅 10:18). 벌써 사단은 발악을 하고 있다. 오늘(2012년 3월 21일자 L.A. 중앙일보) 이곳 LA 신문광고에 희한한 광고가 하나 나왔다. 절에서 낸 광고인데 “생전예수재”라는 제목의 전면광고이다. 그 광고에는 중들이 여러명 나와있고, 장소는 LA에 있는 ‘관음사’ 주관은 ‘LA 봉원사, 입재: 3월4일, 회향: 4월 14일로 되어 있다. 중들이 '부처'에게 절하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쳐야 하는데, 이젠 “예수”운운하는 세상이 되고있다. 불교가 예수님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이것은 성도를 미혹하는 사단의 수법이다.
분명히 예수님의 재림, 천년왕국, 휴거, 심판은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성취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는 이미 성취되고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0. 통시적(diachronic) 방법을 사용하여 해석해야 한다.
이 방법은 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의 시대상황, 수신자들의 형편을 연구함으로써 본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이 기록된 때, 시기, 이유, 여러 상황 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해 나가는 방법이다. 통시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시록이 진행된다고 보고, 계시록 1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한편의 드라마가 전개되듯이 전개되어 나간다는 것을 전제하고 성경을 해석한다.
이 방법은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계시록 앞부분에 언급되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의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계시록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잡혀간 정황이라든가,그 당시 로마지배 하에 있었던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할 때, 계시록을 더 깊이 해석해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계시록 1장은 시대상황은 분명 사도 요한이 살아있던 1-2세기이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지리적으로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이다. 그러나 뒤로 넘어가면서 시대는 점점 흘러가고, 인과 나팔과 대접의 재앙들이 전개되면서 점점 종말로 치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 20장에 ‘백보좌심판’ 혹은 ‘최후의 심판’이 전개된다.
11. 공시적 방법 (synchronic) 을 사용해서 해석해야 한다.
공시적 방법은 계시록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대상자에게 어떤 이유로 쓰여졌는지, 어떤 과정으로 전개되었는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계시록 본문이 중요하며, 공간적, 시간적, 문화적, 인종족 간격을 뛰어넘어 1세기 성도들에게나 10세기 성도들에게나 오늘 우리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준다고 보고 거기에 맞추어 해석해 나가는 입장이다.
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주는 편지인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상황에 너무 매일 필요가 없다. 계시록은 그런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간격을 넘어서 21세기에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찬들에게도 동시에 주는 메시지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현대 크리스찬들에게 다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보자! 소아시아 일곱교회 상황을 1세의 교회 상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처한 교회 상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계시록의 수신자는 현대 교회들이다. 계시록 1-22장을 시간적 흐름에 따른 전개과정으로 보지 않고 단편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계시록에 “내가 보니” 라는 말이 단락이 바뀔 때 마다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앞 사건이 일어난 후에 뒷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도 요한이 볼 때, 그것을 시간적 순서에 의해 보았다기 보다는 말세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 가운데 중간 중간 본 것을 묘사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반드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로 받아 들이기 때문에 현대 크리스찬들에게 잘 적용할 수 있는 점이 있다.
12. 원어분석 방법을 사용하라
언어가 형성되려면 그 사회의 문화, 법률, 관습, 사상, 종교, 철학 같은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원어의 의미를 파악하면 성경의 본 뜻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 당시에 사용된 바로 그 원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해서 계시록을 연구한다면 계시록은 더욱 명학하게 해석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바와 같이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원어의 의미에 빠져서 그 의미들을 확대해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늘의 비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다.
예를 들면, 성경 저자들이 글을 쓸 때는 ‘파피루스’나 그 당시 그 지역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어떤 필기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때는 ‘먹과 붓’이라고 하였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요삼 1:13). 원어적 의미는 분명히 다르다. 성경 해석이 문화와 사회관습, 그 당시의 정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원어로 들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3. 수사학적 표현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의미를 보다 정확하고 감동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사학을 사용해야 한다. 이 수사학은 성경 전체에 깔려 있고 계시록에도 수사학적 표현들이 많이 있다. 비유법, 직유법, 은유법, 과장법, 의인법, 활유법, 의태법, 의성법, 풍유법, 대유법, 환유법, 중의법, 감탄법, 반복법, 대조법, 열거법, 도치법, 인용법 등등 이런 수사학적 표현에 대한 이해력이 있을 때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 낼 수 있다.
계시록에 기록된 글들이 어떤 영적 사실을 설명하는 우리가 이해하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 세상에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비유해서 기록되었다고 전제하고 해석해 나가는 방법이므로 해석자는 이런 수사학적 표현들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1) “그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1:15)-이것은 직유법을 사용한 표현이다.
(2)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 본래 뜻은 교회문을 닫으시겠다는 말씀이다. 교회를 촛대와 연결시켜 놓음으로 그 뜻이 더 강하게 전달된다. 이것은 대유법을 사용한 표현이다.
(3) “발람의 교훈”(2:14) -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발람의 실제 선지자의 이름인 동시에, '거짓선지자'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이완용이 실제 이름인 동시에 '매국노'를 상징하는 이름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일종의 중의법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 “이세벨”(2:20)-타락한 거짓 선지자를 의미한다
(5)) “불로 연단한 금”(3:18) - 말씀 혹은 다른 영적 유익한 것을 의미한다.
(6)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3:12)-천국 백성 되게 해 주겠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것은 상징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7)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3:18) - 영안이 열리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일종의 풍유법이라 볼 수 있다.
(8) “네 생물” - “사자같고, 송아지같고, 얼굴이 사람같고, 날아가는 독수리같다”(4:7)
(9)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5:5) - 예수님을 의미한다.
(10)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14:8)-‘포도주’는 진노를 상징하고, 그 진노로 인하여 흘리는 피를 비유.
* 주의할 점: 본문에서 비유로 쓴 것은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 비유를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그 의미를 너무 확대해석해서 다른 의미로 나아가는 것은 금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1) “촛대를 옮기리라”(2:5) - ‘촛대’는 ‘교회’를 비유한 말이다. 교회문을 닫겠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한 말씀이기 때문에 촛대는 교회로만 보아야 한다. 아무도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실제 ‘촛대’를 옮긴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의미를 더 확장시켜서, 촛대는 불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촛대=빛’으로 해석한다든가, 초는 자기를 녹이기 때문에 희생한다는 의미에서 ‘촛대=희생’으로 해석한다든가 하는 것은 안된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에서 ‘주막’을 ‘교회’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잘못된 해석이고 그것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2) “새벽별을 주리라”(2:28) - ‘새벽별’의 정확한 의미를 성경이 밝혀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론을 사용한다. 새벽별은 밝다. 새벽별은 예수님이다(계22:16). 새벽별은 갈 길을 인도한다.새벽별은 깨달음이다(벧후 1:19). 본문의 뜻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추론해서 해석하려 한다. 성경본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명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한 해석을 하도록 해야 한다.
(3)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8:7) - 계시록에서 ‘1/3’이라 했을 때, 정확한 수치로 보기 보다는 ‘대략 어느 기 보다는 많은 부분을 비유했다고 봐야 한다.
14. 계시록에서 상징이 나타내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내야 한다.
저자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상징물을 통해 전체의 의미를 전달하려 할 때가 있다. 그 상징을 사용하면 읽는 독자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양’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 자들은 그 의미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다 안다. 이처럼 계시록에는 ‘상징’을 통해서 많은 사실을 전달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1)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1:16) -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과연 예수님이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계실까?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일까? 아니다. 누구도 이것을 문장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일곱 별’이나 ‘검’을 상징으로 보고,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2) “사망과 음부의 열쇠”(1:18) - 여기 ‘열쇠’는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실제 열쇠라고 보지 않는다. 음부로 보낼 수 있는 ‘권세’나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
(3)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2:10) - ‘10일’은 아주 짧은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흰돌”(2:17) - 정확한 의미는 모르나, 그렇다고 ‘흰돌’이 실제 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 “감추었던 만나”(2:17) - ‘만나’는 구약에서 먹든 그 만나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실 영의 양식, 혹은 어떤 특별한 의미의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6) “새벽별을 주리라”(2:28) - 실제 ‘새벽별’을 준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새벽별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시록 22:16절에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는 표현은 ‘새벽별’이 ‘예수님’인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7) “흰말, 청황색말, 붉은 말, 검은말”(계6장) - 실제 말이 아니라, 그 말들은 색깔별로 의미하는 바가 있다.
(8)“ 인 맞은 자 십사만사천명”(7:4) - ‘144000명’이란 수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징적이라고 본다. 여호와증인들은 이것을 실제 숫자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성경해석가들은 이것을 실제적이 아니라 상징으로 본다. 구원받은 자들을 상징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 수가 실제수라고 해석한다면, 많은 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9)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11:12)- 실제 7천명이 죽는다고 볼 것이 아니라 ‘많은 수’를 상징한다고 봐야 한다.
(10)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12:1) - 만약 이것이 사실적 표현이라면 괴물일 것이다. ‘여자’, ‘달’ ‘열 두 별’ 이것은 다 상징적이다. 누구를 상징하는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한다.
(11) “큰 성 바벨론”(18:2) - 바벨론은 다니엘 시대에 망한 왕국이다. 그런데 다시 계시록에 언급된 이유는 무엇인가? 말세에 다시 ‘바벨론’이란 왕국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바벨론’은 무엇인가? 영적으로 타락한 ‘이 세상’을 말한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18:2).
(12)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14:4) - 여기 나오는 여자는 실제 여자로도 볼 수 있지만, ‘죄’나 ‘세상’ 혹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가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주의할 점: 상징을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한다. 계시록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로 상징을 설명해 버릴 경우, 성경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1)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2:22) -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병으로 치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침상’의 의미를 편히 쉬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곤란해 진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비둘기=평화’라는 공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해진다.
(2)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9:7,8) - 모두가 비유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 본문이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해 들어가야 한다.
15. 영적인 해석을 통해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라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 속에 일차적으로 전달해 주는 내용 그 안에 또다른 영적 의미가 있다고 보고 그 영적 의미를 해석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1)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11:8) - 소돔, 애굽은 전혀 연관이 없는 지역이다. 게다가 예수님이 못박히신 골고다 언덕은 이스라엘에 있다. 이 지역들은 영적인 의미로 풀어야 한다. 이 곳은 죄악이 넘치는 이 세상, 타락한 세상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6:2) - 영적 전투상황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흰말’ ‘활’ 이런 것은 현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가 아니다. 영적으로 해석해야만 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3)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 - 여기 나오는 ‘어린양’ 과 ‘피’ ‘옷’은 모두 영적이고 상징적이다.
(4) “일곱 머리와 열뿔”(17:3) - 영적으로 해석해야만 그 뜻이 나온다.
(5)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14:18) - ‘낫’ ‘포도송이’ 다 영적 의미를 가진 말들이다.
(6) “큰 성 바벨론” -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나라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6. 계시록에 예언된 것들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연결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현재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기초로 해서 계시록을 풀어 나갈 수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치, 군사적 상황, 특히 중동의 상황을 계시록과 연계시켜서 계시록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프리메이슨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게 되고, ‘세계단일정부’ ‘666시스템’ ‘베리칩’ ‘현금없는 시대’ 같은 이론과 연구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러한 해석방법은 현재 나타나고 현실과 계시록이 적접 연결되기 때문에 교회 성도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들이 계시록의 본 뜻과 맞지 않을 때는 상당한 혼란이 가중될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방황하게 될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때문에 좋은 해석자는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말세임을 지각하고, 더욱 깨어 회개하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들을 기울이는 것이 건강한 믿음생활로 나아가는 길임을 제시해 주는 사람일 것이다.
17. 천국 지옥 간증, 입신, 환상, 성령께서 주시는 해석
등을 통해 계시록 해석의 귀중한 자료로 삼도록 한다.
성경계시는 이미 끝이 났다. 우리는 완성된 계시를 손에 들고 있다. 문제는 해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 경험, 문화, 전통, 관습, 사회, 정치, 종교, 철학 등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계시록을 풀려고 한다면 풀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계시록을 본 저자가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해석했느냐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원어를 공부해서 풀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공부를 많이 한 자들도 각교파마다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해석은 경우에 따라선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하나의 해석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는 말이 되는데, 공부를 많이 한 그 자체만 가지고는 계시록을 정확하게 푼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없이 한 해석은 믿을 수가 없다. 성경해석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렇게 하는데는 물론 우리의 이성과 경험, 언어, 문화, 관습, 일반 지식도 다 동원이 된다. 그 위에 영적인 지식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계시의 정신이 더해져야 계시록 해석이 가능해 진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베드로가 경고하지 않았는가? 계시록은 함부로 풀 성질의 책이 아니다. 깊이 기도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야 한다. 문자적으로 풀고, 수학공식처럼 풀다간 이단으로 빠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듣고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말씀을 듣고서야 가슴이 뜨거워지고 깨달음을 얻었다. 보혜사 성령은 천국 백성들에게 계시록을 해석해 주시는 주체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체험, 미래에 되어질 일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성경의 재해석 등이 영적 체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사단도 이런 것을 흉내내어서 마치 성령의 일인 것처럼 속이고 들어오는데 이것을 영분별해서 쫓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무시해서도 안된다.개인적인 영적 체험은 계시록 해석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개인적 체험이 성경적인지를 다시 재점검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개인적인 체험은 버려야 한다. 예를 들면, 신성종 목사님이 천국에서 테레사 수녀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테레사 수녀는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이고, 그가 회개하였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천국 체험자들의 간증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다. 이때 영분별을 잘 해야 하고, 성경에 비추어 참과 거짓을 가려내야 한다.
18.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계시록을 이해해야 할 부분도 있다.
환상과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을 쓴 것이 바로 묵시문학의 장르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대표적이고 신약에서는 계시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묵시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저 세상’ ‘미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계시록은 큰 성 바벨론이 심판받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계시록은 사단 마귀가 지배하고, 세상의 왕들이 지배함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요한이나, 로마 정부로부터의 억압, 황제숭배를 비롯하여 유대교로부터의 율법주의 강요 및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은 성도들에게 큰 희망과 미래에 대한 약속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이런 관점에서 계시록을 해석해 보라.
19. 계시록에 사용된 ‘수’에 대하여 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계시록에 언급되는 ‘수’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실제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상징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영적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상 큰 차이가 난다. 7년대환란을 실제 수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 환란이 실제 7년 동안에 일어날 일이 될 것이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겐 마지막에 닥쳐올 전무후무한 대환난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1) 인 맞은 자 144,000명(7:3,4) - 실제 수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자를 대표하는 자들로 보아야 할 것인가? 선택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여호와증인들은 144000명의 숫자를 실제로 본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이것을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예2) 24장로 - 실제 24명의 장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상징으로 볼 것인가? 한 천국 간증자에 의하면 24장로는 구약성경을 쓴 저자들이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참고로 하는 것이다. 그 간증자의 말이 맞다면 24명의 장로는 실제수로 볼 수 있다.
(예3)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예4) 천 년 동안(20:2, 6) - 천년을 실제수로 본다면 전천년설이 될 것이고, 상징으로 본다면 무천년설이 될 것이다.
(예5) 열 두 진주문(21:13)
(예6) 12000 스다디온(21:16)
(예7) 일곱 교회(1:11)
(예8) 십일 동안(2:10)
20. 계시록 가운데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더 이상 나가지 말라!
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모르는 부분, 풀리지 않는 부분, 애매한 부분에서는 해석을 멈추라! 판단을 보류하라! 새벽별이 떠오를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라!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계시록을 정확하게 풀지 못했다 해서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 풀게 되면 구원에서 떨어진다. 잘못 해석할 것 같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 사단 마귀는 계시록을 오해하게 해서 결국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 계획들을 세워 왔다. 거기에 많은 이단들이 넘어 갔다. 풀리지 않는 부분은 기다리면 된다.
'휴거'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환난전 휴거냐 환난 중 휴거냐 환난 후 휴거냐를 놓고 볼 때, 성경 해석에 따라서 의견이 나뉜다. 계시록에 기록된 여러 예언들이 어느 시점에서 정확하게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모르겠으면 성급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기다리고, 여러 목사님들이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고 성경 본문을 비교하면서 가장 정확한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나 교리나 학설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이 '시기'가 아니라 '준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기에 대해 알려는 것 자체가 사단의 '함정'임을 알아야 한다. 사단은 '준비'보다는 '시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거기에 빠지게 함으로 정작 예수님이 오실 때 '들림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계략임을 알아야 한다.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시기'에 초점을 맞추다 결국 파선하고 만다. 시기는 하나님의 재량에 달려 있지, 우리가 연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시기를 당길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다. 성도들이 고통받을 때, 그냥 두면 구원받을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택한 성도들을 위해 그 환난의 기간을 줄인다고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는가? 때문에 우리가 재림 시기나 휴거 시기에 관해 연구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다만 준비만 하고 있으면 언제 휴거가 일어나고 재림이 일어나더라도 문제가 없지만, 열심히 시기를 연구하고 기다렸는데 정작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마치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처럼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현재 ‘베리칩’ 문제도 그렇다.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늘 그래 왔었던 것처럼 어떤 중요한 ‘이슈’를 부각시켜서 마치 그것으로 세상 종말이 오는 것처럼 유도한다. 92년 다미선교회를 벌써 잊어버린 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때 그들이 책을 펴내고,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하고, 수많은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베리칩을 외치는 자들이 지금 똑같이 하고 있다. 이번만은 진짜라고 한다. 기다려보면 알 것이다. 아니, 작년에 예수님 재림을 예고했던 자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아니면 말고’식으로 성경을 푸니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겠는가? 그들은 회개치 않고 계속해서 또 다른 날짜로 유혹한다. 그렇게 베리칩 외치는 자들이 거짓선지자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따라가는 자들은 무엇인가? 마귀에게 미혹되면 빠져 나오기가 심히도 힘들다. 지금 너무도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베리칩에 미혹되고 있다. 깨어 기도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다 알게 해 주실텐데, 기도하지 않으니까 사단의 미혹에 속는 것이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19-21)
계시록을 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자라가야 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이러한 해석방법의 절차를 통해서 계시록에 접근해야 오역으로 나가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바라기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계시록을 사모하고 그 뜻을 알기를 기도하되 함부로 풀지는 말기를 바란다. 이해되는 것을 통해서 은혜받고,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라. 계시록을 통해서 영적인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마침내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 천국에 들어가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경계해야 할 해석 방법
1. 알레고리 해석방법을 피하라!
오리겐이 사용한 방법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문자 뒤에는 삼중 계시가 있다고 본다. 계시록 본문에서 쓰여진 단어는 본래 그 의미가 가지고 있는 것 이외에 이중 삼중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고 해석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2. 교리적 해석에 너무 깊이 끌려가지 말라!
물론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세워준다.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안내서와 같다.하지만 잘못된 교리는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빠지게 한다. 교단이나 교회마다 교리가 있다. 조직신학이 세워져 있다. 대개 성경을 해석할 경우, 교리의 틀 안에서 해석하도록 교단들이 유도한다. 만약 교단이 제시한 교리를 벗어날 경우, 교단에서 퇴출당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교단 안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은 교리에 충실하기 마련이다. 계시록 또한 교단의 교리의 틀 안에서 풀어나가기 때문에 교단의 교리가 건전할 경우에는 보호막이 되는 반면, 교단의 교리가 잘못되어 있을 경우, 계시록 또한 잘못 풀어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어떤 교단은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어떤 교단은 무천년설, 어떤 교단은 후천년설을 주장할 경우, 어느 설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이나 방향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환란 전 휴거, 환란 중반에 휴거, 환란 후 휴거설이 있는데 어느 설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계시록의 해석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교단의 교리보다는 성경이 말씀해 주고, 성령께서 주시는 해석을 따라 가야만 계시록을 바로 해석해 낼 수 있다.
3. 세대주의적 해석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자들이다. 환난전 휴거를 믿으며,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성경을 세대로 나누어서 본다. 인류역사 7천년 가운데 각 천년씩 세대를 나누기도 하고,스코필드는 ‘무죄시대-양심시대-인간치리시대-약속시대 -율법시대-은혜시대-천년왕국시대’로 나누기도 한다. 세대를 나누다 보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도 세대에 따라가야 하는 잘못된 결과가 생겨난다. 하나님은 시기와 기한을 변할 수도 있고, 재림의 시기를 당길 수도 늦출 수도 있는 주권이 그 손에 있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 관점에서의 계시록 해석은 타당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4. 재림날짜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
예수님이 분명히 경고하셨다. 그 날과 그 시는 모른다고. 그리고 그것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그런데 왜 손을 대는가? 설사 예수님이 내일 오시더라도 재림날짜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재림날짜 말하는 자는 무조건 이단으로 봐야 한다. 계시록의 목적은 재림날짜를 밝히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이다. 주님 다스리는 나라가 오기 때문에 철저히 준비하라는 것이다. 환난을 이겨내라는 것이고, 적그리스도, 짐승, 사단 마귀의 어떤 공격도 이겨내고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주신 책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크게 중요시 않으면서 재림 날짜와 ‘베리칩’ 같은 데만 신경을 쓰게 해서 결국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사단의 방법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계시록을 수학공식 푸는 것처럼 풀지 말라!
계시록의 대가였던 공용복 선생은 계시록을 수학공식 푸는 것처럼 풀다가 지옥에 떨어졌다. 영적인 말씀을 인간의 논리와 공식으로 푸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거기엔 함정이 있고 사단의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 해 달라고 엎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수학 공식에 집어 넣어서 답이 척척 나오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좀 배웠다고 계시록을 함부로 풀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 지혜 가지고 풀어서도 안된다. 오직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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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좋은 지침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이 지침을 사용하려면 정보가 있어야하죠. 예를 들어서 중수 무게가 한 달란트라면 약 40 kg 로 볼 때에 그런 무게의 우박이 어찌 생기며 어떻게 지상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될 것입니다. 나중에 이 문제를 한 번 언급해 보겠습니다. 이런 것이 해석이 안되면 억지로 풀려고 하고 결국 상징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사실 상징이라 하는 것도 억지해석에 속하게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던 오리겐학파는 성경해석의 악한 방법을 유포한 자이죠 맘에 안들면 성경을 막 뜯어고친 자입니다. 내가 읽으면 다 풀린다 가 아니라 풀려야 풀리는 것이죠.
2. 7장에 나오는 12지파는 그저 그대로 보면 되겠죠.
뭔지 모르겠지만 좀 겁나는군요! 쪽지 답장 드렸습니다. 저는 제 지식을 자랑하려고 이곳에 글을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받고 깨달은 진리를 나누는 것이 형제된 자들의 기본이고 사랑이고 은혜나눔입니다. 긍정적으로 보아주세요....
그러나 모두 다 상징이거나 모두 다 문자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상징도 있고 문자도 있는데 그 해석한 바가 검증되어 올바르다 이해되어야할텐데.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장 정확한 건 현실에 나타나면 되는 것인데.. 어떤 이들은 그것 조차도 일치를 시키지 못할 수도 있죠.
3. 표는 이마나 손에 박히는 것이고 매매에 필요하므로 상징일 수없고 우상숭배와 관련있습니다. 유사이래 이런 것은 베리칩인데 환란기에는 더 기능이 추가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4. 성경해석학으로 볼 때에 가장 기피해야할 방법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인데 영해라고도 하지만 전혀 잘못된 방법입니다. 인간은 영해를 할 지격이 없고 선령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하시면 그것이 충분히 영적입니다. 영해란 말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그저 내 생각은 이라고 하는 것이 낫다 라고 생각됩니다.
5. 누구든지. 계시록을 풀려고 하면.
그 사람의. 인간의 하나님의 말슴에 대한 경외심. 다른 말씀을 얼마나 아는가. 말씀을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가 등등을 종합하여 나타납니다. 계시록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말씀의 이해와 신앙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대입 주관식. 논술고사처럼 테스트한다 라고 봅니다. 쓰는 것은 자기 마음이나 채점자 하나님이 따로 계시고 다 보신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