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잊혀져 간다
김 상 립
나는 가요아카데미라는 단체에서 10년 넘게 노래 공부를 했었다. 간혹 작은 발표회가 있으면 합창은 물론 혼성 듀엣도 불렀다.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연습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일이라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부르니 악보의 키(key)가 서로 다른 것도 문제였지만, 음성의 조화가 더 어려웠다. 내가 높은 음에서 소리를 크게 지르면 여자 목소리가 묻혀버리고, 소리를 작게 내려니 낮은 음역에서는 발성자체가 잘되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나를 숨기고 상대방을 들어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내 태도가 바뀌니 파트너도 생각이 달라졌는지 나와 조화를 맞추려고 애를 쓰자, 노래가 확 달라졌다.
그 후로는 어쩌다 혼자 노래할 기회가 생겨도 내가 부를 노래가 담고 있는 내용이나 감정을 얘기하듯 들려주려 애썼다. 설령 고음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더라도 악을 쓰거나 고함을 질러대지 않고 가성(假聲)을 쓰니 나도 수월하고 듣는 사람도 편안하다 했다. 뒤늦게나마 합창을 해보고, 듀엣 곡을 연주 함으로써 비로소 화음의 묘미를 조금은 알게 된 셈이다. 내가 소리를 크게 내야 할 때와 작게 내어야 할 때를 겨우 짐작하게 되었고, 귀를 열고 남의 소리를 유심히 들어가며 그것에 알맞은 소리로 반응해야만 화음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배웠다. 불행하게도 코로나19때문에 노래교실은 문을 닫았고, 벌써 3년이 지나가고 있다.
쉬는 동안 노래하던 때를 회상하면 생각이 꼬리를 문다. 특히 노래하며 경험한 내용들이 바로 일상의 조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과 수시로 주고받았던 얘기만 해도, 내가 의도했던 뜻이 늘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 목소리에 은연중 나를 내세우고 상대방을 설득 하겠다는 심보가 들어 가있어, 도리어 소통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수없이 반복해왔던 평소의 내 몸짓이나 행동에서, 더러는 내가 쓰는 글에서도 부질없는 자만심이 은연중 깔려 있었으니 교감이나 공감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다닌 이런 군더더기 같은 들어냄이 결국은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사람간의 거리를 멀게 했으니 나에게도 백해 무익한 일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내 음정이나 감정을 조절함으로써 좋은 노래를 만들어 냈듯이, 일상에서도 그런 노력을 당연히 했어야 옳았다.
이제라도 독하게 마음 먹고 목소리뿐만 아니고 생각이나 행동 에서도 불필요한 요소를 빼내기 작전에 돌입해야겠다고 굳게 다짐 해 보지만, 이미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나는 2021년 여름부터 버거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관련 기관에서는 나를 면역저하자로 분류하고, 기회만 되면 코로나 백신을 맞으라고 독촉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바람에, 올 6월초에 이미 4차 백신까지 맞았다. 이런 처지에 놓이고 보니 일상으로부터 주눅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우선 내가 병원에 자주 출입하는 처지니 혹여 내 건강상태가 나도 모르는 사이 좋지 않을까 싶어, 지인들에게 부담 되지 않으려고 조심 하게 된다. 또 담당의사는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말고, 가급적 바깥출입을 삼가라 하니 그것도 내 발목을 잡는다.
이런 저런 일로 1년 넘게 관련단체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불참 시마다 공개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정에 미안한 마음이 생겨 속으로 영 편하지가 않다. 더러는 모임에 나오냐고 의향을 묻는 관계자들의 전화를 받을 때면 대답이 궁색하다. 또 회원 카페에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다, 는 댓 글을 달 때도 마찬가지 심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차차 회원들의 관심도 떨어지고 참석 권유도 줄어간다. 내 자신도 슬슬 무뎌져 이제는 아예 불참 댓 글을 달지 않기도 한다. 반복되는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나는 시나브로 잊혀져 갈 것이다. 하기야 사람의 기억이란 것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씩 잊혀지기 마련 아닌가? 모두가 그렇게 기억도하고 또 잊혀지기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일성싶다. 그래도 마음 한 켠으로는 언제쯤 마음 놓고 모임에 나가서 다시 정상 적인 참여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슬픈 사슴처럼 모가지를 길게 빼고 기다려 본다. 반대로 이러다 진짜 드러누워 아무데도 못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일어나고.
지금보다 더 젊었던 날에는 나도 관련된 모임에 회원의 일원으로 성의와 열정을 쏟던 시절도 있었다. 내게 기회가 오거나 힘이 닿으면 마음을 다해 노력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어쩔 때는 내가 우리 모임에서 꼭 필요한 사람일거라는 착각에, 제법 목에 힘을 주고 앞에 나섰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예술 단체에서는 나를 내세우면 안 된다. 내가 잘났다고 날뛰는 순간, 동료들이 속으로 외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영리 예술단체란 데가 ‘내가 아닌 우리여야하고, 우리가 곧 나이 여야’하는 조금은 처신하기 어려운 자리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문학 단체 행사에 참석하고 못하고는 어디까지나 내 사정이요, 내가 없어도 단체는 잘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람 한 세상 살며 공연한 허세 때문에 목에 힘 줄 까닭도 없으며, 남을 배려한다고 일부러 목에 힘 뺄 이유도 없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이것저것 고민할 일도, 따로 생각할 일도 없을 터인데, 불필요하게 자기를 인식하다 보니 세상사가 복잡 해지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봉사 했다 생각되는 일은 돌아서서 빨리 잊어야 한다. 나이 들면 나란 존재는 살아온 지난 일에서 열심히 지워가야 한다. 그리고 좀 더 크게 보면 인생이란 남의 몫까지 나서서 살아주는 게 아니고, 주어진 제 몫을 찾아서 열심히 사는 일이 먼저다. 자기 길을 충심을 다해 가는 게 남도 잘 사는 길이 되도록 늘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글 쓰는 사람이 유일하게 남길 것은 글뿐이다.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