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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묵상글 (8/27. 22:05, 04:10, 05:2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 김찬선 신부님: 041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4:10. 1편 더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20.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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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1,17-25)
형제 여러분,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25,1-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는, 아오스딩기념일 독서(1요한 4,7-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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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8.27 21:46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5,1-13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였습니다.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름’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기리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를 풀이해 주었습니다.
그는 ‘등불’은 ‘남이 볼 수 있는 겉의 행실’이고,
‘기름’은 ‘속에 감춘 참된 사랑(자비)’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름은 빌려줄 수 없다’는 말이 깊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실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마음속 참된 사랑’만은 누구도 대신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저마다 자기 그릇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겉)’은 있었지만
‘기름(속의 사랑)’이 없었기에,
정작 신랑이 왔을 때 등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자신이 바로 이 비유를 살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등은 들었으나 기름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을 엉뚱한 데서 찾아 헤매며,
그의 등불은 꺼질 듯 깜빡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참된 ‘기름’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만납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였나이다,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당신은 제 안에 계셨건만, 저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나이다.”
그렇게 그의 꺼져 가던 등불은 ‘사랑의 기름’으로 되살아나,
‘혼인 잔치(하느님과의 일치)’의 기쁨으로 들어갔습니다.
‘신랑이 늦어진다’는 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질 때 우리는 졸기 쉽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잠들지 않는 것’보다
‘기름을 미리 채워 두는 것’입니다.
곧, 평소에 ‘사랑’을 차곡차곡 길어 두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사랑은 갑자기 ‘빌려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분명합니다.
등불을 끝까지 밝히는 것은 ‘사랑의 기름’이고,
그 등불을 들고서야 ‘잔치의 기쁨’에 듭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한 등도 결국 꺼집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등불에는 ‘사랑의 기름’이 채워져 있는가?
나는 ‘남에게 보이는 행실’만 있고 ‘속의 사랑’은 비어 있지 않은가?
나는 평소에 사랑을 ‘미리’ 길어 두는가?
나는 ‘늦었다’ 절망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돌아서는가?
주님,
제 등불을 ‘사랑의 기름’으로 채워 주소서.
늦었다 절망하지 않고 지금 당신께 돌아서게 하시고,
꺼지지 않는 등불로 잔치의 기쁨에 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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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8.27. 15:40
우리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광!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인 바는 이미 주님의 눈에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참 자아와 거짓 자아
우리 안에 깃든 하느님의 영광!
2026년 8월 27일 목요일
리처드 신부는 참된 자아와 거짓된 자아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트라피스트 수도자 토머스 머튼(1915–1968)에게서 접했습니다. 머튼은 켄터키 루이빌의 포스 앤 월넛 가(Fourth and Walnut: 현재는 포스 앤 무함마드 알리 대로-Fourth and Muhammed Ali Boulevard) 길모퉁이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머튼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머튼의 깊은 묵상에 이어 리처드 로어 신부는이렇게 성찰합니다:
많은 이들이 평생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음속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된 "나", 곧 이미 하느님 눈에 선한 본래의 자아 안에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참된 나"뿐입니다. 머튼이 위에서 묘사한 것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곳입니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그곳으로 가기를 꺼릴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꾸밈이 전혀 없는 자리입니다. 스스로를 칭찬할 것도, 어떤 가치나 우월성을 증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벌거벗은 듯 가난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꾸며온 모습과 투영을 내려놓고 나면, 처음에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오히려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의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머튼이 말하듯, 우리의 '무(無)의 점'은 곧 "우리 안에 깃든 하느님의 순수한 영광"입니다. 위대한 종교 전통들을 살펴보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프란치스칸은 그것을 '가난'이라 부르고, 카르멜 회원은 '나다(nada, 무)'라 부르며, 불교에서는 '공(空)'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행복선언에서 "영이 가난한 이들"(마태 5,3)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선(禪) 스승은 참된 자아를 "태어나기 전 우리가 지녔던 얼굴"이라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 존재"(콜로 3,3)라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옳거나 그른 어떤 일을 하기 전,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는 본래의 자아입니다. 생각은 분리된 자아, 곧 에고와 불안한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관상적 마음은 오히려 하느님의 자아, 그리스도의 자아, 풍요와 깊은 내적 확신을 지닌 참된 자아를 알아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내' 에고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은총—겹겹이 쌓인 은총—이 매 순간 '나'를 부드럽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희망의 입맞춤 안에 뿌리내려 있음을 신뢰할 때,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머물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며 은총으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들에 대해 나는 깊은 희망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주님의 현존께 감사드립니다.
—Della H.
References
[1] Thomas Merton,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Doubleday & Company, 1965, 1966), 142.
Adapted from Richard Rohr, Everything Belongs: The Gift of Contemplative Prayer (Crossroad Publishing, 2003), 76‒7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k Haupt, untitled (detail), 2022, photograph.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각 조각마다 내재된 빛을 드러냅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많은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돌파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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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160
2026.08.27 08:24
복음의 깨어있음에 대한 현실적 진단
복음에서 말하는 “깨어 있음”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나는 누구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영적 감각’에 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잠든다는 것은 육체적인 잠보다 ‘영혼의 무감각’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잠들어 있음’에 대한 현실적 진단
가장 위험한 잠은 ‘내가 깨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말씀을 알고, 기도하고, 계명을 지키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깨어 있음의 보증이 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은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익숙함의 잠, 미사와 기도와 말씀을 반복하지만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의 잠-“나는 옳다”는 확신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의 말과 하느님의 뜻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비교의 잠-내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다른 사람보다 잘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분주함의 잠-많은 일을 하느라 정작 왜 이 일을 하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판단의 잠-다른 사람의 허물은 잘 보이는데 내 안의 들보와 숨은 동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의 잠-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이것은 매우 심각한 잠입니다. 최후 심판에서 주님은 가장 작은 이들의 모습으로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31-46). 통제의 잠-하느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과 상황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보이기 위한 신앙의 잠-선한 일을 하지만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집니다. 마태오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경계하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의 반대는 반드시 악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하느님 앞에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이 말을 왜 하려고 하는가?” “사랑하기 위해서인가, 이기기 위해서인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해서인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가?” “봉사하기 위해서인가,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 결국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순간부터 깨어 있음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복음적 깨어 있음은 특별한 영적 체험보다 ‘관계의 현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누군가 나를 불편하게 했을 때, 무시당했다고 느꼈을 때,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인정받을 때, 방해를 받을 때 내가 보이는 태도, 곧 내가 한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가 바로 깨어 있음의 시험대입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분노, 질투, 억울함, 인정욕구, 지배욕, 자기방어’를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게 됩니다. “주님, 지금 이 사람과 이 사건을 통하여 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계십니까?” 여기에서 깨어 있음은 자기 감시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감수성이 됩니다.
복음에서 깨어 있음의 결정적인 기준
예수님의 복음을 종합해 보면 깨어 있음에는 아주 현실적인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보이는가, 배고픈 사람이 보이는가, 외로운 사람이 보이는가, 공동체 안에서 말없이 상처받고 있는 형제가 보이는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안에도 하느님의 형상이 보이는가. 사제와 레위인은 길을 지나갔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은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깨어 있는 눈은 결국 자비의 눈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면서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말씀을 읽으면서도 형제의 아픔이 들리지 않는 것,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옆 사람을 도구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깨어 있음은 이렇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가보다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보게 되었는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말씀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보다 그 일을 통하여 누가 살아났는가. 내가 얼마나 옳은가보다 내 옳음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은 없는가. 그리고 오늘 내 앞에 가장 작은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있는가. 어쩌면 예수님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은 미래에 오실 주님만 기다리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와 계시고, 현재 오고 계시는 주님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형제의 얼굴로, 불편한 사건으로, 실패와 좌절로, 가난한 사람으로, 나를 비판하는 사람으로, 때로는 내가 외면하고 싶은 내 자신의 진실을 통하여 주님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눈을 크게 뜨고 긴장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일이고, 자기 자신에게서 깨어나 형제를 바라보며, 마침내 모든 관계와 사건 안에서 “주님, 여기에도 당신이 계셨군요”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복음적 삶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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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2026.08.28 03:0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글라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 한 형상을 관찰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라봄은 마음의 팔을 벌리는 것이고, 내가 보고 있는 사랑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내가 바라본 그분의 가난과 겸손이 내 삶의 모습이 되도록 나를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바라봄은 멀리 서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분의 침묵 안에 머무는 것이며, 그분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 나의 관계와 말과 선택을 바꾸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 강한 것, 성공한 것, 흠 없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상처 입은 몸과 늙어 가는 육신과 실패한 사람과 버려진 이들의 얼굴은 되도록 보지 않으려 합니다. 매일 들려오는 전쟁과 재난과 죽음의 소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가고, 타인의 상처가 내 삶의 평온을 깨뜨릴까 두려워 시선을 돌립니다.
그러나 글라라는 바로 그 상처 입고 부서지기 쉬운 육신 안에서 하느님을 보라고 합니다. 수치스러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아무런 매력도 없어 보이는 고통의 얼굴 안에서 우리를 향해 몸을 굽히시는 사랑의 얼굴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가난한 마음만이 그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다른 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고, 자신의 상처와 걱정만을 붙들고 있는 마음에는 타인의 눈물을 담을 여백이 없으며, 무엇이든 소유하고 통제해야 안심하는 마음에는 자유롭게 오시는 하느님을 맞이할 공간이 없습니다. 가난은 마음 안의 방을 비우는 일입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미리 정해 둔 답을 내려놓고, 상대를 내 생각에 맞추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한다는 요구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 빈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많은 말을 드리는 것보다 그분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나를 비워 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도는 나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은총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리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되기를 허락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을 이해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 벌거벗은 채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라는 거울 앞에 서면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함께 인간의 깊은 상처를 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내어주실 수 있는지를 보는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사랑을 거부하고 타인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지를 봅니다. 그 거울 안에는 나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함께, 나의 교만과 집착과 자기중심성으로 그분을 다시 못 박고 있는 나의 얼굴도 비칩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아름다운 모습만 찾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나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실과 함께 사랑을 거부해 온 나의 슬픔을 보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는 진실과 함께 타인의 존엄을 훼손해 온 나의 죄를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나를 절망시키는 거울이 아닙니다. 그 거울은 나의 죄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자비를 비추고, 나의 상처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며, 나의 부족함 속에서도 새롭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가난의 길은 시작됩니다.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며, 나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힘도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무에서 불려 나왔고, 매 순간 존재를 선물로 받으며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내 호흡이 멈추지 않는 것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는 것도, 아직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은총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하느님 앞에서 요구할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감사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본래 가난한 일입니다. 나는 나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땅과 물과 공기와 햇빛에 의존하며, 수많은 사람의 수고와 돌봄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내가 먹는 한 끼의 음식에는 씨앗을 뿌린 사람과 땅을 일군 사람과 비를 내려 준 하늘과 햇빛을 품은 계절의 수고가 들어 있고, 내가 입는 옷 한 벌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홀로 살아온 적이 없으며, 나의 독립이라는 생각은 실은 수많은 관계를 잊고 있었던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존재적 가난을 거부할 때 죄가 시작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받은 것을 내 소유라고 주장하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속한 선을 움켜쥐고 나 자신을 찬양합니다. 선물로 받은 재능을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고, 공동체 안에서 받은 사랑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며,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이룬 일을 나 혼자의 성취로 포장합니다. 그렇게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순간 선물은 소유물이 되고, 감사는 자랑으로 변하며, 관계는 경쟁의 장이 됩니다.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일입니다. 빛을 향하고 있던 얼굴을 돌려 자기 그림자만을 바라보는 일이며, 사랑의 근원에서 멀어져 자신 안에 갇히는 일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돌아선 사람은 더 많이 가지면 충만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질수록 더 큰 결핍을 느끼고, 인정받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지만 인정받을수록 더 깊은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도 자기 욕망만을 봅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관계를 맺어도 내가 얼마나 인정받고 사랑받는지를 계산하며, 기도를 하면서도 하느님의 얼굴보다 나의 소원과 상처와 요구를 더 오래 바라봅니다.
오직 가난만이 우리를 이 자기 걱정의 감옥에서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가난은 내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내 상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상처도 함께 볼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열어 줍니다. 가난은 내가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하며,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신비 앞에 머물 수 있게 합니다.
가난한 기도는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라는 말에서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라는 고백으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당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저를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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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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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8 01:58
- 감히 애인으로 초대된 우리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나라의 슬기로움에 대해 비유로 가르침을 받는데
어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이고 오늘은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둘 다 하늘나라의 슬기로움이지만
종의 슬기로움보단 처녀의 슬기로움이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종은 의무를 다하는 슬기로움이지만 처녀는 사랑의 슬기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다 필요 없습니다.
충실할 필요도 없습니다.
깨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하면 충실함도 저절로이고 깨어 있음도 저절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불충실할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깨어 있어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
제가 너무 자신만만한 소리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저는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깨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것만큼 그러합니다.
딴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때도 그러하고,
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때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충실치 않다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어제 종의 슬기로움을 얘기한 다음
오늘 처녀의 슬기로움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의무를 다하는 종에서 사랑하는 신부/애인으로 신분 상승할 기회를 주심이고,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짝이 되는 신성(神性)에의 초대입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내가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개를 내 사랑의 짝으로 삼는 것이잖습니까?
개의 사랑을 받길 원하는 것도 개를 내 사랑의 짝으로 삼는 것인 것처럼.
하느님께선 우릴 당신 사랑의 짝으로 삼고 슬기로운 처녀가 되라고 초대하시고
우린 애인이 되어 달라고 초대받은 신부들인데 어쩌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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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28. 05:16
깨어 의식하는 삶을 위해~~~
오늘의 복음 말씀은 "깨어 있음"과 "경계심"에 관한 것인데, 이는 모든 영성의 핵심 요소입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을 때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잠결에 걷는다면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며, 심지어 창문을 넘어 죽음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깨어 있는 삶도 일종의 잠든 상태라면 어떻게 될까요? '내' 분노와 두려움, 끝없는 욕망이 마치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아무도 다스리지 못한 채 움직이고 있다면 말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의 버튼을 누르면 곧바로 분노가 터지고, 다른 버튼을 누르면 두려움에 움츠러들며, 광고 하나만 보여주어도 필요 없는 물건을 사버립니다. 나는 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면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반응만 하며 살아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들려 주고자 하시는 핵심점은 단순히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삶만 살지 말고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의식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이 현실 안에서 사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정한 현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암울해 보인다 하더라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런데 이 비유를 들으면서 비유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좀 야속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요.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기름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면 되었을 것을...'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 깨어 있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조언을 얻기 위해 찾아가겠습니까?!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운 이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형제적 사랑이나 자비를 나누는 데에는 닫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이 비유의 핵심을 찾는다면 그것은 다리를 헛짚은 셈이 될 것입니다.
사실 언젠가도 언급해 드렸듯이, 비유(parable)는 우화(allegory)처럼 이야기 전체에 적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핵심을 전합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바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다리를 헛짚은 셈'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비유를 근거로 "자기 잘못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유의 전체 의미는 마지막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곧,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슬기로운 처녀들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기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합니다. '내가 이제더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그 길은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기름이 모든 액체 위에 뜨듯이 말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12장 31절, 즉 12장의 마지막절에서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13장에서 그 유명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를 노래합니다.
참 아름다운 해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비유를 현실로 옮겨와 적용해 본다면, 그 기름이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있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이 나누어 달라던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기름을 무엇으로 해석하든...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필수적인 삶의 요소라면 우리는 그것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시는 핵심점입니다.
"깨어 의식하는 삶!" 바로 그것이겠지요!
일상 안에서 깨어 의식하여 사랑의 주님을 만나고, 깨어 의식하여 사랑하며, 깨어 의식하여 은총을 감지하고, 깨어 의식하여 그 은총에 감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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