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1. 큐티
마태복음 21:18 ~ 22
무화과 나무가 마르다
관찰 :
1) 시장하셨던 주님
-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 베나니에서 하루를 유하신 주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아침에 일찍 들어오셨습니다. 여전히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길을 외롭게 가시는 여정이셨습니다. 주님은 그 와중에 시장하기까지 하셨습니다.
2)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신 주님
-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유월절에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나 잎사귀와 열매를 같이 맺는 속성을 지닌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만 무성함으로 열매는 없는 나무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무 의미 없이 어쩌다보니 시장하셨고, 그랬기에 무화과나무를 보셨고, 열매가 없어서 화가 나셨고,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버렸고, 우리 역시 열매 없는 신앙은 주님의 버린 바가 될 수 있다는 이런 도식은 매우 잘 못된 해석으로 가는 도식이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을 감시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끄나풀들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교훈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소용이 없듯이 종교적인 껍데기는 무성하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종교성에 대해서 주님은 교훈을 주고자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24:32에서 주님은 다시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이 때 말라버린 이 무화과나무를 연관해서 이 비유를 이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인자가 가까이 오는 때를 무화과나무가 변화하는 것을 통해서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아는 것처럼 알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이 때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는 곧 말랐지만 또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회복하시는 것을 통하여 주님이 가까이 온 줄을 알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영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그 종교지도자들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했기에 망할 것을 명하시고,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듯이 이스라엘이 망해버리지만, 이것도 주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예언하게 하심이 세계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자 하심이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이 천국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심이 주님의 의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시기가 가까우면 주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고 그 사명을 회복하게 될 것을 통하여 일하실 것임을 또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3) 무화과나무로 인한 제자들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
- 20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 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을 소중히 여기셨고 쉽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전히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서 성큼성큼 다가서시는 중이시지만 너무 친절하게 제자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욱 처연합니다.
-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제자들은 표면적인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고,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 주님은 이것을 믿음과 기도로 풀어주시고 제자들에게 교훈을 허락해 주신것입니다.
-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으면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다.” => 주님이 가르치시는 이 산은 예루살렘이 속한 곳입니다. 굉장히 큰 의미이고, 단순한 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안목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를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기도의 권능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마저도 조정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것도 응답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마당에 개인의 소소한 간구들에 대하여 이렇게 커다란 스케일로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구속사에 대한 큰 그림 속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간구하고, 그 간구함으로 주님이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열매 없는 종교를 상징합니다. 주님이 이것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주는데, 잎만 무성한 종교 행태에 대해서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잎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곧 말라버리는 것처럼 열매 없는 신앙에 대해서 주님은 가차없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무화과나무가 물이 오르고 잎사귀가 무성해지면 여름이 되고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때가 되듯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를 분변하여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신앙이 회복되어 잎만 무성한 것이 아닌 열매 맺는 참 신앙으로 돌아오는 때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다가오는 때인 것을 같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또다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어야 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 여기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기도는 이 산, 즉 예루살렘이 속한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있는 산이 들려서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을 수 없는 상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럴지라도 될 것이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약과는 완전히 다른 새 판을 짜고 계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부대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그럴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다 받는 기도의 스케일은 개인의 어떤 필요를 의미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개인과 가족과 민족을 넘어서는 열방을 향하신 주님의 구원의 경륜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크기의 기도의 제목들을 주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장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으실 주님다운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답입니다. 이 기도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 의미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적용 :
1) 열매 없는 신앙은 주님이 싫어하시는 바, 인정하시지 않는 바입니다. 열매, 곧 생명을 낳아야 하고, 사랑을 맺어가야 합니다. 종교적 위선으로 잎사귀만 잔뜩 매달리는 신앙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가 열매 맺는 신앙의 모습이 될 것인가? 주님의 인격을 닮는 것이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주님이 제자들과 개개인들을 대하시는 태도를 닮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의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사소한 질문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스케일을 설명해 주시고, 제자들이 드려야하는 기도의 막중함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가 깨닫는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주님이 내게 맡겨준 사람들에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 성실하게 답하고 증거하는 모습이 내가 맺어가야 하는 열매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나의 인격을 죽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이 열매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2) 기도에 대해서 그 스케일이 주님의 구속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것임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개인의 기도의 응답도 받아야 하겠지만, 예루살렘이 속한 이 산도 들려서 바다에 던져지라 해도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주님께 올려야할 기도의 중차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긴박한 상황, 열방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중보의 기도의 크기를 절감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한국 문화가 K 컬쳐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음악, 영화, 드라마 등등의 영역으로 퍼지고 있다가 이제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들어쓰시려 하심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민족을 사용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부합한 우리 나라 우리 민족 되기를 소원합니다. 열매 맺는 우리 민족 되길 간구드립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감사 또 감사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