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안 재 성(전주시 완산구 팔달로)
하늘이 청명하다. 신선한 바람에 마음이 들뜬다. 타박타박 봄기운 만개한 한옥마을을 걷는다. 어스름한 기와지붕 넘어 슬며시 비치는 뭉게구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푸르른 하늘과 뽀얀 뭉게구름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일부러 기와지붕을 어스름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우연인지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어스레한 기와와 새맑은 하늘, 새하얀 구름의 조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걸음을 멈추고 지긋이 기와지붕을 바라본다. 어두운 청색 빛이 감도는 단단한 기풍이 고즈넉하다.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이다. 바람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푸른 하늘빛 사이 속내를 드러낸 뽀얀 구름이 아기자기 사랑스럽다. 구름 맺은 하늘이 기와를 품는다. 기와지붕 넘어 물결처럼 넘실대는 뭉게구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따스한 햇살이 지붕을 타고 흘러 온기를 전한다. 선선한 바람이 대들보를 적신다. 조화롭다. 사람이 만든 집과 자연이 맺은 하늘이 조화(調和)를 이룰 때 봄날의 한옥마을에는 절경이 펼쳐진다.
설렌다. 한옥마을을 걷는 걸음이 빨라진다. 아기자기한 한지 소품이 보인다.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난다. 전주를 담아낸 합죽선이 여유를 더한다. 매주 색다른 연극이 공연되는 소극장이 자리한다. 경기전 광장에선 버스킹이 한창이다. 최명희 문학관에서 글이 전하는 깊은 울림을 느낀다. 동학혁명 기념관에서 나라를 위한 민중의 열망에 찬사를 보낸다. 남부시장식 콩나물 국밥으로 요기를 하고, 전통 찻집에서 향긋한 온기를 머금는다. 이곳저곳 사람들의 웃음에 행복이 담긴다. 한옥마을을 걸으며 모두가 크게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건, 한옥마을 곳곳에 담긴 조화(調和) 때문이다.
조화(調和). 오래전부터 전주는 사람과 예술과 음식이 조화롭게 버무려진 고을이었다. 어느 하나 독단적인 고집을 내세운 건 없었다. 우리가 비빔밥을 전주 대표 음식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맛과 개성을 지닌다. 진안과 장수에서 올라오는 임산물, 부안과 군산에서 전해지는 해산물, 김제에서 오는 곡물과 전주에서 발효되는 각종 장과 양념들. 하나하나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지만 여러 고을에 둘러싸인 전주는 각지에서 전해지는 음식마저 조화를 염두에 두어 조리하였다. 저마다의 개성을 지키면서 함께 어우러질 때 더 맛있어지는 방법. 재료의 음양 기운을 맞추고, 궁합을 고려하였다. 얹어지는 고명 하나에도 식감과 빛깔을 고민하였다. 건강한 조리법은 물론 먹는 사람의 마음까지 배려하여 모든 것이 어우러지게 만든 음식이 바로 비빔밥인 것이다. 전주비빔밥 맛의 비결 역시 조화였다.
놋그릇에 정성스레 담긴 비빔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전주의 어우러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풍남제와 대사습놀이가 열릴 때면 전통 문화의 숨결로 몸과 마음이 풍류를 탄다. 들려오는 판소리는 가슴을 호쾌하게 열어준다. 조선시대 민초의 고된 삶도 이렇게 판소리 한자락으로 시원스레 날려내지 않았을까.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음악의 다양성을 쉽고 편안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굳이 먼 나라를 여행하지 않고도 내 고장에서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다. 국제 영화제로 시내가 떠들썩해질 때면 들뜬 발걸음으로 행사장을 찾는다. 영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히고 생각의 폭을 확장할 수 있는 호기다. 한지문화축제가 열릴 때면 전통문화의 전당을 찾아 소박하지만 신비하고 기품 있는 한지의 매력에 담뿍 취한다. 무엇보다 독서대전이 열릴 때면 존경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눈앞에서 들을 수 있어 눈, 귀, 마음이 호강한다. 어디서든 소극장 연극을 관람할 수 있고, 저렴한 가격에 맛 좋은 음식을 쉽게 먹을 수 있다. 객리단길에는 개성 있는 다국적 음식점과 주점이 들어서있고, 신시가지에는 젊음의 활기가 타오른다. 곳곳마다 짙은 개성이 있으나 함께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여유와 풍류를 더하는 곳, 전주다.
예로부터 전주는 평야가 넓고 자연이 수려하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여유를 품어 마음을 넓히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키울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다양한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넘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의 문화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한옥마을 속에, 비빔밥 속에, 축제 속에 전주의 어울림은 단단히 새겨져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무수한 문화가 물밀듯이 몰려드는 시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강조하며 배려보다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성장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한다. 나를 우선하는 세대의 흐름에서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내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비빔밥처럼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며 함께 어우러져 성장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타인의 가치관을 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경청하고 이해하며 함께 조화를 이룬다면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비빔밥이 맛있는 건 특정한 재료가 많이 들어있어서가 아니다. 전주가 멋스러운 건 어느 하나 뚜렷한 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양한 재료와 문화가 어우러졌기 때문에 맛있고 멋스러운 것이다.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 관계만을 강요하며 모두 비슷해지려 하지 않아도 된다. 개성만을 강조하며 타인과 거리를 둘 필요도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생각을 존중하면 된다.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어우러지며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