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는 피곤한 얼굴로 손목시게를 바라보았다.
밤 11시 30분......
미라는 목 뒤쪽을 손으로 주무르면서 빽빽하게 필기가 되어있는 공책과 참고서를 바라보았다.
"하아...... 너무 피곤하다...."
미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시간은 결국 24시간이다. 그리고, 일정 시간의 수면이 없으면 학습능률은 저하된다. 더군다나 공부는 육체와 정신 모두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작업이었다.
"아직 할게 많은데......"
이번 모의고사에서 반등수가 2등에서 4등으로 내려간 미리에게는 부모님의 질책과 담임선생님의 질책이 전해졌고, 미리 자신도 불안감이 시달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성적이지만, 미리와 미리의 주변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보다 위였다. 언제나....위..더 위...가장 꼭대기만을 원하였다.
미리는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정말...희빈이가 말한대로 될까?"
미리의 절친한 친구이면서 미리와 반등수를 다투는 희빈이는 미리를 자신의 선의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미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언제나 서로에게 버팀대가 되주면서 서로의 위를 노렸다.
그런데, 이번 시험에서 희빈이는 성적이 올라서 1등을 한 것이다. 미리는 충격을 먹었다. 언제나 대등한 실력이던 희빈이가 자신과 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비록 그 차이라는 것이 겨우 몇 점 차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희빈이는 미리에게 '이것'을 건네주었다.
-이걸 써봐. 사촌누나가 권해서 써본건데, 정말 끝내주는 물건이야. 너도 한번 써봐.
미리는 희빈이가 준 종이쪽지를 펼쳤다. 그 종이쪽지에는 전화번호가 한 개 적혀 있었다. 미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승고야~!"
승고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보던 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들었다. 청바지에 청재킷에, 흰 티를 입은 여학생이 그에게 달려왔다.
승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정작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미소를 지워버렸다.
"무슨 일이야, 혜란아?"
승고와 같은 학과의 동기인 혜란은 급히 승고의 손을 잡아서 끌었다.
"어, 어, 뭐하는거야?"
"어서! 어서 와, 승고야! 지금 축구시합 한단 말이야! 과 전체 점심내기라고!"
혜란은 막무가내로 승고를 끌어당겼고, 승고는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서 움직였다.
버티려고 하거나 뿌리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지만, 과 전체 밥 내기인데 안 갔다가는 나중에 동기들에게 받을 그 무시무시한 원한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승고였다.
게다가 상승무예(上乘武藝)를 익힌 승고에게 일반인들의 축구시합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승고는 자신을 끌고 달려가는 혜란의 뒷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박승고.
한민족 비전 수호집단 천부(天府)의 제 155대 제자로서 상승의 무공과 뛰어난 주술의 소유자.
........라고 이력서에 썼다가는 당장에 하얀벽돌집(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신 속에서 무공이나 주술만 배웠다가는 절대로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박승고의 스승인 천부주(天府主) 효월노옹(曉月老翁)은 속세(俗世)의 자신의 친우들과 수하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일찍부터 승고를 도시에서 교육시키고, 살게 해주었다.
그래서 지금 승고는 대구교육대학교(大邱敎育大學校)의 윤리과에 재학 중이었다.
왜 하필 교육대학교냐고 묻는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차피 승고는 정상적인 직업으로 살아가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이 학교생활은 일종의 휴가였다. 평생동안 받을 모든 휴가를 한번에 가불 받은 휴가.....
학교를 졸업하면 승고에게는 오로지 마(魔)와의 처절한 혈전(血戰)만이 있을 것이고, 평범한 일상의 행복은 없게 된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효월노옹은 자신의 제자들이 젊을 때만이라도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나에게남은 시간은...4년.....'
승고가 졸업하면 그는 박승고라는 이름을 버리고, 그저 무명(無名)의 천부호법(天府護法)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릴 적에는 많이 괴로웠다.
온갖 사고를 저지르고, 방탕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 이어진 천부의 의무는 결국 그가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거나 슬프지는 않다. 내가 지닌 의무를 알았고, 그로 인하여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을 알기에.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