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777) - 세상을 흔든 퍼레이드와 가슴을 울리는 선율
예년보다 더울 것이라는 예보인데도 코로나 위기가 냉기류를 몰고 온 탓인지 대서(大暑)를 코앞에 둔 여름나기가 견딜만하고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는 곡식과 과일의 성장이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계절 따라 방긋 웃는 꽃들이 반가워라.

산책길에 마주친 무궁화, 우리나라 꽃
어제(7월 20일)로 코로나19 국내발생 6개월, 알게 모르게 생활습관과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매일 한두 시간 들판과 천변 길 산책하고 신문, 잡지, 책읽기와 TV시청 등 단조로운 되풀이가 주요일과다. 그런중에 접한 책과 잡지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1. 세상을 흔든 왕들의 퍼레이드
지난주 도서관에서 빌린 ‘역사가 기억하는 세계 100대 제왕’(퉁지아위 편저, 꾸벅)이라는 책을 흥미 있게 읽었다. 사학자들은 역사의 진전을 부족장통치(신화시대) - 왕정통치(고대) - 봉건통치(중세) - 민주정치(근대)의 도식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연대로는 역사의 90%이상이 왕들의 통치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외여행 중 살핀 중국의 자금성과 병마용,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신전 등에서 무수한 인력과 막대한 재정이 왕의 절대권력 유지와 끝을 모르는 탐욕으로 강제 동원되었으나 그 종말은 허망한 쇠락과 덧없는 꿈으로 귀결되었음을 새겼다. 나는 왕들의 전횡과 탐욕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편이지만 만약 그와 같은 압제와 포악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이를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전율하면서 느긋하게 수천 년 인류 역사를 관조할 수 있는 오늘에 살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문명사에 등장한 왕들의 숫자는 부지기수, 그 가운데 흥망성쇠와 파란만장의 인류역사에 큰 획을 남긴 걸출한 인물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이 뜻깊다. 징키스칸은 지축을 흔들고 빅토리아는 해가 지지 않는 영화를 누렸어라. 책의 뒤표지에 실린 글, ‘이 책은 100인의 제왕을 소재로 오천년 인류문명사를 정리했다. 한순간 빛난 고대 이집트 문명부터 유구한 중화의 역사까지, 기원 전 삼천 년 경의 메네스부터 20세기의 이븐 사우드까지 각 문명의 찬란함과 암울한 문명교체기를 전면에 펼쳐 보였다. 제왕은 문명사의 독특한 풍경이다. 제왕의 이야기는 역사 발전의 축소판이다. 이 책은 전쟁의 참모습과 제왕의 슬기를 재현했다. 역사가 가져온 감동과 역량을 체험하며 고독한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왕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할까, 보헤미아의 왕이자 독일 국왕이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프라하를 세우기도 한)가 후예에게 토로한 심경에서 힌트를 얻는다. ‘내가 죽은 후 당신들도 왕관을 쓰고 통치할 것이다. 당신들 보다 먼저 군림했던 나도 먼지와 흙으로 돌아갔음을 생각하라. 들판의 꽃들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당신들의 결말도 삽시간에 사리질 것이다.’
기라성 같은 왕들의 위엄과 호사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지만 그 결말은 허망하고 씁쓸함에서 위안을 얻으면 좋으리라.

2. 가슴을 적시는 선율, 무궁화 우리나라 꽃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는 여러 신문과 주간, 월간지들이 비치되어 있어서 하루 한두 시간씩 이를 훑어보는 묘미가 있다. 지난주에는 월간조선(7월호)의 탐사보도, ‘동요, 우리나라 꽃의 작곡가 함이영’을 감명 깊게 읽었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함이영 작곡, 박종오 작사)이 누구의 작품인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 탐사보도를 보면서 그 사연이 뭉클하고 기사 중 인용한 시인 김구용의 수필이 마음에 닿는다. 김구용(1922~2001) 시인은 대학시절 교양국어 담당교수, 구수한 입담과 해박한 중국 고전의 해설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는 은사여서 더 반가운 글이다. 김구용은 함이영(1915~1957)이 사망한 1957년 무렵, 숙명여고 강사로 출강하며 음악교사 함이용을 알게 되었다. 탐사보도에서 인용한 김구용의 수필 ‘돈가스와 가을과 바이올린’부터 살펴보자.
‘방학이 끝났으나 나는 시간강사였으므로 S여고에 나가지 않은 어느 날 오후 다방에서 신문을 읽다가 함이영 선생의 부고를 보았다. 어느 분일까? 필시 알만한 분일 텐데 세상을 떠난 분의 성명을 보고도 모르니 자못 죄송스러웠다. 늦게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시인 K씨가 다방에 나왔기에 ’돌아가신 함 선생이 누구시지요?’ 하고 물었다. ‘그 작곡하시는 음악 선생님을 모르십니까?’ 이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지난봄 S여고에 나가게 된지 얼마 후 그분이 작곡가란 것을 들어 알았고 쉽게 친해졌던 만큼 새삼스레 성명을 묻기도 실례일 것 같아 그 후 그냥 선생님으로 부르며 지내왔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다 신발 싣는 곳에서 함 선생을 만나 ‘점심 잡수러 가십니까?’하고 물으니 함 선생은 ‘싸고 맛있는 곳을 소개해 드릴 테니 같이 갑시다.’하며 중앙청이 보이는 큰길 건너 어느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2백 환짜리 돈가스가 번화가의 3백 5십 환짜리 못지않게 훌륭하였다. 그날 함 선생은 식사를 하며 ‘김 선생의 시는 딱딱하여 작곡하기 어렵군요. 적당한 것 있거든 한 번 보여주시오.’ 그 후 나는 그 음식점에서 함 선생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같이 다방에 들어가 담소를 나누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함 선생과 마지막이었다. 방학 동안 시골에 가 있다가 서울에 올라온 나는 함선생과 그 집에서 자주 식사할 것을 생각하며 이번에는 오랜 만에 만나게 되니 내가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직 만나기도 전에 함 선생의 부고를 신문에서 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장례 후 학교에 간 어느 날 세상을 떠난 함 선생을 생각하며 점심시간에 K시인과 함께 그 음식점에 갔다. 함 선생의 장례식에 갔었다는 K 시인의 말, “함 선생은 딸 여섯에 아들이 하납니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날 이발하고 피아노 배우러 온 학생들 지도까지 하였는데 갑자기 혈압관계로 세상을 떠나셨다더군요. 큰딸이 지금 우리학교에 다니는데 영결식 때 그 딸이 떠나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나라에서 예술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 작곡가 함이영 선생, 좀 더 세월이 흐른 후 조용히 함 선생의 딸에게 간청하여 그 아버지가 남기신 곡을 바이올린으로 들어보기로 하자.’
한국 동요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함이영 작곡가, 대한민국 국화인 무궁화를 강렬하고 명료한 노래로 남긴 그의 '무궁화 우리나라 꽃'은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작곡한 두 학교의 교가 외 다른 작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탐사보도에는 1957년 42세를 일기로 떠난 함이영 작곡가의 부인(최구자, 당시 39세)이 6녀1남의 자녀들을 혼자서 잘 양육하여 큰딸은 KBS 교향악단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로 수십 년 재직한 후 정년퇴임하는 등 네 딸이 음악을 전공하였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세상은 이처럼 미처 모르는 사연과 공로를 남긴 수많은 인물들이 소리 없이 오가는 터, 우리 모두 그 중의 하나가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