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
이 정 식
오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들어있는 가정의 달이다. 세속의 모든 국민의식 수준이 가정교육에서 비롯된다며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소리가 높아만 지고 있다. 학생 인권문제, 집단 따돌림과 폭행으로 청소년자살 문제까지 나오면 하교와 가르치는 선생부터 여론의 뭇매를 맞고 가정교육을 들먹인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교직에 오래 동안 몸담아온 나의마음은 괴롭기만 했다. 한평생을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나이지만 뾰족한 지혜도 없으려니와 우선 내 자식 부터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나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데서 나이가 꽉 찬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언제 결혼할거냐” 고 했더니 ‘부모님이 손자 봐주신다는 약속을 하신다면 결혼 할거 예요 ’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고 딱 잘라 거절 했다. 딸의 표정이 적잖이 섭섭해 보였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한 번 못 박아 두었던 일이 있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이 있다. 그만큼 자식에 대한 부모사랑은 아주 유별나고 맹목적 이여서 처음부터 자립심을 길러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 사람들의 가정풍속은 어린 아이가 엎어지면 스스로 일어설 때를 기다린다한다. 우리나라 어린이는 넘어지면 뒤를 돌아다보고 누가 일으켜 줄까하고 울기부터 한다. 작은 일이지만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려서 부터 자립의지와 개척정신을 심어 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세게 최강대국인 미 국민의 개척정신은 국민의식 저변에 흐르는 내리사랑의 근본 의식이 우리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어려서 부터 부모가 모든 것을 다해주니 성인이 되여서도 혼자 능히 할 수 있는 일도 부모에게 의지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캥거루 새끼 기르듯 살아가다보니 사회적으로 독립을 해도 여전이 부모 그늘 밑을 벗어나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도 부모에게 기대여 육아문제까지 떠넘기고 김장은 물론 고추장 된장까지 부모 집에서 퍼간다. 예부터 ‘출가외인’ 이라했지만 출산은 왜 친정에 와서 하는지…….
막상 손자가 태어나 그녀석이 방글거리며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앙증맞은 손으로 내손을 잡고 품에 안겨 옹알거리다가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이 드는 것을 보니 출가 전 그렇게는 못한다던 나의 야무진 결심은 흔들리고 말았다.
주말이 되여 탁아소에 맡겼다던 손자가 온다기에 방안에 손 다을만한 곳은 대충 정리했지만 할머니 화장대와 문갑은 미처 손이 가지 못했다. 손자가 오자 제일먼저 수난을 당하는 것이 화장대였다. 한번은 손자가 집어던진 크림 병에 아내의 이마에 맞았다. 얻어맞은 아내는 이마가 터져 피가 흘렀지만 피를 닦으면서도 손자가 귀여워 좋아라고 웃어댄다. 아내의 그 모습에서 할머니의 무한한 손자 내리사랑이 머무는 것을 느꼈다.
또 손자가 유치원을 다닐 때 일이다. 공교롭게 친손자와 외손자가 한 유치원을 다니고 함께 유치원 차를 타고 오는 것을 늘 아내가 받았다. 그러다 어떤 때는 내가 손자를 받기도 했다. 손자들은 유치원 차에서 내리자마자 짊어진 가방을 길바닥에 벗어던지고 슈퍼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간다. 나는 벗어던진 가방을 주워들고 손자를 따라 뛰었다. 슈퍼로 달려간 손자 둘은 제각각 과자를 양손에 들고 집을 향해 달리면 나는 과자 값을 치르고 집으로 간 손자를 따라 허겁지겁 쫓아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이것을 본 동네이웃들은 재미있다고 웃어댄다.
저녁이 되여 딸과 며느리가 와서 한바탕 법석 을 치고 훌쩍 가버리면 집안은 쓸쓸한 적막이 흐르는 것이 외로움만을 더 느끼게 할 뿐이다. 지금은 그때의 손자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였다. 그 시절은 맞벌이를 위한 보육시설이 미흡한 탓도 있겠지만 부모님이 무엇이던지 해주겠지 하는 자식들의 당연한기대감도 이런 현상을 낳고 있다는 생각이든 다.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평생을 먹고 살게 한다던 나의 꿈은 부서지고 고기를 잡아 한 끼를 배불리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9988이란 말이 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다보니 노후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친구들 사이에서 당연한 이슈가 되고 있다. 은퇴 후에 손자를 봐주면서 보내는 것이 과연 진정한 자식사랑일까. 세상이 모두 핵가족시대가 된 만큼 자식들도 부모 곁을 떠나 살기를 원하고 부모도 능력만 있다면 자식 집에 얹혀 살기를 바라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이제는 대대로 이어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피할 수 없는 ‘강제노동’에서 과감히 벗어나야할 때가 아닌가. 여행, 취미생활, 등산, 운동 등……. 나이 들어가는 아내와 같이 즐기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손자나 보면서 황금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못한다. 절대로 못한다 하면서도 당하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을……
가정문화가 새로워질 만큼 핵가족화 되고 있는 것이 오래되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그 가정에 내리사랑의 우물이 끝이지 않고 있음이다. 가족의정(情)이라는 두레박으로 우물을 계속 퍼 올리며 살아야하는 것이 부모마음이니 샘솟는 내리사랑은 마르지 않을 것이리라.
내리사랑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타고난 것이려니, 그것이 심화될수록 부모에게 효하고 공경하는 치사랑은 어찌 희박해가는 것일까. 효의 도덕적 문화가 인간만이 가지는 존엄한 가치라고 강조하여도 요즈음 젊은이는 하나같이 고개부터 돌린다.
어렵고 힘들어도 가정마다 아름다운 치사랑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지만 핵가족 시대에 그런 꿈은 점점 어려워질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만 든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을 보내며 어제나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함께하는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문화가 성숙 될 런지…….
첫댓글 "어렵고 힘들어도 가정마다 아름다운 치사랑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지만 핵가족 시대에 그런 꿈은 점점 어려워질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만 든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을 보내며 어제나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함께하는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문화가 성숙 될 런지……."
동감입니다. 선생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이 들어가는 아내와 같이 즐기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손자나 보면서 황금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못한다. 절대로 못한다 하면서도 당하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을……'
손자들을 키워주느냐 마느냐가 요즘 저의 친구들간에 만나면 오가는 핵심화제랍니다.
불과 몇년후면 저에게도 닥칠 고민거리입니다. 공감하면서 천천히 감상 잘 하고 갑니다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현실적인 실감나는 글속에 잠시 빠졌다 갑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가정마다 아름다운 치사랑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지만 핵가족 시대에 그런 꿈은 점점 어려워질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만 든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을 보내며 어제나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함께하는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문화가 성숙 될 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