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해균 선장이 눈을 떴습니다. 설날 아침에. 간절하게 회복을 비는 가족들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애절한 심경을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병실 벽에 걸린 ‘석해균 선장님, 이곳은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국민의 염원이 담긴 현수막을 보고. “왜 웃으세요?” “좋아서….” 지난달 15일 인도양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 6일 만에 구출작전에 성공한 청해부대 최영함 부대원들의 전과는 온 국민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습니다. 반면 작전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석 선장의 기지와 용기는 뒤늦게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온 몸에 총격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가 눈을 떴을 때 국민의 가슴 속은 안도와 쾌유를 비는 ‘하나 된 마음’이었습니다.
청해부대의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 ‘아덴만의 여명’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준 쾌거였습니다. 1월 21일 새벽 여명을 틈타 최영함과 헬기의 엄호사격 아래 은밀히 UDT 대원들이 접근하는 순간을 전후로 석 선장은 “지그재그로 운항을 하라” “기름에 물을 섞어라” “엔진을 정지시켜라”는 메시지를 선원들에게 전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군사작전이 시작되자 해적들은 선원들을 칼로 위협하고 병으로 때리고 이를 부러뜨리는가 하면 총알받이로 선교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생사가 엇갈리는 극도의 긴장과 공포 속에서 작전을 유리하게 전개하도록 지혜를 짜내고 실행에 옮긴 석 선장과 선원들의 행동은 한 마디로 용기의 결정(結晶)입니다. 군도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줄탁이란 말이 있습니다. 닭이 알을 깔 때 껍질 속의 병아리가 우는 소리를 줄,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드리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안팎의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 같은 경우를 줄탁동시라고도 씁니다. ‘아덴만의 여명’은 줄탁동시의 걸작이었습니다.
줄탁의 지혜는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지난해 8월 5일 갱도가 무너져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여m 갱도에 갇힌 산호세 광산. 습도 90%, 섭씨 32도가 넘는 찜통더위 속에 불안과 공포와 절망을 겪어야 했던 광부들. 칠레 정부의 구출작업이 시작되자 현장에는 생환을 비는 가족들과 작업 관계자, 취재진 등 1천 여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65일 만인 10월 9일, 세계 각지의 첨단 천공기술을 지원받아 드디어 622m의 구조용 갱도 굴착에 성공했습니다. 구출 수단은 지름 71cm 짜리 캡슐 하나 뿐. 69일 만에 암흑 속에서 광명천지로 나온 광부들은 국민의 염원에 감동했고, 지구촌의 인류 모두가 그들의 생환 드라마에 탄성을 올렸습니다.
대통령까지 팔을 걷고 나선 정부의 구출 의지와 광부들의 믿음이 새로운 인생을 누리게 한 관건이었습니다. 작년 2월 지진과 쓰나미가 덮쳐 수백 명이 숨지고 200만이 넘는 이재민이 생겨 칠레의 민심은 뒤숭숭하기 짝이 없고 정부를 불신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산호세 광산의 광부 구출드라마는 국민이 단결하고 민심을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사 작전이나 재난 구조에만 줄탁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칠레 광부들이 참사를 당했던 하루 전날 미국의 억만장자 40명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래리 앨리슨(오라클 창업자), 마이클 블룸버그(뉴욕시장), 조지 루커스(영화감독), 데이비드 록펠러(록펠러 가문 후손), 테드 터너(CNN 창업자)들입니다.
목표 금액은 6,000억 달러. 한국 국민총생산(GDP)의 70%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기부운동 선언 6주 동안 40명이 서약한 기부금액은 1,250억 달러로 페루의 GDP규모였습니다. 이들이 낸 돈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문맹과 질병과 기아의 퇴치, 생태와 환경 개선, 평화와 안전을 위한 정책개발 등에 쓰일 것입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상생하는 길입니다.
왜곡된 줄탁도 많습니다. 빨리 올리고 늦게 내리는 유류와 통신요금 담합, 이권단체들의 국회 후원금 로비, 경찰 고위층의 함바 농락, 조폭들의 환각제 밀수…. 목적이 일그러진 야합은 성원도 박수도 받을 수 없습니다. 차가운 멸시와 비난, 그리고 철창행이 고작입니다.
봄의 문턱에 서서 더욱 가슴 뭉클한 줄탁의 드라마를 기다려 봅니다. 그래야 눈을 뜬 지 하루 만에 다시 긴 잠에 빠진 석 선장이 하루 빨리 회생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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