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저주'라 불리는 왕: 잔혹함에 관한 오해
이따금 훈족 왕 아틸라 간은 역사상 유명한 지도자와 직접 만나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것은 타임머신을 발명한다거나 죽어서 내세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만남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그와 직접 만났던 사람이 기록해 놓은 이야기가 다행히 남아 있다.
아틸라(406--453)는 434 년 훈족(흑해, 카스피 해 북방에 살면서 4--5세기경 유럽을 휩쓸었던 야만족이며 흉노족,
스키타이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주)의 왕위에 올라 19 년 동안 통치했던 사람이다.
그의 영토는 현재의 네덜란드, 독일, 동유럽, 러시아를 망라했다.
그는 당시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터키, 그리스와 서로마 제국에 속했던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원정을 나갔다.
당시 이틸라의 공격을 피해 아드라아 해의 개펄 지역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이 만든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 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로마 제국조차 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상당 기간에 걸쳐 매년 700 파운드의 금을 이들에게 공물로 바칠 정도였다.
이런 모든 일 때문에 아틸라에게는 '신의 저주'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는 매우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의 비위는 거슬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둥에 묶어 창으로 무자비하게 찔러 죽이는 책형을 가했다.
훈족의 잔인함은 초기 스키타인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485--430)가 쓴 내용에 의하면
스키타이인들은 적의 목을 자르면, 그 두 개골의 살점을 떼어내고 끈으로 묶은 뒤 안에 금을 발라 물컵으로 이용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들은 또 희생자들의 피부 가죽을 벗겨 옷과 망토를 만들고 심지어 쿠션까지 만들었다.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스키타이 병사들은 적병의 머릿가죽을 벗겨내고 살점을 떼어낸 뒤 양손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들어서
냅킨으로 쓸 정도로 잔인했다. 이들은 이런 머릿가죽 냅킨을 자랑스럽게 말고삐 근처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냅킨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존경을 받았다. 때로는 이 가죽을 전부 바느질로 이어 붙여 외투를 만들어 입는 사람들도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이들이 적을 처음 죽이면 그자의 피를 빼내 직접 마시고, 약속을 하거나 동맹을 맺을 때에도
이 피를 술과 섞어 건배용으로 이용하곤 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런 피와 술 혼합물에다 화살, 칼, 창을 적셔
용기를 북돋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해마다 부족 사람들이 한데 모일 때, 지난 일 년 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사람은 불명예스럽게 생각되었다. 이들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448 년 아틸라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고트족(3--5세기경 로마 제국에 침공했던 튜턴게계의 야만족: 역주) 사람 파니움 프리스쿠스가
동로마 제국 대사 두명과 함께 아틸라 왕을 만나러 갔던 적이 있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여행기로 남겼는데,
원본은 분실됐지만 6세기경 조르데인이라는 사람이 쓴 "고트족의 역사"라는 책에 그 내용 중 일부가 실려있다.
아틸라의 외모에 대해 프리스쿠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군대는 50 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온 세계를 뒤흔들 운명을 타고난 자였으며,
모든 나라에 재앙을 가져다주는 자였다. 그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문은 온 세상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으며 걸음걸이도 아주 오만했다. 몸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가 지닌 강력하고 오만한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전쟁광이었지만, 행동에 절도가 있었고 강력한 설득력도 지니고 있었다.
또 자신의 보호하에 들어온 추종자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키는 왜소했지만 가슴이 떡 벌어졌고 머리도 컸다. 눈은 작고 수염이 그리 많이 나지 않았으며 드문드문 흰 수염이
섞여 있었다. 코는 납작했고 안색은 가무잡잡해서 출신 성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프리스쿠스 일행은 다뉴브 강 동쪽 8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던 아탈라의 캠프에 도착했다.
아틸라와의 첫 만남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노라니까 아틸라의 부하 중 한 명인 스코타스가 아틸라가 우리를 부른다고 통보했다.
부하들이 그의 텐트를 지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아틸라의 모습이 보였다.
옥좌에서 좀 떨어져 기다리다 일행 중 한 명인 맥시무스 대사가 앞으로 나아갔다.
대사는 인사를 마친 뒤 동로마 제국 황제의 친서를 내보이며 황제께서 그와 그의 신하들에게 안부를 전하셨다고 말했다.
아틸라는 로마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라고 비난했다. 그는 일행 중 또 다른 대사인 비길라스에게 노골적으로
후안무치한 짐승 같은 녀석이라고 욕하면서, 자신과 아나톨리우스 황제사이의 조약을 알면서도 그가 그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즉 스키타이를 배반한 도망자들을 모두 자신에게 돌려주지 않는 한 로마의 어떤 사절도 자기에게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길라스가 로마 제국에 있는 시키타이 사람은 이미 다 돌려보냈기 때문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고 대답하자
아틸라는 더욱 화를 내고 더 심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고 생각없는 비길라스의 무례한 발언을
응징하기 위해 외교 의례상 큰 문제만 없다면 그를 말뚝에 묶어 새 먹이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또 자기가 알기로는 로마인들 중엔 아직도 스키타이의 도망자들이 많이 있으며 자기가 그 명단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신하 중 한 명에게 명단을 큰 소리로 읽도록 시켰다. 읽기가 다 끝나자 그는 비길라스 대사에게 더 이상 소동을 피우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했다. 그러면서 그는 에스라스 라는 신하를 우리 일행에 딸려 보낼 테니, 과거 그의 궁전에 서로마 제국
장군 아이티우스의 아들 카필레온이 볼모로 잡혀왔던 시절부터 로마로 도망친 훈족 사람들을 모두 되돌려보내라고 말했다....
비길라스는 전에 그가 대사로 왔을 적엔 온순하고 부드러웠던 아틸라가 그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어서 깜짝 놀랐다.
(칭기즈 칸은 도성 하나를 점령하면 도성의 모든 사람들을 성밖에 모이도록 명령한 후, 병사들을 시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였다. 병사 한 명이 적어도 오십 명은 죽여야 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죽은 사람들의 귀를 주머니에 가득 채워
상급자에게 가져와야 했다.(월남전에서 미군들도 자신들이 죽인 베트콩 숫자를 과시하기 위해 귀를 수집하는 일이 있었으며,
어떤 병사는 이 귀들을 문에다 못으로 박아 전시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의 미국인들도 인디언들의 머릿가죽을 갖고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 원주) 1221 년 니차푸르란 곳에서는 몽고군이 단 한 시간 만에 무려 1,748,000 명의 인명을 살상한 기록도 있다.
이 수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은 유태인 전체의 숫자를 상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몽고 병사들은 나치스처럼
자신들의 죄악을 은폐하려고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대사 일행은 그 나라의 수도까지 갔고 거기서 아틸라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도는 다뉴브 강에서 훨씬 더 떨어진, 현재 트란실바니아라고 알려진,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강을 몇 개나 건너 수도에 도착했다. 이곳에 있는 아틸라의 거처는 다른 곳에 있는
그의 거처들보다 훨씬 더 눈에 뛴다고 했다. 그의 거처는 매우 윤기나는 목재와 널빤지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멋보다는 안전을 고려한 듯한 나무 말뚝 울타리가 주변에 쳐져 있었다.
왕의 거처 옆에는 스키타이인들의 2인자 오니지시우스의 집이 있었다. 이 집 역시 목재로 지은 집이었지만
아탈라의 집처럼 탑 같은 장식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집 근처엔 파노이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대형 목욕시설도 있었다.
이들 야만인들이 살던 지역엔 나무나 돌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재료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들여와 사용하는 듯했다.
아틸라가 마을로 들어서자 화려한 리넨 옷을 입은 처녀들이 나와 그를 맞이했다. 이들의 옷은 너무 길어서
양 옆에서 다른 여인들이 잡아줘야 했으며 그 밑으로 일고여덟 명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리넨 천 밑의 여자아이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같은 모양의 대열을 여러 개 만들었으며 스키타이 노래를 합창했다.
왕이 오니지시우스의 집까지 왔을 때 오니지시우스의 부인이 하인들을 이끌고 뛰어나와 그에게 예를 갖추고 절을 올렸다.
하인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들고 있었으며 부인은 왕에게 이를 권했다.
절친한 친구 부인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어 아틸라는 말 위에 앉은 채 음식을 먹었다.
수행원들이 음식이 담긴 커다란 은접시를 그에게 올렸다. 술까지 다 마시고 난 후에
그는 다른 집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자신의 거쳐로 갔다.
그날 오후 세시쯤 우리 일행은 아탈라의 만찬에 초대되었다.
나와 서로마 제국 외교사절 일행은 세시경 다시 아틸라를 접견했다.
식탁에 앉기도 전에 그 나라의 관습에 따라 술잔 담당 시종들이 우리에게 잔 하나씩을 주고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다 마시고 나서야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모든 좌석은 방의 양측면 벽을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아틸라는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뒤로 또 하나의 소파가 보였다.
그뒤로 게단 몇 개를 올라가면 그의 침대가 있었다.
침대는 멋진 리넨 천으로 만든 장식용 휘장으로 덮여 있었다.
마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이 결혼 예식 때 쓰는 천 같았다.
아틸라는 손님을 맞이할 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손님은 자신의 오른쪽에 앉히고
다음으로 중요한 손님은 왼쪽에 앉히는 것 같았는데, 우리 일행은 스키타이의 유력자 베리초스라는 사람과 함께
왼쪽에 앉았다. 물론 오니지시우스는 아틸라의 남은 소파 끝 쪽에 앉아 있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인지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 질서 있게 앉아 있는 동안 아틸라의 술잔 담당 시종이 당쟁이덩굴로 만든 나무잔에 술을 한 잔 따라서
아틸라에게 권했다. 그는 즉시 잔을 받아 자기 다음 서열에 있는 사람과 건배를 한 후 들이켰다.
건배를 한 사람은 아틸라가 술을 마시고 시종에게 잔을 건네줄 때까지 황송해 하며 일어나 서 있었다.
손님들도 각자 자기의 술잔을 들고 아틸라에게 경의를 표하며 건배를 한 뒤 천천히 술을 마혔다.
아틸라의 전담 시종이 나가자 다른 시종이 엄격하게 순서를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차례로 술을 권했다.
두 번째 손님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순서가 다 돌아가자 아틸라는 앉아 있는 순서대로
손님 한명 한 명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모든 사람이 건배를 마치자 시종들이 나갔고 식탁이 준비되었다. 아틸라 앞에는 별상이 준비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서너 명당 하나씩 식탁이 준비되었다. 따라서 손님들은 일어날 필요 없이 정해진 자리에서
탁자 위의 음식을 집어먹기만 하면 되었다. 먼저 하인 한 명이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들을 갖고 들어왔다.
다른 하인들은 빵과 요리 등을 식탁에 차렸다. 우리 일행과 훈족 모두에게 나무접시에 풍성한 음식이
가득 담겨 제공되었다. 그러나 아틸라 앞의 나무접시에는 고기만 조금 담겨 있었다.
검소한 음식을 통해 그가 가진 자제력의 일부를 보여주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잔이 제공되었지만 아틸라 자신의 잔은 받침이 달린 나무잔이었다. 그의 의복도 무척 검소했다.
그러나 세탁할 때 이외에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다른 스키타이인들과는 달리 그의 옆구리에 걸려 있는 칼, 구두 버클, 말안장 어디에도 금이나 보석 장식이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접시의 음식을 다 먹자 모두 일어났다. 그리고 앞서와 마찬가지로 아틸라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한 후 그가 다시 술잔을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 앉았다. 그러자 두 번째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들어왔다.
이 음식도 다 먹고 나자 앞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일어나 다시 건배를 하고 앉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횃불이 켜졌고 훈족 두 명이 아틸라 앞으로 나와 전쟁에서의
그의 승리와 용기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손님들은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에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생각하고 침울해져 훌쩍이는 축도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훈족 광대 한 명이 들어와서는 말도 안 되는 온갖 괴이한 이야기들을 지껄였다.
그의 이야기 속엔 단 한마디의 진실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모두가 재미있어했다.
그 다음은 제로콘이라는 무어인 광대의 차례였다. 외모와 복장, 목소리, 말 등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말, 훈족 말, 고트족 말을 뒤섞어서 얘기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다만 아틸라만은 예외였다. 이 무어인 광대는 리바아에 살면서 아르다부리우스의 아들,
아스파르에게 선물로 바쳐진 자였으며 훈족이 트라키아를 침공했을 때 사로잡혀 스키타이 왕들에게 불려온 사람이었다.
아틸라는 이 광대를 몹시 싫어했지만 동생인 블레다가 무척 좋아해서 데려오게 되었다.
블레다는 이 광대가 얘기를 할 때뿐만 아니라 그냥 걷거나 서투른 동작만 해도 무척 좋아했다.
아틸라는 아무런 안색의 변화도 없이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말이나 몸짓 어느 하나로도 즐거운 분위기에 동참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아들인 에르나스가 들어와 옆에 섰을 때 가까이 오게 해서 애정을 담은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아들에게만 한 번 눈길을 주었을 뿐 다른 아이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참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하자, 옆에 앉아 있던 라틴어를 알아듣는 훈족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큰 소리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예언자들이 아틸라에게, 앞으로 그의 가족들이 추방당할 운명이지만
바로 이 아들에 의해서 다시 복위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밤새 만찬에 참석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 그만 자리를 떠났다.
과도한 음주는 훈족을의 폐습 중 하나였다. 또 지나친 마리화나 중독도 문제였다.
헤로도토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이들에게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있었다. 여러 명이 함께 모이면 이들은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불 속에 이 나무 열매를 던져넣었다. 곧 열매가 타면서 냄새가 풍겨나오기 시작하면 이 냄새에 의해
이들은 마치 술을 마신 그리스인들처럼 취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면 이들은 더 많은 열매를 던져 넣었고
점점 더 취해서 뛰기도 하고 춤추며 노래 부르기도 했다.
1994 년 시베라아의 한 지역에서 약 2,000 년쯤 된, 스무 살 먹은 스키타이 왕자와 왕자비의 무덤이
발견된 적이 있다. 이 무덤에서 많은 부장품과 함께 마리화나가 가득 든 용기가 발견되었다. 스키타이인들의 장례식도
그리 유쾌한 볼거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왕이 죽으면 이들은 거대한 정방형 구덩이를 팠다. 시신은 안을 갈라서 깨끗이 닦은 후 거기에 으깬 생강이나 파슬리 씨앗,
아니스 열매 같이 다양한 향이 나는 물질들을 채웠다. 그런 다음 시신을 다시 꿰매고 온 몸을 왁스로 바른 후 무덤으로 가져왔다.
왕의 시신은 마차에 태워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후 스키타이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마련된 매장지로 운반되었다.
왕의 시신은 침상 위에 놓인 채 안치됐으며 무덤 양편에는 창들이 고정되어 있어서 나무 막대기 위에 놓인
깃털 지붕을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거대한 구덩이 여기저기에 왕의 식솔들이 같이 묻히기도 했다.
왕의 애첩들이나 집사, 요리사, 마굿간지기, 시종 등을 목졸라 죽여 같이 묻은 것이다.
말이나 금제 컵, 또는 왕이 생시에 아끼던 보석들도 같이 매장했다.
매장이 다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참가해서 누가 흙두덩을 더높이 쌓아 올리나 경쟁을 했다.
일 년이 지나면 또 다른 의식을 치렀다. 50 마리의 아름다운 말들과 왕의 신하 50 명을 골라 모두 목졸라 죽였다.
그런 다음 이들의 내장을 모두 꺼내고 몸안을 깨끗이 딲아낸 후 왕겨를 가득채우고 다시 꿰맸다.
이 일이 끝나면 무덤 주변에 두 개 씩 짝을 지어 많은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는 반쪽짜리 바퀴테들을
올려놓아 아치 모양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튼튼한 막대기를 죽은 말들의 꼬리에서 머리까지 관통시킨 후
아치가 말의 어깨를 지탱하도록 말들을 바퀴테 위에 올려놓았다. 뒤의 아치는 말의 배와 사지를 지탱했다.
이렇게 하면 말의 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모양이 되었다. 각 말에는 고삐를 꿰어놓았으며
이 꼬삐들은 말 앞까지 늘어뜨려 나무 말둑에 묶어놓았다.
모든 준비까 끝나면 앞서 교살당한 50명의 시신들을 말들 위에 올려놓았다.
또한 사람들의 시신도 척추에서 목 부분까지 막대기를 관통시켜, 척추를 뚫고 나와 밖으로 돌출된 막대기의 끝 부분을
말을 관통시킨 막대기의 흠이 파진 부분에 연결시킴으로써 일의 효과를 드높였다.
이렇게하여 50 명의 말탄 전사들이 무덤 주위를 둥그렇게 감싸도록 만들었다.
아틸라는 자신의 결혼식 날 밤 출혈 과다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 왕 사후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훈족들은 자기 종족의 전통에 따라, 왕이 죽자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에 일부러 깊은 상처를 내 모양을 일그러뜨렸다.
용감한 전사의 죽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의 눈물이 아니라 남자들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보다 훨씬 뒤에 등장한 독재자 한 명도, 종류는 다르지만, 결혼식 날 곤경을 치른 얘기가 전해진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결혼식 날 밤 격력한 섹스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폴레옹이 비명을 내질렀다.
조세핀은 상대방이 절정의 순간을 맞이해 내지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개가 나폴레옹의
다리를 물었던 것이다. 라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한 순간이 깨져 실망한 조세핀은 밤새도록
나폴레옹의 상처에 압박붕대를 대고 누르고 있어야 했고, 나폴레옹은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은 이제 광견병으로 죽게 되었다고 신음 소리를 냈다.")
아틸라의 시신은 들판 한복판에 안치되었으며 화려한 비단천에 싸인 채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다.
그리고 훈족 전체에서 가장 말을 잘 타는 자들이 마치 서커스 게임처럼 원형 대열로 주변을 돌며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는 만가를 불렀다.
훈족의 위대한 왕이시며,
문드주쿠스의 아드님이시며,
가장 용맹스런 부족들의 통치자이시며,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위대한 힘을 지니셨던 아틸라 왕께서는,
스키타이와 게르만 왕국들을 소유하셨고
동, 서 로마 제국을 공포에 떨게 하셨으며
그 도시들을 정복하신 뒤,
다른 도시들은 제발 공격 말라달라는 간청을 불쌍히 여겨
매년 공물을 받기로 하셨다.
이런 모든 일들에 다 성공하신 후,
적의 공격이나, 친구의 배반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하로운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하고 즐겁게, 어떠한 고통도 없이
돌아가셨다.
누구도 복수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이와 같은 애도의 표시가 다 끝나자 이들은 아주 정중하게 그의 무덤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나서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시키며 대열의 양쪽 끝을 연결시켰다.
시신의 매장은 밤늦은 은밀한 시각에 이루어졌다. 관은 가장 강력했던 왕을 기념하기 위해
금, 은, 강철 등으로 장식되었다. 강철은 그가 다른 나라들을 정복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금과 은은 동, 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전쟁에서 잡은 적병의 팔도 함게 매장되었고, 기타 진귀한 의상들이나 반짝이는 보석,
왕의 권유를 상징하는 온갖 장식물들도 매장되었다. 매장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왕의 엄청난 부귀영화를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여 매장이 끝난 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노동의 대가치곤 너무 끔찍한 것이었다. 묻히는 사람이나 묻는 사람이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공통의 운명이었던 것 같다.
아틸라의 왕국은 그가 사망하자 곧 멸망했다.
역사가들은 아틸라라는 인물의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양 로마 제국을 위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잠시 동안이라도 훈족을 통일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아틸라는 스칸디바니야 지방의 전설들 속에서 아트리라는 이름으로,
"니벨룽겐의 반지" 같은 독일 전설들 속에서는 에트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