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오늘도, 난 너의 흔적 안에 살았죠"
좋아하는 밴드 "넬"의 김종완이 불러주는 몽환적인 원곡도 엄청 좋아하지만
한승윤의 커버곡으로 듣는 "기억을 걷는 시간" 그저 담담하게 아련함을 선사하면서도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특히 가사 자체가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싶어서 그냥 무심히 들어도 울컥 하다는.
그 무심을 지나 가슴 한 켠에 잠겨져 있던 저장고가 열리자마자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한 공간을 떠올린다.
낙원동, 블루BLUE, 인사동 뒷골목...아스라한 기억이 골목 초입은 안개 속처럼 희미하게 그려지지만
그 안의 공간은 정말 하나하나 죄다 기억이 난다.
골목을 따라 들어가서 오른쪽 켠 대문을 열면 하늘과 옛날식 부엌과 마루와 방, 비록 테이블이 자리를 차지했어도...
한옥 느낌의 가정집을 개조한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발길들은 잦았고 하늘 천정을 천막으로 가리운
그리하여 주어진 영역보다 더 공간감을 넓혔던 그런 장소를 숱하게도 들락거렸던 기억이 하나 둘 되살아난다.
기억이란 참으로 묘하다.
일정부분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사라지고 말았음이나 뭔가를 통해 다시 되살아나지는 것.
그것도 물체를 비롯하여 실제적 감각기관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 속 기억회로가 새삼스럽게 작동하여
저 먼 곳에 잠겨져 있을 자물쇠를 여는 기분이다.
참으로 신기한, 아니 잊고 살았던 기억들의 충돌은
어디까지 현실감있게 되돌려진 기억으로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로 이 노래를 듣고 떠오르는 기억의 이름은 "신 형" 이다.
그의 이름 석자가 생각나지 않는다...회로 한 부분이 망가진 듯 싶지만
이름을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칭으로 불렀던 "신 형"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던 까닭이기도 하고
사소하지만 별별 일이 많았던 공간이어서도 그렇고 아마도 잊고 싶은 추억들이 많아서 일 듯도 하다.
그 공간에서 벌어진 숱하게 많은 사연들은 정말 일일이 열거하자고 들면
드라마나 영화 몇편은 족히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되살아나는 기억만으로도.
하지만 "신 형"이라 불리운, 그가 가진 너무나 세련되고 탁월했던,
타고난 재능이 너무 많았던 그 남자는 마치 보물창고 같았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어느 날, 자유로움을 갈구하며 자신의 직업을 버렸다.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의 언어로 말을 하자면,
굉장한 만능 엔터테이너 기질을 가졌던, 아티스트적 요소를 온 몸으로 뿜어내던
웬만한 연예인 보다 키 크고 더 잘 생긴 그냥 훈남 스타일이 아닌 너무 잘생긴 미남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깜냥을 담을 장소로 동아일보는 너무나 제약이 많긴 했다.
차고 넘치는 끼로 보아서 절대적 권위주의 상징같은 안암동 K 대조차 어찌 다녔을까 싶도록
넘치는 그의 재능과 재주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으며 만능키 였으므로
차라리 아티스트로 불려도 좋을 만큼 색다른 면모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또 겸양지덕을 갖춘 그런 남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온갖 스페셜함을 소소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나눌 수 있어서도 그가 좋. 았. 다
우린 그런 그와 함께 매일을 소비하면서 상상도 못할 즐거움을 누리면서 지냈다.
그가 제공한 그 모든 것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판타스틱하여
지금쯤이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이해받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혹은 너무 많이 앞서 갔다.
하지만 그의 집안, 너무나 보수적이기도 하고 권위적이기도 했을 집안력에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숨죽이고 살았던 것이나 아닐까 추측해보는 정도? 였음이니 참으로 안타까울 일.
그러니까 동아일보를 들어갔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안정된 직업을 버리는 결단을 하고야 말았으니
그 모든 힐난의 눈초리와 시선을 뒤로 하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야만 했으므로 모든 것을 버린 것이었고
그의 차고 넘치는 깜냥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 우리들이었음이리라.
"블루", 그때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단어는 아니었다.
그 블루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지녔는지는 한참을 지난 후 곱씹어 볼 시간이 되어서야 알아졌지만
여전히 단어가 의미하는 , 그가 추구하였던 완벽한 "블루"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 남자 "신 형"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안타깝긴 하지만 우리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금녀의 지역, 득실거리는 남자들 사이에 유일한 여자로서 그 문턱을 넘나들었다는 사실이 기분좋은.
그러면서도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여자로서의 권리는 충분히 누린.
그 시절에는 여자가 남자를 형이라고 부르는 일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다반사의 일상이었으며
남녀 거리감 따윈 절대 허락하지 않은 친밀감의 상징적인 그런 단어이기도 했다.
그런고로 "블루" 안에서는 그야말로 자유로움의 극대치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제3지대의 사람들을 눈앞에서 마주하며 스스럼 없이 그들과 하나의 집단을 이뤄가기도 했다.
물론 덕분에 그들을 이해하게 되기도 했고 이해받지 못하는 그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기사로 써내려 가기도 하였지만 현실은 지금도 냉정하고 불인정의 상황은 여전하다.
그런 그들을 품고 보듬어 안아 장소 제공을 하고 문화적 키치와 술과 음식과 기타등등으로
그들의 인정하던 유일무이한 그런 곳 "블루"
그는 그들을 돌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 자신은 그들과 너무나 확연하게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을 이해하는 단 하나의 문명인이 되고자 했다.
사람은 각자의 정체성을 마음대로 누리며 살 권리가, 자유가 있노라며 그들을 돕기도 하고
그들을 아우르는 장소의 대변자가 되는 걸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그를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하면서 그의 세상에 쥔장 또한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길에 동조자가 되어 그를 돕기도 하고 역시나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까지 사는 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숱한 일들을 "블루"에서 보고 느끼며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된.
그런 그가 어느 날. "블루"를 떠났다.
동질감은 동질감으로 존재하여야 함이었으나 완벽한 이해와는 좀 괴리가 있었던 듯...
나중에서야 알았다.
떠난 이의 흔적이 너무나 커서 메워질 수 없는 구멍으로 잔재하던.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가 동생처럼 아끼던 양성애자의 사악한 짓에 두 손 들고 말았다는 생각이.
아마도 "블루"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금도 지우지 못한다.
암튼 그는 신체 건강한 이성애자였으므로 그 많은 것을 이해하고 감내하며 지냈던 시간들이 무의미로 돌아가자
퇴계로 대한 극장 건너편 옥상, 일명 루프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연락을 해왔다.
따라서 우리들의 아지트도 그쪽으로 당연히 옮겨지고 말았음이니 시인 장ㅅ주와 자주 찾았던
그리하여 은근히 애정 전선이 드리워졌을 장소 "블루"는 안녕...퇴계로 시절로 옮겨갔다.
그 옥상에서 기절할 뻔 했다.
그가 꾸려놓았던 옥상의 천문대 같은 느낌의 장소는 '판타스틱'이라는 단어가 절로 나왔다.
판타스틱, 판타스틱 하다의 절정체....하늘을 가린 면천막을 살짝 걷으면 드러나는 까만 하늘과 총총한 별.
그 질감을, 느껴지는 상태를 빛나게 하는 작은 무대 핀조명까지 얼마나 완벽하던지
밤이면 밤마다 거의 살다시피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들도 허다했던 기억.
또한 그런 문화를 갈구하는 쟁이들을 불러들이느라 바쁘기도 했었다.
하지만 공간에 따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달라진다는 것쯤은 아실 터.
그 공간에서 만나진 사람들은 의외로 디자이너와 화가를 비롯한 독특하고 유니크하다 못해
자기만의 개성이 차고 넘치는 그런 아티스트와 유별나게 등산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그 공간에 아쉽게도 글쟁이 들은 합류하거나 잠입할 수 없었음이 아쉬울 뿐이었지만
그 공간의 이름은 또 딱히 무엇이라 부를 것도 없었다.
단 너나들이로 찾아들 공간이었다는 것 뿐이고 그가 한 구석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
그저 아름아름으로 찾아들어 그곳에서 열정과 에너지로 점철된 자신의 소양과 문화적 코드를 발산하기만 되는 장소.
그 공간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이도 즐거웠다.
지금, 얼굴은 기억나지만 이름이 가물가물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부지런히 찾아들었던 그곳.
그 "신 형"이 어느날 물었다.
"우리 형수님이 이ㅈ임 요리연구가 인데 혹시 넌 어때? 가족이 될 수 있겠어?"
오잉?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순간적으로 놀라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런 개념이 온 몸으로 파고 들면서도 생뚱맞다는 생각이.
와중에 몸은 어쩌자고 사시나무 떨리 듯 떨렸다....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절대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적은 없었다........그즈음에 결혼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1도 없었으므로...
엄청나게 좋아하기는 했었지만 그런 느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하지만 그 이후로는 마음 편하게 그곳을 들락거리지는 못했다.
거절의 단어도 생각할 수 없었으며 그 가족으로의 합류는 언감생심이었으므로.
그 집안의 절대적인 잣대로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더더욱.
그 "신 형" 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발길은 뜸해지고
그러다가 한 참 후에 그곳을 찾았을 때는 등산에 미친 그래서 도봉산 사수꾼을 하던 날다람쥐만 망연자실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신 형"이 종적을 감췄다.
그렇게 그와 멀어져 갔다.
어렸던 것이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했던 그를 끌어안기에는
그 집안과의 사투도 겁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남자 "신 형"은 음색장인 한승윤이 불러주는 "기억을 걷는 시간"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떡하죠 이제, 어떡하죠..." 라고 읊조리는 한승윤의 음색이 가슴 속으로 후욱 들어온다.
"난 너의 시간 안에 살았죠" 가 기억나는 그런.
"그대 어떤 가요 그대.......당신도 나와 같나요" 라고 묻고 싶은.
하도 "신 형"이라 불러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늘 문득 그가 그립다
미남이시네요 였던....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던 그가.
글자락이 끝나는 순간
기적처럼 그의 이름이 기억났다.
첫댓글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구만요
우리들의 부자유했던 젊은 날들이여~!
참 과도기를 살아낸 우리들이기에 더더욱~!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터...
많은 경험의 축척이 재산이라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