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9일 [연중 제18간 금요일]
마태오 16,24-28
자녀를 많이 낳음이 가장 행복한 투자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인생이 ‘투자’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투자는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그것을 갚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투자라는 개념이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달란트의 비유’(마태복음 25:14-30)에서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투자하는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투자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나 명예, 쾌락 등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는 게 없습니다.
투자한 것이 회수되는 때는 죽음 이후일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돈을 덜 번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박지형 대표가 위암 복막 전이 4기로 6개월~1년 선고받고 주위에 죽어가는 암환자들을 보며 느낀 것, 곧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도 ‘잊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잊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투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교회를 낳으시고 교회 안에서 당신이 기억되게 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교회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매 미사 때 기억합니다.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죽음의 고통을 이깁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를 낳았을 때 영원한 신랑과 같으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어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아들을 살리고 좋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는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특별히 최저출산국이고 자녀를 키움이 행복보다는 고통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더 큰 고통은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임을 깨닫게 하도록 우리는 노력할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성녀 지아나 베레타 몰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입니다.
임신 중에 합병증이 발생하자 그녀는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자녀의 생명을 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지안나의 사심 없는 결정으로 인해 출산 직후 사망하게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과 희생의
유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2004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엄마가 생명을 바쳤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투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성인, 성녀입니다.
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약 2,5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밀수입하여 구한 폴란드의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중 많은 아이가 비유대인 가정에 맡겨졌습니다.
그녀는 심한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노벨상은 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98세까지 사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제가 구한 아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저를 찾아와요.”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9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6,24-28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 대체 무엇을 위해 바칠 것입니까?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왜 그리 사소한 것에 목숨을 겁니까?” 저도 돌아보니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리도 혈안이 되고 목숨을 걸 듯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 하나뿐인 목숨, 시시한 대상, 스쳐 지나가는 대상,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대상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보다 고결하고, 보다 가치있고, 보다 의미 있는 대상에 목숨을 걸고 올인을 해야 하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 최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 안에는 목숨이란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목숨,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칩니다.
다들 목숨은 연명하기 위해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도 용하게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목숨이라는 것이 또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순식간에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지만, 3분, 5분 숨 못 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목숨과 관련해서 주어지는 과분한 특전이요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숨은 세상 사람들의 목숨과는 철저하게도 차별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물학적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또 다른 목숨이 시작됩니다.
영원히 지속될 영생을 시작하는 영혼의 목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지요.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 대체 무엇을 위해 바칠 것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역설적인 초대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묵상해봐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목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주님 사랑 안에 길이 생명의 호흡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강론>
(2024. 8. 9. 금)(마태 16,24-28)
<허무한 것들로는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4ㄴ-28).”
1) 28절의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신자들과 사도들’입니다.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살아 있는 동안에 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이다.”인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이천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재림과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들’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든지 때가 되면
재림과 종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 28절의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앞의 10장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ㄴㄷ).”
이 말씀에서 ‘너희’는 ‘사도들’이고,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 모두에게 다 복음을 선포하기도 전에”이고,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는 “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도 겉으로 보이는 표현 그대로 생각해도 되는 말씀은 아니고,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교회’로,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재림과 종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곧 재림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승리가 이루어지니까 참고 견디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3)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을 고비를 겪은 사람들이 많고, 죽음의 고통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어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또 그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고통과 무서움을 생각한다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살아 있는 채로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서 맞이하는 사람들보다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재림과 종말의 날은 곧 ‘최후의 심판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심판’에 대해서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믿기만 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만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마태 7,21), 심판은 ‘행실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행실’은 ‘지금의’ 행실입니다.
“전에는 나도 신앙생활을 잘했었다.” 라는 말이나,
“나중에 잘하겠다.” 라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결과’는 사실상 각자 자기 자신이
‘지금’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기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항의할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5) 26절의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은,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그것들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세속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것’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실천 등으로만.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