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둘레에 심은 소나무라는 뜻으로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가림막의 의미가 있어요.
한번 눈감은 세상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잊어버리고 편히 쉬라는 후손들의 뜻이 담겨 있죠.
그런데 여기는 다소 정치적인 뜻과 생태적 뜻이 있어요.
먼저 생태적인 면은 소나무밑에는 다른 식물이 살기 어렵기 때문에
무덤과 숲을 뚜렷이 경계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면은 원래 도래솔은 왕들이나 권세가들 무덤에 하는 것으로
사는 동안 누릴것 다 누렸으니 죽어서는 후손들이 하는것
보시지 말고 누워계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중국 周나라때는 무덤가에 심는 나무를 국가에서 정했는데
군주의 무덤가에는 소나무.왕족의 무덤가에는 측백나무.
고급관리의 무덤가에는 회화나무.학자의 무덤가에는 모감주나무.
서민의 무덤가에는 사시나무를 심게 했다고 해요.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본인 나름이지만
권세 있었던 사람 무덤가에는 침엽수(여름이고 겨울이고 아예 밖이 안보임) .
관리의 무덤에는 활엽수( 겨울에는 밖이 보임).
서민의 무덤에는 사시나무( 잎이 자주 펄럭거려 평소에도 밖이 잘보임)
즉 살아 있을때 권세가 있었으니 두고 온것이 많아
이승에 미련이 많아 완전히 안보이게 하겠다는 의미이고
서민이야 남기고 온게 없으니 실컷 밖을 보라는 의미로 해석될수 있어요.
위의 사진은 서오릉의 홍릉사진인데 보시면
아예 밖을 보지말라고 숲을 만들어 놨는거를 볼수 있어요
^^시치미의 어원^^
요즘 고급 스포츠라고 하면 골프를 떠올릴 겁니다.
과거 우리 선조틀의 시대에는 어떤 것이 고급 스포츠였을까요?
고려시대 귀족들이 즐겨하던 고급 스포츠에 매사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매를 날려보내 꿩이나 토끼등 작은 짐승들을 잡아 채 오게 하는 놀이로
귀족들은 각자 자기의 매를 가지고 있었으며 내기를 걸어 시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냥용 매가 매우 비쌌습니다.
야생 매를 사용할 수는 없으므로 어린매를 오랫동안 훈련시켜야만
사냥용 매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사냥매 주인은 자기 이름을 새긴 하얀 깃털을
자신의 매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름표를 붙여둔 것입니다.
이 이름표가 바로 '시치미' 입니다.
어떤 일을 해 놓고 하지 않은 척 하는 행동을 시치미 떼다 라고 하는데
이 어원이 사냥매의 이름표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넌센스 퀴즈] 매가 불닭볶음면을 먹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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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움
^^곤장^^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곤장은 언제 시작하고 무슨 나무였을까?
<고려사>에 물푸레공문이라는 말이 등장해요.
관리들이 공문한장으로 백성들을 불러놓고
다짜고짜 곤장질을 해 재산을 강탈한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때 곤장은 물푸레나무로 만들었어요.
조선조에 들어와 물푸레곤장은 너무 아파 가죽채찍이나 다른 나무로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예종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지금 사용하는 몽둥이는 너무 작아 죄인이 참으면서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버드나무나 가죽나무 말고
물푸레나무 만을 사용하게 하소서"라고 상소한 기록이 있어요.
이후 물푸레나무와 간혹 참나무를 곤장으로 사용했는데 너무 아프고 부작용이 많았다 합니다.
현종4년(1663 년)에는 곤장의 재질을 버드나무로 정하였지만
잘 지켜지지 않아 숙종11년(1685년)에는 아예 30대 이상을 치지 못하도록 했다 합니다.
정조2년(1778년)에는 "곤장은 모두 버드나무로 만들도록 하라"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해요
가지를 꺽어 물에 담그면 물이 파래져 물푸레나무라 불렀어요.
동의보감에도 안질에 좋다고 나옵니다.
물푸레나무가지를 물에 하루 정도 담가 놓았다가
이 물로 세수하면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고 합니다
옛날 절에서 스님들이 물푸레나무껍질을 물에 담가 푸른물이 나오면
여기에 재를 섞어 회색승복을 만들어 입었다고 하고
물푸레나무 달인물에 먹을 갈아 글을 쓰면 몇백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아
일본에서는 문신을 새기는데 썼다 합니다.
^^<정수기의 역사>^^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70% 이상이 수분, 즉 물이다.
인류는 물과 함께 역사를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사막의 폭염도 물만 있다면 버틸 수 있고
물을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음용수에 대한 관심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사시대 어느 시점 물을 끓여먹던 인류가 최초의 정수기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숯이 정수필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당시의 수도관인 `연관'을 통과한 물이
음용수로 부적절하다며 여과하거나 끓여먹는 것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안전한' 음용수의 확보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됐습니다.
화학 공정의 발달로 오염물질을 물에서부터
분리ㆍ제거할 수 있는 `분리막(Membrane)'이 등장했고,
분리막은 식물의 섬유구조를 이용한
`아세테이트 셀룰로즈(Acetate Cellulose) 막'의 개발로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후 각종 세라믹과 고분자 합성막이 등장했습니다.
최초의 정수기는 2차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미국 해군에 의해 개발됐습니다.
미 해군은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해 담수로 바꾸는 역삼투압 정수기를 개발했습니다.
정수기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하던 것으로,
1968년에 국내에서도 상품화되기 시작해 1980년대부터 본격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 낙동강 페놀오염사건과
웅진코웨이의 정수기 임대사업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장이 열리게 됩니다.
-어느 세심한 분식집의 정수기 사용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