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박성룡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한국전후문제시집>(1961)-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서정적
◆ 표현 : 명상적 어조
변용을 통한 단순 반복 구조로 이루어짐.
바람이 불어 모든 것을 쓸어버리듯, 화자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읜다고 함.
바람과의 교감을 통해 버림의 경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평이한 시어를 노래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 구절의 반복, 바람과 나는 서로 공감하고 있음.
◆ 주제 : '버림'의 경지에 대한 통찰(깨달음)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바람도, '나'가 모든 것을 여의고 있다는 것을 앎.
◆ 2연 : 바람도, '나'가 낙엽이 쓸리듯이 모든 것을 여의고 있음을 앎.
◆ 3연 : 바람도, '나'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있음을 앎.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형이상학적 세계를 노래한 시이거나,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시라고 해서 훌륭한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소월의 시가 쉬운 언어로 쓰였으면서도 오래 읽히는 이유는 보편적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시도 쉬운 언어를 사용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시는 세계와의 만남에서 획득되는 진실의 표출이다. 화자는 '바람'을 응시하고 있다. 순간 바람은 화자와 등가물로 화한다. 그렇다면 화자의 현재 심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을 여의는 정신적 행위는 일종의 초탈이다. 이것은 고도의 정신적 수양에서 가능해진다. 종교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여읨'을 목표로 한다.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버릴 때 진정한 자유는 획득된다고 초월적 존재는 가르친다. 화자는 현재 그런 삶에 대해 깊은 생각에 침잠해 있다. 이 때 불어오는 바람과 만나게 되고, 바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바람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무화(無化)' 자체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쓸어가며 무화시킨다. 내가 모든 걸 여의듯이 바람도 그렇다. 이런 교감에서 이 시는 비롯된다.
이 시는 반복 구조로 되어 있다. 반복은 단순성을 전제로 한다. 이 시의 반복은 매우 단조롭지만 '바람도 내가 여희고 있음을 안다 → 낙엽이 쓸리듯이 여희고 있음을 안다 →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있음을 안다'로 변용되면서 의미는 심화된다.
2연의 반복은 비유를 통한 구체성을 강조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3연의 반복에서는 인식이 진전되어 보다 심화된 의미로 진행된다. '내게 없는 것'이라는 모순 진술은 '모든 것이 내게는 없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나 이 모순 진술이 무소유의 경지를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3연에서는 하나의 깨달음에 이른 명상적 태도가 강화되어 드러난다. 그렇지만 단순 반복의 담담한 서술, 명상적 어조, 형식의 단순성은 '버림'이라는 주제 의식과 성격상 동질성을 가진다. 이 시는 이런 것들이 조화된 서정성 높은 작품이다.
[작가소개]
박성룡 : 시인
출생 : 1934. 4. 20. 전라남도 해남
사망 : 2002. 7. 27.
수상 : 1989년 국제펜클럽문학상
1964년 현대문학상
경력 : 서울신문
언제나 조숙했던 늙은 소년
박성룡은 1930년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389번지에서 아버지 박동준과
어머니 손고당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많은 형제가 있었으나
3명은 성장과정에서 사망하고 박성룡을 포함한 2남 4녀만 장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갔던 아버지가 8.15광복과 함께 돌아왔으나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그에게 남긴 말이 “너무 허망하다”는
말이었다. 여섯 살에 가족이 모두 광주로 이사하였으나 4년 정도 늦은
출생신고 때문에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갔을 때도 박성룡은 혼자 남아 골목길을 지켜야 했다. 대신 한학을 했던
백부의 권유로 2년간 개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일본어 등을 공부하였다.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봐 광주서중에 입학한
것도 이러한 연령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겪게 된 이러한 성장과정은 그가 관조적인 심성을 지니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늘 급우들보다 조숙했고 아는 것이 많은 ‘늙은 소년’이었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했던 그림
그가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커진 때는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무렵으로
트르게네프의 「랍인일기』를 읽은 후였다. 광주서중에 진학하여서는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는데, 일요일이면 캔버스와 이젤을 짊어지고 교외에 나가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화구나 물감 살 돈이 없어 그만두게 된다. 훗날 이 스케치 체험은
시에 있어 사물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통찰력을 키워주고 감각적 이미지의
능숙한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고 후일 신문사의 미술담당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서중 문예부원으로 활동하며 교지 「무등」에 자신의 시를
발표하며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만해, 미당, 지용을 비롯한 청록파 시인들의
시편들을 접하며 우리말의 참맛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중앙대 영문과에 입학하였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1950년대 광주 시단을 풍요롭게 하던 『영도』의 창간 동인
1955년, 50년대 광주 시단을 풍요롭게 했던 『영도』라는 동인지가 간행되었다.
‘영도’는 물이 얼기 시작하는 빙점(氷點)이자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깃점,
아무것도 없는 무치(無値)의 영(零)이기도 하지만 많은 가치가 시작되는
가능성의 출발점이다. 동인 대부분은 광주서중, 광주고 출신으로 아직
시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대학 초년생들인 박성룡, 강태열, 정현웅,
윤삼하, 박이문 등이 학자금을 절약하며 참여하였다. 김현승과 박흡의 지도아래
동인지는 4호까지 출간되었으며 박성룡도 이 동인지에 「과실」, 「귀정」,
「바람 부는 날」, 「눈사람」, 「가로수」를 발표하였다. 『영도』가 나올 무렵,
광주에서는 목포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일대를 장악한 동인지 『신문학』과
문학종합지 『시정신』이 있었다. 두 동인지의 화려한 지면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박성룡은 한국전쟁이라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영도』와 같은 패기
넘치는 동인지가 발행되었다는 데 큰 자부심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