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차와 법이 무시되어도, 결과만 좋다면 끝인가 --
91년도 6월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의예과 2학년이었다. 중간고사였나 쪽지시험이었나 하여간 그런 걸 준비를 하다가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의예과는 혜화동이 아니라 신림동에 있었으니 통학에 보통 한 시간이 걸리곤 했다.
웬걸 근데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데 전경들이 쭈루룩 도열해 있다. 거긴 청량리쪽이라 대학이 있는 데도 아니었고, 쟤네들이 여기서 뭐하나 싶었다. 그런데 한 명이 나한테 신분증을 보잔다. 뻑하면 까라는 게 민증이던 시절이니 보여줬는데 따라오라고 한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당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있던 시기였으나 거기가 현장도 아니고 대학교 주변도 아닌데 왜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지. 그렇다고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오라고 하는데 안 갈 수도 없고, 뭐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어쩌겠나 싶어 따라가는데 앞서가던 전경 아저씨가 나한테 말을 건다.
"이런 거 되게 짜증나시죠."
"네? 네..."
자기들도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일이지 달가와서 하는 거 아니다는 식이었다. 흔히 닭장차라 부르는 전경 호송 버스 문을 열고는 올라타라고 한다. 그걸 맨날 학교 앞에서 보기만 했지 실제 올라타보긴 처음이었다. 아저씨가 친절한 말투로 얘기한다. "조금 있다가 금방 가실 꺼에요 뭐 별일 없으니까요."
그런데 차에 올라타니, 속안엔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 나하고 비슷한 나이로 보였고 죄다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버스 문이 닫히자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다. 내부에서 인솔하는 전경이 (그게 백골단이었을 꺼다.) 이쪽으로 빨리 앉아 라고, 성깔 있게 반말이 나온다. 응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눈앞에 불이 번쩍 한다. 주먹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세게 얻어 맞았다.
전경이 악을 쓴다. "이 새끼가 빨리 안 움직여?"
그제서야 분위기가 파악이 좀 됐다. 거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몇 대씩 얻어맞았을 것이다. 뭔가 복학생 분위기 나는 아저씨 옆에 앉았는데 문이 또 열리고 또 한 두 사람이 올라탄다.
근데 올라오는 사람들이 대학생같아 뷔질 않는다. 그냥 동네에서 노는 (당시엔 날날이란 말을 많이 썼는데...) 그런 친구들 분위기였다.
한 친구가 "에이, 씨...ㅍ" 이러면서 낮게 툴툴거렸다. 모두들 쟤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버스 안에 있는 백골단 두 세명이 다 몰려들어서 개패듯이 줘패기 시작한다. 퍽, 퍽 소리를 바로 옆에서 그렇게 크게 듣기도 처음이었다.
그런 걸 보고 나니 다들 숨도 크게 쉬지 않게 되었다. 전경이 윽박질렀다. "고개 숙이고 있으란 말야 이 새끼들아!!!" 고개를 들거나 창밖을 보는 놈이 있으면 용서 없이 주먹이 날아갔다. 나는 좀 덜 맞은 편이었다. 하도 무서워서 얌전히 말을 들었으니까.
버스는 출발을 하더니 한 30~40분정도를 운행해서 어딘가에 멈춘다. 거기가 어딘줄도 몰랐고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리라고 해서 한 줄로 버스에서 내리는데 백골단 애들이 소리를 막 지르고 있다. 그 중 한 아이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용서없이 발길질이 날라왔다. "눈 깔아 이 씨ㅍ놈아"
그때 2단 옆차기라는 걸 처음 맞아 봤다. 가슴 한 가운데를 군화발로 얻어맞았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들 주변이 어딘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짐승들마냥 주먹이며 발길질로 쳐맞아가면서 건물 속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로 우루루 내려가 커다란 홀 안에 착석했는데 어림잡아 몇백명은 되었다. 전부 청년들, 남자들이었다. 아마 식당이었던 것같았다. 거기는 나중에 알았지만 수유리에 있는 강북 경찰서였다.
사복 형사들이 등장했다. 몇 명이 사람들 사이를 위압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대학생놈들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고 푸념을 하고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 그 다음날 아침에 풀려났다. 풀려나기 전 형사 한 명이 앞에서 말을 한다.
"어제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여러분들은 비록 거기 연루된 자들은 아니지만, 그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야, 알겠나?"
우리는 모두 조용히 있었다. 형사는 이 인원이 모두 한꺼번에 나가면 사람들 보기에 안 좋을 것이니 5~10명정도씩 나눠서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거기에서 풀려나면서 비로소 내가 있는 데가 어딘지 알았다.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어찌 어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읽는 신문을 보니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이 정원식 총리가 외대에서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제서야 감이 잡혔다. 외대라면 내가 끌려간 곳에서 3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장소였다. 아마도 서울시 전 병력이 다 그쪽으로 와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자들은 전부 다 끌고 가서 가둬놓고 분풀이를 했던 것같다.
정원식 총리는 밀가루를 맞았지, 학생들에게 발길질이나 주먹으로 난타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대한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이 나라 대학생들 전부를 줘 패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빡쳐 있던 것같다.
한 통의 전화도 할 수 없이 한 12시간이 넘게 억류돼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를 보고 부모님은 마구 화를 내셨다. 어떻게 된 놈이 전화 한 통 없이 외박을 하느냐고 하셨다. 당연히 화를 낼 만 했다.
옷에는 전경 군화발 흙자국이 어찌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지, 그 꼬라지도 볼만했을 것이다. 사연을 듣고 난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서 강북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막 소리를 질렀지만 그쪽에서 제대로 대답을 해 줄리는 없었다. 어쨌든 나는 세수를 하고 책가방을 챙겨서 다시 학교로 가야 했다.
이게 약 30년 전의 일이었다.
많은 한국민들이 "훌륭하신 대통령"으로 기억하는 그분이 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어보니, 그분이 업적이 워낙 많으셔서, 국가장을 치른다고들 한다. 뭐 내가 그분의 통치 시절 경찰한테 아무 문제도 없이 끌려가서 귀싸대기 돌려차기를 맞고 왔다고 그토록 훌륭하신 대통령님께 앙심을 품는 건 아니다. 그 긴 세월이 지났는데 그런 감정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단지 이걸 생각해 주길 바란다.
민주주의 정치가 어려운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의견 모든 것을 청취하면서 하나 하나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한테 누구든 마음 먹은 대로 처벌할 수 있고 누구든 마음대로 억류시키고 가둘 수 있고 반대하는 자들은 뜻대로 폭력을 쓸 수 있는, 그런 권력이 있다면, 그런 힘을 갖고 못할 일이 있을까?
언론도 통제하고 검찰은 유서도 대필시켰다고 누명도 마구 뒤집어 씌웠던 시절이다. 그렇게 할 수 있던 시절에 외교적 성과와 거시경제적 성과가 이러이런 게 있었다라고 정권을 칭찬한다면, 나는 되묻고 싶다.
대체 민주주의는 왜 필요한가?
폭력적인 권위주의, 독재 정치가 그런 업적을 남겼으니 칭찬해야 한다면, 절차적 정당성을 모두 지키는 민주적 정치는 무슨 필요가 있다는 건가?
높은 분들이 국가장으로 이분을 고이 모신다고 하니 나같은 개, 돼지들은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 나라는 권력을 손에 쥐면 절차와 법을 무시해도 결과만으로 판정하는 사회라는 게 증명되는 듯하다.
강기훈님이 노태우 정권 시절의 검찰이 뒤집어 씌운 범죄 혐의를 벗어나는 데 26년이 넘게 걸렸다. 그 동안 그의 인생은 박살이 났다. 그리고 지금은 말기 간암 환자가 되어 있다.
정 노태우를 국가 장으로 보내야 하겠다면, 그에 의해 저렇게 된 사람의 삶과 죽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도 누군가 대답해야 하지 않겠나? 저런 분들은, 과연 지금 이 국가장이 치뤄지는 장면을 어떤 마음으로 보겠는가?